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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강혜빈 시인

부흐고비 2022. 6. 22. 07:59

강혜빈 시인
1993년 성남 출생. 서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밤의 팔레트』가 있다. 사진가 ‘파란피(paranpee)’로 활동 중이다.

 



나, 마사코는 생각합니다 / 강혜빈
추운 날에는 추워서/ 더운 날에는 더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아이의 방 안에는/ 큰아이의 옷이 널려 있습니다// 처음부터 네 번째 발가락이 없었는데/ 자꾸만 왼쪽으로 굽어지는 골목// 맏딸은 감나무에서 떨어져도 맏딸입니다// 문지방 위에 앉아 미신을 생각하는/ 발톱을 깎으며 쪼그라드는/ 자매들이 있었는데// 나, 마사코는 대답합니다// 더운 날에는 덥게 태어나서/ 추운 날에는 춥게 태어나서/ 쓸모를 몰랐기 때문이에요// 큰아이의 이불에는/ 작은아이의 꿈이 조금 묻었습니다// 먼지가 쌓인 집 안은 조용합니다/ 매일 쓸고 닦고 노래하지만/ 다시 춤추고 넘어지고 제자리를 모르는/ 발가락들이 가지런해질 때// 거실과 화장실의 이름이 바뀌었지?/ 타일의 무늬와 눈이 마주쳤지?/ 거꾸로 달린 전등은 언제 집을 나갔지?// 나보다 먼저 늙어버린 질문들이 있습니다// 정수리 위로 한 올 한 올 눈이 내립니다/ 오래전 다 커버린 기억이/ 침 흘리며 딸랑이를 흔듭니다// 나는 아직 자라고 있는 발가락입니다/ 새장 속에 빠진 깃털입니다/ 에나멜 구두의 뒤축입니다// 이름이 기억나면, 잠 밖에서 웅크리는/ 새로운 생일을 정하고 싶은/ 챙이 커다랗고 빨간 겨울입니다// 어제보다 가벼워진 세계가/ 세탁기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너는 네, 대신 비, 라고 대답한다 / 강혜빈
*/ 지금부터 뒤꿈치를 밟으면서 쫓아오는 그림자가 있다/ 나를 거꾸로 심으면 발끝에서 뿌리가 자라니까/ 울상이 된 잎맥처럼 지루한 끝말잇기를/ 아래에서 위로 떨어지는 돌멩이를/ 스스로 멀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밤마다 재우고 먹였던 병들을 빗속으로 던진다/ 유행처럼/ 어떤 투명함도 전시할 생각이 없으니까/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쨍강쨍강/ 그러나 와장창도 아니게//
*/ 너는 곰, 대신 문, 이라고 대답한다/ 건조한 식물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뺨이 있다/ 나는 어째서 창문의 용도를 잊어버리고/ 끝없는 정수리들이 한꺼번에 걸어온다/ 구멍이라고 쓰면 검어지는 것들/ 껴안으면서 더욱 커다래지는 것들//
*/ 먼저 손끝이 지워진다/ 너무 투명해서 더는 투명해질 수 없을 때까지/ 몸속에 흐르는 물까지 전부 상상할 거니?/ 징검다리를 건너다 조용히 미끄러질 때까지/ 속으로 숫자를 세다가 처음으로 돌아와/ 누가 빨갛게 세수를 하고 있거든/ 마지막으로 얼굴을 찍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그리고/ 셔터들//

커밍아웃 / 강혜빈
축축한 비밀 잘 데리고 있거든/ 일찌감치 날짜가 지난 토마토 들키지 않고/ 물컹한 표정은 냉장고에 두고/ 나는 현관문을 확인해야 해/ 아픈 적 없는 내일을 마중 나가며/ (.....)/ 아무도 모르는 놀이터에서 치마를 까고 그네를 탓어/ 미끄럼틀과 시소의 표정/ 낮지도 높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자/ 혼자라는 단어가 낯설어지면/ (.....)/ 뉴스는 토마토의 보관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설탕에 푹 절여지고 싶어/ 사소한 기침이 시작된다/ 내 컵을 쓰기 전에 혈액형을 알려줄래?//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비밀이 흘러나와/ 자라지 않은 발목 아래로, 말을 잊은 양탄자 사이로/ 기꺼이 불가능한 토마토에게로//

