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주영국 시인

부흐고비 2022. 6. 21. 07:59

주영국 시인
전남 신안 어의도에서 태어났다. 공주대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시와 정신》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했다. 2010년 《시와 사람》 신인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새점을 치는 저녁』이 있다. 19회 오월문학상, 2004년 전태일문학상 수상. 광주전남작가회의 사무처장, 죽란시사회 동인.

 



새점을 치는 저녁 / 주영국
새점을 치던 노인이 돌아간 저녁/ 공원의 벤치에 앉아 나도 새를 불러본다/ 생의 어디에든 발자국을 찍으며/ 기억을 놓고 오기도 해야 하였는데/ 난독의 말줄임표들만 이으며 지내왔다/ 누군가의 경고가 없었다면 짧은/ 문장의 마침표도 찍지 못했을 것이다// 생의 뒤쪽에 무슨 통증이 있었는지/ 진료를 받고 나와 떨리는/ 손에서 노란 알약을 흘리고 간 사내// 산월동 보훈병원 302호실/ 노란 알약을 삼킨 날개 다친 새들에게/ 마지막 처방전을 써준 김 원장이/ 사직원의 파지에 새를 그리고 있다// 내일은 그도 저무는 공원에 나가/ 새점을 칠지 모른다/ 누군가 또 흘리고 간 노란 알약에서/ 새점을 치던 저녁을 떠올려볼지 모른다.//

감꽃 지다 / 주영국
예초기 날에 개구리가 날아갔다/ 잘린 풀에서는 여자의 냄새가 났다/ 초경을 시작한 여자 아이의 냄새였다/ 불행은 예고되지 않아서 더 불행하다/ 잔돌이 여기저기로 튀고, 수유를/ 마친 풀들이 어지럽게 잘리며/ 함께 울며 아우성을 지를 때도/ 불행은 예고되지 않은 것이었다/ 풀밭 어디쯤에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예초기의 시동을 끄고 떨어진 감꽃을 주웠다/ 처음부터 열리지 말았어야 할 감꽃/ 대개의 결론은 살아남은 자들이 낸다/ 국수를 삶았다며 어머니가 부를 때도/ 감꽃 두 개가 맥없이 떨어졌다/ 초경을 시작한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며/ 가지 끝에서 떨어지는 꽃이 더/ 불행하다고 풀들에게 말해 주었다.//

밥 덜어주는 여자 / 주영국
함평 나비휴게소 어느 후미진 자리/ 곰삭은 내외가 밥을 먹고 있다/ 라면 한 그릇에 공깃밥 두 개/ 무안 어디서 양파라도 캐고 온 것인지/ 노란 단무지에 맵싸한/ 양파향이 배어 있다/ 여자는 새처럼 오늘/ 만원 더 받은 일당에 꿈이 부풀어/ 내일은 두 고랑만 더 캐자며/ 남자에게 밥을 덜어준다/ 남자가 여물 먹은 소처럼/ 밥을 새김질 하는 동안에도/ 여자는 더, 더 북쪽으로/ 날아갈 준비가 되어있는데/ 남자의 울대에는 자꾸만/ 여자의 두 고랑 두 고랑이 걸린다/ 내일은 충청 이남으로/ 단비 내리겠다는 소식도 몰라/ 나비가 어깨에 앉았다 간지도 모르고//

체 게바라 생각 / 주영국
삶은 달걀을 먹을 때마다/ 체 게바라 생각에 목이 멘다/ 볼리비아의 밀림에서 체가 붙잡힐 때/ 소총보다 더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는/ 삶은 달걀 두 개가 든 국방색 반합// 밀림에 뜬 애기 달 같은 노른자는/ 경계를 서던 소년 병사의 팍팍한/ 꿈을 먹는 것 같아서 더 목이 멘다// 혁명도 결국은 살자고 하는 것인데,// 삶은 달걀을 먹을 때마다 끝내/ 반합의 달걀 두 개를 먹지 못하고/ 예수처럼 정부군에게 죽은 게바라의/ 살고 싶던 간절한 마음을/ 먹는 것 같아서 목이 멘다.//

밥 / 주영국
아침에 또 당했다/ 나이도 어린 놈이었다/ 병가원을 낼까, 사직서를 쓸까/ 생각하는 내내// 마음이 시큰거렸다/ 점심에 밥을 먹었다/ 찬밥을 찬물에 말아 먹었다/ 젖은 밥알이 튀어나올 것 같아/ 에라, 이 등신불아-/ 나에게 하려는 욕을/ 몇 번이나 참았다// 모욕은 견딜 수 있어도/ 배고픔은 끝내 참기 힘든/ 생존의 밥//

검열 / 주영국
어떤 죄를 지어 감옥에 온 남자가 딸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있다 아빠, 올봄에는 묵은 밭을 일궈 해바라기라도 심을까 해요// 남자는 답장을 쓴다 얘야, 그 밭은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아빠가 거기 묻어놓은 것이 있단다// 딸의 편지를 다시 받은 남자 아빠, 어제는 어떤 아저씨들이 오더니 하루 종일 밭을 파주었어요, 그런데 갈 때는 욕을 하고 갔어요// 남자는 이제 답장을 쓴다 얘야, 이제 너의 생각대로 꽃씨를 뿌리렴 아빠가 사람들을 시켜 밭을 일구어주었으니 해바라기들도 잘 자랄 것이다.//

경비원 이씨 / 주영국
경비원 이씨가 갔다/ 경비실에서 찬밥을 먹다가 갔다// 분식집 차렸다 퇴직금 날리고/ 마누라까지 날려 먹고/ 갑질도 못하는 노란 완장을 차고/ 경비원 이씨가 되었는데,// 가슴 두 번 치며/ 억억거리다 맥없이 갔다// 시 쓰는 선배와 화정동에서/ 술 마시고 돌아오는 저녁/ 두터운 망을 보며/ 경비원 박씨가 졸고 있다//

아버지의 도장 / 주영국
무너진 집터에서 찾아낸/ 아버지의 인감도장/ 빚보증 잘못 섰다 날아간// 길가의 큰 밭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인주를 묻혀 도장을 찍어본다.// 발자국이든 무엇이든/ 우리는 찍으며 한 생을 살아가는데,/ 돌아보지 못하고 멈추는 날이/ 찍는 일 끝내는 일이다// 목포의 어느 도장집에서/ 길인으로 새겼다는/ 검은색 뿔도장// 주인은 간 지 오래어도/ 이름 석 자 생피처럼 붉다.//

꽃불철공소 / 주영국
오일 시장 사거리/ 무등분식 지나 불꽃철공소/ 내 눈에는/ 꽃불철공소/ 땅이 뿌리부터 간질거려/ 여기저기서 툭, 툭 벌어지는/ 꽃 피어날 봄날에/ 붉은 쇠붙이를 들고/ 나도 뿌리 하나를 건드리고 싶다.//

왕을 지우다 / 주영국

낙향한 선비가 사직을 걱정하는 저녁/ 왕은 끝내 강을 건넜을까,/ 북쪽 하늘로 난층운 지나더니/ 술시 지나자 비 내린다/ 오늘은 상소문 쓰지 못하고/ 남동풍에 흐느끼는 대숲에서/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울었다/ 불을 피우면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생쌀과 날콩으로 한 끼를 먹었다/ 먹을 사러 간 아이는 돌아오지 않고/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아이는/ 난중의 군사를 피했다며 좋아라 했다/ 사직을 구하자는 방을 붙여도/ 명나라 군대를 기다리는/ 훈구의 귀신들이 호응을 하지 않았다/ 생나무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맥없이 눈물 나고 아득해지는 저녁/ 강을 건너가는 왕을 더는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의 단층집 / 주영국
연립 한 칸을 얻어 이사하던 날/ 어머니는 토끼장 같다며/ 몇 번이나 옷소매를 들었다 놓으셨다// 형이 월남에서 돌아오던 해/ 사과상자로 층층이 집을 지어/ 토끼를 키우고 있었는데,/ 형은 몸 어디가 자꾸만 가렵다고 했다/ 가끔은 맑은 날, 깨꽃처럼 충혈 된 눈으로/ 남국行 비행운을 가리키며/ 이국의 방언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열병에는 토끼간이 좋다더라'/ 어머니는 토끼장을 기웃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셨다// 토끼장이 텅 비자/ 형은 간, 쓸개 다 잃은 토끼들을 따라/ 자신이 흙 한 삽 올리지 못한/ 낮선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 맑은 날 많았는데도/ 남국으로 가는 비행운 보이지 않았다/ 뜻을 알아들을 것도 같은/ 낮선 방언은 어머니가 대신했다// `나는 단층집이 더 좋더라'/ 문패도 없는 형의 집을 손질하다/ 어머니, 花妬姸*에 날아온 꽃잎 하나/ 다칠세라 서둘러 치마로 받으셨다.//
* 화투연(花妬姸): 봄에 꽃 피는 것을 시샘하여 아양을 피운다는 뜻의 꽃샘추위