숙아, 하고 부르면 / 강혜빈
그것이 내 이름인가/ 갸웃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한집에 삽니다// 스탠드칼라에 쇠 단추를 단/ 호텔리어의 세계에서/ 숙이는 벨보이를 사랑했습니다// 두 뺨은 눈처럼 하얗고/ 눈썹이 흑단처럼 짙은/ 아름다운 청년이군요// 벨보이는 숙이밖에 모르고/ 숙이는 벨보이밖에 몰라서// 흰 딸 하나 검은 아들 하나/ 토끼와 고양이와 강아지/ 붕어 세 마리와 곰팡이// 함께 싸우며 사랑하며/ 오랫동안 잘 살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아름다웠던 청년은/ 조금씩 시들어가고// 숙아/ 숙아// 부르는 장면 속에서/ 누군가 자꾸만 부르는데요// 해피엔딩이란 자고로/ 끝내 잘 살지 못한 이야기// 숙이는 오른쪽 볼의/ 갈매기 모양 흉터를 매만집니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면// 숙이는 대학엘 가고/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어서/ 가지지 않아도 될 직업을/ 평생 가지지 않으면서// 가끔은 웃자란 화초에 물을 주며/ 마당을 바라보고 멀찍이 앉아/ 새로운 취미를 가져볼까,/ 고민했을 테지만// 시간은 거꾸로 되돌릴 수 없고// 숙아, 하고 부르면/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는/ 그 사람과 한집입니다// 오늘의 숙이는 숙이겠지만/ 내일은 숙이가 아니겠지요.// 숙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다만 웃습니다//

엄마와 캉캉을 / 강혜빈
밤의 캄캄을/ 늘어난 구두를 돌려 신고서/ 발끝을 부리처럼 킥킥// 점처럼 작아진 세상에서/ 높고 낮은 그네가 흔들릴 때/ 큰 마음과 작은 마음이 부딪힐 때/ 입보다 먼저 눈을 막는 사람들을 봅니다// 큰 새는 반대쪽으로 날개 꺾는 법을 모릅니다 바람의 일기는 가만히 읽고 덮어둡니다 폭설이 내리면 비틀어진 둥지 속에 숨어 자장가를 부릅니다 멀리 떠나고 싶었던 기분과 장래희망 같은 건 잊은 지 오래입니다 달과 해의 단면을 바꾸기 위해 달력 뜯는 일은 그만둡니다 배꼽 위로 반짝이는 깃털은 아직도 파르르 자라고 있습니다만// 햇빛 아래 푸드덕푸드덕 익어가는 달갈처럼// 어떤 세계는 조금씩 갈라지고 있고/ 어떤 말들은 퍽퍽하다는 걸 알면서도/ 노랗게 뭉쳐 뱉어내고// 우리가 발을 구르며 잠시만 멀어질 때/ 엄마는 엄마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주름진 것들로부터 멀어지십시오 오늘의 시계침은 역방향이므로 펜을 쥔남자가 나무에 매달려 있으므로 너무 깨끗한 손들은 마주치지 말고 피하십시오 북쪽에 머리를 두고 자면 다른 딸들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의 죽음을 알릴 수 있습니다 보름달은 하늘이 잘못 뚫어놓은 구멍이므로 동쪽을 향해 엄숙하게 오줌을 누십시오 그때 양탄자의 찌푸린 눈썹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십시오 서쪽에선 어린 바오바브 나무들이 목을 내놓고 당신을 기다릴 것인데 오늘의 운세는 방금 갱신되었으므로 남쪽은 아무 말도 없을 것// 그러나 작은 새는 극장에서 흘러나온 빛을 부수기 시작할 것입니다 눈알들을 깜빡깜빡 쪼아 먹고 구름의 뒤편에 들러붙은 소문은 무지개색으로 칠해 알록달록한 비를 내릴 것입니다 빨간 신호등이 어슬렁거리는 숲을 지나 춤의 바깥을 향해 날아갈 것입니다 아직도 행운의 색깔은 작은 새, 행운의 숫자는 큰 새의 일입니다만// 밤의 캉캉을/ 눈부신 죽음을 나뉘 입고서/ 발끝을 송곳처럼 킥 킥//