벌초 / 주영국
가위질 몇 번에 귀 나간 쪽거울을 보며/ 이발을 마친 아버지가 휘파람 불었다/ 가르마 넘기던 아버지는 이발사였다/ 가위 하나만 있으면 팔도를/ 주유(酒遊)하며 살아갈 자신이 있다고 했다/ 나는 또 주전자를 들고 양조장으로 가야했다/ 그 날은 저녁상에서 아버지를 마주하지 못했다// ‘오늘은 현금 내일은 외상’/ 숙제를 하다 말고 남원집 앞을 서성거렸다/ 아버지는 지전 한 장 없이도 술에 취하는 법을 알고 있었기에/ 오늘이 외상이라며 거꾸로 읽었을 것이었다/ 기다려도 아버지는 나오지 않고/ 비 내리는 호남선이 분내에 섞여 흘러나왔다// 흔들려도 넘어지지만 말라던 아버지는 끝내/ 호남선이 끝나는 어디쯤에서 넘어졌다/ 넘어진 자리에 푸른 머리 돋았으나/ 더 이상 쪽거울 찾지 않았다/ 가르마 넘기며 휘파람 불지 않았다// 가업을 잇지 못한 아들이 직계의 인연으로/ 서툴게 머리를 깎고 있다/ 외상 술 아직 끊지 못했는지/ 이발을 마친 아버지의 푸른 머리 위로/ 飮福의 술 몇 잔이 천천히 스며든다.//

봄 이불 한 채 / 주영국
대주아파트 옆 외진 공터에/ 분홍색 봄 이불 한 채 버려져 있다/ 누군가의 마지막 몸을 추억하며/ 입동의 바람 앞에 웅크리고 있다// 객지의 어느 비행장에서 일을 할 때/ 아내와 나는 숟가락 두 개로 살림을 시작했다/ 연탄보일러 숨구멍을 줄이며/ 석유난로에 밥을 끓이면서도, 우리는 좋았다// 봄 이불 한 채를 사며 자꾸만 값을 조른/ 아내는 베개 하나를 덤으로 얻었지만,/ 흥정에 나서지도 못한 나는 애먼 돌부리나/ 툭툭 걷어차며 용문의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봄 이불 솜처럼 부풀어 올라/ 새처럼 조잘거리며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활주로를 이륙한 비행기는 새처럼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새처럼 날 수 있다며/ 아내는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봄날의 꿈을 꾸기 위해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분홍색 이불을 덮고 잠에 들었다/ 새재를 넘어온 바람이 창문을 흔들어도/ 비행기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랑지의 쓸쓸함도 욱신거리는 뼈아픔도/ 봄 이불 속에서 자근자근 잦아들었다// 신혼의 단잠을 재워주던 봄 이불 한 채./ 낡은 솔기의 실밥을 뜯으며, 숨죽은/ 솜을 부풀리며 아내가 느릿느릿 말을 걸어왔다.//

아내의 푸른 손 / 손영국
문을 열자,/ 미역을 헹구던 아내가 손을 내민다/ 아내의 손은 차고 푸르다/ 푸른 옷의 수인번호 0167/ 영치금을 넣어주던 아내는 떨며,/ 파도에 목을 매지만 말라고 했다// 아이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들로 나가자/ 방에는 물이 차올랐다/ 헹구다 만 미역줄기가 엉키며/ 지나온 시간을 물었을 때야/ 아내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천천히 미역의 머리를 풀었다/ 손끝에서 방생의 잔물결이 일었다// 우리는 바다의 바닥에서 만나/ 서로의 줄기를 더듬은 적이 있다/ 그 날도 방에는 물이 차오르고/ 물의 중심을 밀어 올리며/ 줄기의 틈 사이로 미역 새 순이 돋아났다// 호루라기를 불며 후투티를 쫓아가던/ 아이들이 돌아와 문을 열자,/ 미역으로 흔들리던 아내가 손을 내 민다/ 아내의 손이 푸르게 빛난다.//