몇 시의 샴 / 강혜빈
*// 왠지 몇 시에 나는 내가 되고 싶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단면이 파랗고 축축하다면 여름도 여자도 아닌 얼굴을 나눠 입고 싶어 파란 피는 어디에나 흐르고, 어디에선 굳어가고 아직 깨어 있는 우리들은 아주 옅은 방식으로 숨을 쉬겠지 자세히 듣지 않으면 살아 있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잘 봐// 그것이 우리가 죽어가는 방식// 나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응원해 모두들 눈 코 입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오늘도 싸우고 구르고 부딪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 시간에 잠을 자고 아이를 씻기고 물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사이좋게 빨래를 널고 물에 밥을 말아 먹고 매일 다른 색의 말을 누고 머리 위에 하늘이 있었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고 자주 울지 않게 되고 그렇게 그렇게 시시한 어른이 되는 보통 삶을 꿈꾸고 있겠지만·······// 있잖아, 보통이란 뭘까//
*// 우리들은 모두 살아 있어서 달이 뜨면 영혼이 솜처럼 부풀어 오르지 외로울 때마다 등을 맞대고 가지런히 누워서 우리가 충분히 부풀어 오르려면 아직 멀어서 너희들의 언어를 배우려고 그랬지 때때로 누군가 이곳을 다녀가고 배 위에 머리카락이나 말린 꽃 같은 걸 놓아두는데······ 왜일까? 나를 지우고 다시 쓸 때마다 밤은 반대로 돌아누워서 내가 드디어 묵음이 되어서//
*// 너는 너의 그림자를 핥는다/ 하루 종일······// 그게 얼마나 까만지도 모르고// 빨고 뱉고 마시고 토한다/ 하루 종일······// 나는 그림자에게 축축한 비밀을 말해주지만/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지// 다만 너는 너의 뒷면을 핥는다/ 하루 종일······// 그게 얼마나 더러운지도 모르고/ 빨고 뱉고 마시고 토한다/ 하루 종일······//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 잘 봐//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