사막에서 길을 묻다 / 주영국
사막에 달이 뜬다, 혜초의 경을 따라/ 서역으로 천축국전 져 나르는/ 쌍봉낙타 물혹의 능선을 타고/ 마른 빵처럼 달이 부풀어 오른다// 생의 팔 할이 바람이라고 믿지 않아도/ 등압선 길을 따라 사막에는 모래바람 불고/ 서 있는 것들은 모두 풍장을 당해/ 횡으로 스러진지 오래,/ 물수제비 뜰 조약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눈을 비비며 길을 묻는 나에게 낙타는/ 막히면 돌아가라 한다, 흘려보낸 시간이나/ 새김질하며 어디로든 돌아, 가라고 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말은 이제/ 바람 없는 곳에나 쓰일 말이다// 빈집의 물소리를 피해 이역의 길 밖으로/ 떠밀려온 사람들과 생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며,/ 마른 담배 나눠 피우고 있을 때,/ 달빛 아래 푸른 도마뱀이 이게 시간을 번/ 너희들의 죄 값이라며 제 꼬리를 잘라주고 갔다// 내게도 쌍봉의 물혹 돋으려는지/ 자꾸만 등이 가려워 진다.//

무렵 / 주영국
물오리들이 걀걀거리며/ 소망교회 십자가를 노는 저녁/ 나는 천변에 앉아 그가 물속으로/ 끌려가기 전을 기억하고 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던 저녁/ 물 가까운 것들부터 물에 잠기고/ 산 그림자도 잠기며 어둑해지는 저녁/ 밤의 정령들이 하나, 둘 물가로 나와/ 낮에 들었던 누군가의 이름들을/ 젖은 물속에 풀어 놓는 저녁/ 달의 골짜기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마른 귀를 후비는 저녁/ 수제비 한 그릇에 삶은 감자 몇 알로/ 이른 저녁을 먹고 더 무서워지기 전/ 잠에 들어야 했던 섬의 기억/ 얼마를 더 날아야 발전소가 있는/ 강 건너 오래도록 따스한/ 불빛 아래로 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는 저녁, 아득하여라/ 물오리들이 죽은 십자가를 끌고/ 기슭으로 돌아간 낮은 곳에서부터/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물속에도 만 개의 불이 켜진다.//

새우잠 / 주영국
비로소 새우잠을 잘 때// 물속에서나 물 밖에서나/ 살았거나 죽었거나/ 새우들의 처지가 이해된다// 간수의 통문도 잊은 채 불편하고/ 억울해도 새우잠을 잘 때,/ 안아주지 않아도 등 뒤 누군가의/ 온기가 잠을 재촉하는/ 타관에서의 쓸쓸한 저녁// 그립다고 하면 떨리고/ 잊자고 하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그 잠을 자던 시절이 있었다.//

들소의 經 / 주영국
물을 먹은 구름은 아래가 더 무겁다/ 지상에서 제 그림자를 찾지 못했으므로/ 구름이 산에 도달하기 전에/ 마을에는 비가 내릴 것이다/ 연고가 다른 우리는 비밀이 많지만/ 서로의 태생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습한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다 보면/ 저수지의 초지를 잊기도 한다/ 마을의 온갖 소문은 저수지로 흘러간다/ 아궁이의 불씨는 소문의 좋은 재료다/ 굴뚝을 나온 연기는 서풍을 따라/ 대부분 동쪽으로 소문을 실어 나른다/ 들소의 經은 원래 사람의 방언이었다/ 초지에 비가 내리면 집에서 기르던 소가/ 사람의 흉내를 내며 경을 읽었다/ 초지에 풀이 자라는 동안 마을의/ 소문도 무성하게 자라 저수지로 흘러간다/ 저수지의 물을 먹은 아이들은 곧 들소가 될 것이다/ 모두들 구름의 태생이 궁금해질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온 죄목 / 주영국
서울 도심 왕십리에 산돼지가 내려왔다// 사흘 전 엽사들과 눈을 마주친/ 동료들은 산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을 전파했다는/ 백지 공소장의 이해하기 힘든 죄목이었다/ 항소도 상고도 이들에게는/ 삼심제가 적용되지 않았는데,/ 죄가 더 많은 하늘을 향해 울먹이며/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 저항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프리카 아, 프리카/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대륙의 이름// 죄목은 기소를 전담한 자들이 만들어 낸다/ 어떤 여교수는 검은 사람들에게 조사도 없이/ 기소를 당했다고 한다. 그녀의 죄목은/ 산돼지들이 받은 죄목보다 형편없고 우스웠다// 왕십리에 내려온 그이도 결국에는 죽었다/ 죄가 있다면 청계 산밭의 고구마 몇 개/ 주인 몰래 캐먹은 정도인데 아프리카 아, 프리카/ 진짜로 그 죄목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며/ 고사목 끌텅에 갈던 어금니를 원통의/ 증좌로 남겨놓고 눈을 부릅뜬 채로/ 주황색 소방관의 총에 맞아 죽었다.//

허방세상 낙조 / 주영국
금성산 넘어가는 일몰의 해가/ 무딘 톱날에 배를 긁으며/ 나 이제 화엄세상으로 간다며/ 노루목 산 그림자 아직 가시지 않은/ 한수제에 붉은 피 뚝뚝 흘리며/ 죄 없는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우리는 옥상에 모여/ 아파도 웃으며, 헤죽헤죽 웃으며/ 오늘 노을 참 곱다며/ 오늘 어디 물 좋은데 없냐며/ 가망 없는 농이나 주고받으며/ 허방세상을 붙들고 있다/ 산 너머에는 죽은 해를 태우는/ 비밀의 화장터*가 있다는데,/ 참나무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일 때마다 붉은/ 뼛가루가 하늘로 튀어 오른다.//
* 윤석주 시인의 시 ‘해의 다비식’에서 인용

십이월의 세한도 / 주영국
창을 열자 눈이 들어왔다/ 눈은 바람난 설국의 여자들처럼/ 맨살을 비비며 파고들더니, 곧/ 몇 방울의 물로 죽어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덜 아파서/ 단맛 하나 없는 마른 알약 몇 개로/ 세한의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겨울나무에 앉아/ 우는 새소리는 듣기 힘든 방언이지만/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으며/ 언 나무들을 방에 들이고 싶어도/ 쏟아지는 눈을 이기겠다며/ 도끼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도 없었다// 그림에는 눈이 없어도 겨울이었다/ 우리가 죄짓지 않고도 순하게/ 벌을 서던 유배지의 저녁이 그리워질 때/ 풍영천 수완교 아래 돌배나무 두 그루/ 몇 필 광목 등짐을 지고 순장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있다// 모두가 눈에 밟히는 세한의 풍경이었다//

동백꽃 진다고 / 주영국
사월의 바람을 탓하지 말자/ 육지에서도 지고, 섬에서도 지고/ 피었다 지는 꽃이 어디 동백뿐이랴// 아픈 연대사를 기억하는/ 떨어진 꽃 이름 모다 즈려 모아/ 어느 흙 자리엔들 써주고 싶어도/ 바람이 만근 백비를 흔들어/ 세우기 전에는 쓰지 않기로 했다/ 다른 꽃 이름의 조사도 쓰지 않기로 했다/ 날숨 멈춘 어머니의 마지막 피울음 같은/ 미친 바람은 육지에서 불어와/ 사상도 없는 섬의 혈까지 흔들었다/ 제 이름 잃어버린 꽃들은 모두/ 그해의 바람에 속절없이/ 죽어 나간 사람들의 이름// 동박새 두 마리 떨어진 동백꽃 물고/ 날아와 그이의 이름을 쏘는 듯/ 구 구 구 구 백비를 울다가는 아침/ 장지를 잃어버린 아직 쓸쓸한 영혼들과/ 사월의 비가를 다시 듣는다.//

정읍 지나며 / 주영국
상행선 무궁화호/ 대나무 같은 아홉 개의 마디를 추슬러/ 서울로 가는 길 다잡은 사이/ 눈밭 속의 차장 밖으로는 사람들 몇,/ 횡으로 누운 이 하나를 메고 와/ 오호 달구, 오호 달구 호곡(號哭)을 하며/ 언 땅에 집 하나를 짓고 있다// 죽비가 되겠다는 건지,/ 몸 베어 날을 세우겠다는 건지/ 대나무 숲에서는 우-우/ 뜻 모를 소리 들려온다/ 살아서 마디마디의 평등한 뜻 이루지 못한/ 푸른 넋 겨울바람에 부르르/ 부르르 떨며 헛헛한 하늘을 향해 질러대는/ 끝도 없이 분분한 아우성 들려온다// 죽비를 쳐줄까,/ 죽창을 세워줄까// 낫을 갈아 날을 세운 청죽(靑竹)의 창을 들고/ 자주 세상, 평등 세상 외치며/ 서울로 향하던/ 개남이의 병사들처럼// 열차도 정읍 지나 청죽의 마디 같은/ 칸칸의 희망을 달고 서울로 가고 있다.//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원하 시인  (0) 2022.06.23
강혜빈 시인  (0) 2022.06.22
허은실 시인  (0) 2022.06.20
이현호 시인  (0) 2022.06.17
서대경 시인  (0) 2022.06.1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