홀로그램* / 강혜빈
너는 하루 종일 썰고 있지/ 차갑고 딱딱한 감정을/ 도마는 불쌍해, 아주 불쌍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눈과 입술이 반대라니/ 끼릭끼릭 웃음을 참고 참다가/ 불이 닿기도 전에 끓는 주전자// 우리 집에는 우리가 살았고/ 유령 같은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대문 앞을 지나가는 이웃들은/ 소금을 끼얹고 잠든대// 엎드려서 일어날 줄 모르는/ 이런 접시에는 무엇을 담지/ 그런 그림자는 아무도 안 사가고// 미안해 미안해 오늘은 햇빛처럼/ 여러 가지 각도를 가져서/ 해가 돌아눕도록 가만히 두어서/ 까마귀들이 손등을 쪼는 동안// 침대보가 펄럭이며 머리를 덮으면/ 눈보다 먼저 구두를 엎어둬/ 세상에 비슷한 발들은 많으니까// 너는 하루 종일 꾸고 있지/ 싱겁고 납작한 꿈을/ 우리는 깨끗해, 아주 깨끗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하면 안 돼/ 미안해 할 사람이 없는데/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를 받아야 할 것 같고/ 용서를 받으면/ 이해를 받아야 할 것 같고/ 시시한 일이 무서워지고// 그런 칼이 아니었는데/ 그런 자세가 아니었는데// 아직 꿈속이구나?// 그만 일어나자, 타는 냄새가 나/ 너는 자고 나는 머리를 흔들지/ 흔들고 흔들면 몸속에서 누가/ 먼저 흔들리는 것 같아서// 연기 속에서 목소리가 졸아든다/ 잘못 빨고 잘못 말린 스웨터처럼/ 순서를 잘못 배워서/ 뒤늦게 잘잘못을 따지는 사람들처럼/ 그럼에도/ 서로를 껴안는 날실과 씨실처럼// 절대로…… 괜찮다고 말하면 안 돼/ 괜찮아도 되는 일이 없는데/ 괜찮다고 말하면/ 용서를 해야 할 것 같고/ 용서를 하면/ 우리가 졌다는 미신이/ 정말 사실이 되고/ 시시한 일이 무서워지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니/ 그런 믿음은 잘 썰리고// 나의 검은 천사/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나는 너를 쓰다듬는다/ 너의 뒤통수, 동그란 뒤통수를// 우리 집에는 우리가 당연히 살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으니까/ 몸이 조금 차가워지고/ 뒤를 돌아보게 돼// 나는 아직도 코가 막혀서/ 누가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우리만 한 동그라미를 빼면/ 세상은 까맣게 그을릴 수 있겠지만// 방바닥에 모르는 접시들이 누워 있네/ 나는 여기에 앉아/ 밥도 먹는다//
* 우리는 무지개처럼 한 점에 기록된다.

​ 빙하의 다음 / 강혜빈
울상을 짓기도 전에 얼어버리는, 눈송이를 모아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오늘은 우산을 잊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잃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접었다 펼치면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해서는 안 됐어 기지개 켜는 법을 떠올리려고 걸었어 얼어붙은 풀장처럼 뚱뚱해진 거리에서 속옷 위에 겉옷을 겉옷 위에 속옷을 입은 사람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진다 옆 사람의 목도리를 잡아당기면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보라색 아침이었어 보타이를 맨 쥐들이 다락까지 몰려왔거든 나는 아무도 입지 않은 웨딩드레스처럼 잔뜩 구겨져 씨 없는 포도를 껍질째 삼키고 있었지 쪽창 밖으로 파리한 나무들이 둥둥 떠다녔어 남의 집 티브이 속에서 누가 대신 울어 주길 기다리면서 지금 울리는 전화벨은 여기의 것인가, 저기의 것인가 눈알을 굴려 봤자 눈보라가 지나가면 기억하는 채널은 씻은 듯이 사라졌어 전파를 지우면서 내리고 날개를 지우면서 또 내리는, 저것들은 다 뭘까// 하얀 지점토로는 지구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 수 있다// 정말이지? 손바닥 두 개를 모으면 둥근 방이 되니까 수도꼭지에 대고 깨끗한 물도 받을 수 있으니까 만약에 우리의 손 안에서 북극곰이 태어난다면…… 작았던 눈뭉치가 구르고 굴러서 마당에 심은 나무보다 커다래져서 울타리를 부수고 다닌다면 나는 폭신한 이불 속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있을래 부드러운 건 어쩐지 무섭지 오늘의 놀이는 모두 끝났단다 우리가 만든 덩어리는 대답이 없고 너는 차라리 입 속에 더 따뜻하고, 더 두꺼운 솜을 넣어 주겠지// 손등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눈송이는 너무 착하기만 해// 오늘은 기분을 잃어버렸어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지 잊어버리기 위해 다음을 준비했어 당겼다 놓으면 날아가는 화살처럼 다음의 다음을 다음의 다음다음을…… 아니, 준비만 하지는 않았어 우는 아이를 찾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렸지 더 추웠던 날과 덜 추웠던 날을 구분하지 못하는 풍경처럼 두리번거리며 우리는 자꾸만 몸에 맞지도 않는 거짓말을 껴입고 하얗게 질린 도시보다 비대해져서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악을 써// 좋았니? 좋았어?//

가만히 얼음칸 / 강혜빈
​내일이 어제로 바뀌는 동안/ 내일이 어제도 내 것이 아닌 동안// 친구들은 은빛 돌고래로 변해갔지/ 착하게 반짝이고 있으렴, 가만히.// 파도가 열리고 거짓말이 투명해지는 동안/ 질문을 심은 자리에 소문이 자라는 동안// 나는 나와 나를 데리고 노랑 속으로 들어가/ 열여덟처럼 부어오른 귀를 씻을래/ 여름도 구름도 되지 않고/ 기울어지는 햇빛만 주워 담을래// 교실이 거꾸로 뒤집어지는데/ 쏟아지지 않는 우리들은 왜일까?// 너는 너와 너를 데리고 노랑 속으로 들어가/ 스물처럼 오지 않는 토요일을 찢으렴// 이름도 부름도 되지 않고/ 우리를 꼭 닮은 물결만 일으키렴// 새로운 물방울들을 자랑하고 싶은 생일// 촛불을 불기엔 너무 검은 성냥이야/ 어른들은 아직 말릴 수 없어서/ 봄은 봄으로 바꾸느라 젖은 것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거의 다 됐는데// 내일이 어제로 바뀌는 동안/ 내일도 어제로 내 것이 아닌 동안//

바깥의 사과 / 강혜빈
꿈이 나를 갉아먹을 때 엄마, 엄마를 부르지만/ 나와 나의 커다란/ 괘종시계만이 살아있는 이곳// 시계추는 거실을 서성이며 살타는 냄새를 풍기고// 발들이 반복되는 계단을 번복하는 소리/ 저녁의 목구멍이 팽팽하게 잠겨오는 소리/ 흑흑, 흑흑, 눈에 박힌 태엽이 잘 감기지 않는 소리// 태연히 몸속을 건너가는 엄마, 엄마를 부르지만/ 나와 나의 투명한/ 팔다리가 상상한 모습이 아니어서 그랬니// 문이 혼자서 열린다면 안녕, 너도 내가 보이니// 물을 뚝뚝 흘리면서 널려 있는 이웃들/ 발바닥을 내놓고 말라가는 바지들/ 머리카락을 한 올 두 올 뜯어먹으며 커지는 개미들// 아냐, 한눈에 알아보는 건 가짜 가족/ 우리는 늘 액자 속에서만 창백하고 검었는데// 이불의 겉과 속은 덮는 사람이 정하는 것/ 썩은 껍질들처럼// 자다가 울면 잠꼬대처럼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런 얼굴로 나를 기다리면 못써/ 누구라도 목소리를 따라할 수 있으니까// 아냐, 우리는 아직 아무도 입지 않은 옷/ 밀려난 얼굴 위로 똑같은 얼굴이 겹쳐진다면/ 어젯밤 누군가 성냥 한 개비를 던졌기 때문에/ 잠 속에서 몸집이 커다래진 시간은 깨어나지 않아// 그렇다고 아주 살아있는 것도 아닌/ 문고리는 곧 살금살금 돌아갈 테지만//

매그놀리아 / 강혜빈
먼저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먼저 떠나는 산책을 하자. 목줄 풀린 마음이 시계탑 아래로 굴러가 돌과 돌 사이로 스며들어. 둘이었던 돌은 둔하게 따뜻해져서. 내내 한 덩어리였던 것처럼 굴어서. 깜빡깜빡 두 칸씩 건너뛰게 만들었지.// 서서 잠드는 동안 나는 천천히 상해갔어. 조금도 일그러진 적 없는 이마 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빗방울에게 뺨을 맞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오늘부터 나무와 벤치와 흐르는 발들이 알맞게 자라는 곳을 공원이라고 부를까. 부르지 않아도 저만치서 달려오는 아이들이 있고. 어디선가 말라가는 개똥이 있고. 나는 이미 썩어버린 나뭇잎과 이제 썩어가는 나뭇잎을 반으로 갈라놓을 뿐.// 다리 사이가 잼처럼 끈적끈적해질 때까지. 외톨이였던 매미는 끝의 끝까지 남아. 여름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며 울고. 방금 완료된 껍질들만 나무에 매달려 타, 타, 타, 타, 타 배를 두드리고 논다. 무너지는 생각만으로도 무너지는. 우리는 우리 직전에서 멈추는 걸음일까. 주소를 잘못 찾아온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비가 내리고.//

납작한 영원 속 / 강혜빈
돌아서는 등짝을 보며 자란 벽들은 이를 갈면서 기다리잖아. 말갛게 웃는 얼굴로. 서로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연인들을. 약속을 어긴 돌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을. 구르는 마음에도 이끼는 돋아나고. 휴지 위에 편지를 쓰면 보드랍게 찢어지는 구름떼. 지금 흐르는 건 땀인지 침인지. 네 뺨 위에 떨어진 건 아무 말도 아니라고. 나는 묻는다.// 왜 병든 가로등처럼 목을 떨어트리고 있니? 목련은 누가 밟아주어야 밤을 피울 수 있다고 말하면 누가 밟기 전에도 이미 밤이라고 말하는. 너는 매일 바위를 내밀고. 나는 매일 가위를 꺼냈지. 네가 뾰족한 번개를 업고 쫓아오면. 나는 천둥보다는 늦게 달아나. 이상하지? 웃을 때 이가 너무 많이 보여서. 지지도 이기지도 않으려고. 너는 웃는다.//

거울의 시니피에 / 강혜빈
나는 지나칠 수 없는 색깔/ 입 밖으로 뱉으면 썩기 시작하는 약속/ 모래밭에 이름을 적다가 부러진 나뭇가지/ 두 손을 모으지 않고도 빌 수 있는 기도/ 광장 한가운데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입맞춤/ 새들의 농담에도 웃지 않는 신호등/ 뒷걸음질 치다 밟은 햇빛의 발/ 페인트칠이 덜 마른 기침/ 눈 마주칠 때마다 멈춰서는 시계/ 해가 뜰 때까지 천천히 젓는 호박죽/ 누군가 기다리는 13월의 생일/ 인사를 건네려고 펼친 손가락이 욕이 되는 곳에서/ 나 같은 사람이 둥글게 모여 있는 곳으로/ 순한 머리들은 점점 감정을 가지게 되고/ 세상이 오돌토돌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점점 타원처럼 불룩해져서/ 찌그러진 침묵이 되어가고/ 안으로 몸을 말면서 단단해지고/ 둥글게 살자는 말을 멀리 굴려 보내고/ 용기를 한 올씩 모아 빗자루를 만들지/ 닮은 뒤통수는 우리라고 불리고/ 우리는 이렇게 정수리로 숨을 쉬고/ 한 번쯤/ 당신의 어깨를 치고 지나갈 수 있다면/ 이곳에서 뒤를 돌아보는 건/ 당신의 머리 하나//

타원에 가까운 / 강혜빈
구멍 난 하루를 걸치고 나서는 산책/ 정원을 반 바퀴 도는 데 두 계절/ 당분간 입에서 풀냄새가 나도 괜찮니?/ 잘 봐, 기대와 실망을 한 군데에 심으면 얼마나 잘 자라는지/ 무른 말에도 잘 베이는 나뭇잎들은 어떻게 초록인지// 흰 조랑말들의 발자국이 만든 밤은 길었어/ 나와 친해진 것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곳에서 잘 얼었지// 뾰족한 얼음들을 재워놓고/ 내가 나인 것을 참아보기로 했어/ 칭찬을 한 잔 마시고 싶거든/ 기다란 혀를 감추고 정확하게 웃어봐// 너의 끈과 나의 끝은 일직선으로 달라질 수 있어/ 너무 넓어서 슬픈 정원은 형용사가 될 수 있어/ 이별은 한 마디의 음절만 가질 수 있어// 우리를 한 군데에 심으면 누구부터 시들까?// 아무렇게나 자란 마음에게는 차가운 물이 좋아/ 소심한 게 아니라 섬세한 거야/ 같은 시옷인데 우는 얼굴이 더 깨끗하지// 너를 절반만 이해하는 데 네 계절// 나의 위와 너의 아래를 묶고 기다리자/ 완전한 우리가 될 때까지/ 우리의 애칭은 늘 그런 식이지/ 잡초. 멍청이. 잡초. 돌연변이.//

워터라이팅 / 강혜빈
물 한 방울// 인간은 마지막 임무를 위해 먼 어제로 돌아왔다. 천장에 붙어 잠을 기다린다./ 바닥, 천천히 돌아누워 파도를 일으킨다. 한 알 남은 마음이 서성서성 녹아가는 방 속,// 창 밖에 머리 하나 내놓고 거짓말을 해 본다. 사과 모자 엄마 수염, 거리가 울린다. 둔한 빗방울보다 먼저 지워지는 이름. 또박또박. 기침은 혼자서 솔직하다. 사탕 같은 마차들 자석처럼 붙어 있다. 도로의 뼈가 다시 맞춰지는 것처럼. 모자 수염 사과 엄마, 발 젖는다.// 물 두 방울// 지하로 끌려가 새로운 생김새를 물려받는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말을 한다./ 서로 사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흰 밥을 지어준다./ 인간은 다 된 머리를 빠뜨린다./ 다정한 석고상들 누워 있다.// 천사가 꿀꺽, 시간을 삼키시니. 테이블 아래 환한 똥이 흐른다./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군요./ 눈꺼풀을 꼭 잠그길 명하시니. 더러운 기억에도 침이 고인다./ 아직도 침대를 찾아 떠도는 혓바닥들이 있으니.// 죽은 쥐들의 이름을 계이름처럼 외우는, 천사는 재미있다. 쓸 줄 아는 게 다른 나라의 욕밖에 없는, 천사는 재미있다. 나무 밑에 묻은 약속처럼 앙상하게 짖는, 천사는 재미있다. 지어낸 먹구름을 기다리는 인간이, 천사는 재미있다.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 믿는 인간이, 천사는 재미있다. 마려운 척 배를 부여잡는 천사가, 인간은 재미있다.// 물 일곱 방울// 몽타주 들고 숨바꼭질을 한다. 총 들고 미소를 당긴다. 등 뒤에서 틀린 비밀번호를 속삭인다. 잔디밭에 빛을 풀어준다. 현관을 잃어버리고, 동전을 잃어버리고, 콧구멍을 잃어버리고, 주머니 속에 남은 뼛가루를 만지며, 뭉툭한 어깨들을 치고 다니며, pardon, pardon……// 탑이 멀리서 반짝인다. 달리는 인간. 덜 마른 빛의 정서로. 강에 비친 나무가 몰래 흔들린다. 그림자는 점점 멎는다. 이내 멀어지는 인간. 물 밖으로. 죽은 자들의 머리가 튀어 오른다. 영원을 약속하는. 물고기들의 통통한 배.// 천사는 밤의 뒤척임이 식기를 기다린다. 인간의 다리 사이에서 감정을 배운다./ 누구든 쉽게 울릴 수 있는 초인종처럼. 오늘도 새로운 장난감을 갖기 위해 울지만.// 물에 잠긴 방은 위로 추락한다. 더 높이,/ 자꾸만 가벼워져서, 달아나는 뒤통수보다 찌그러져서,/ 세계는 몸을 울려서 울고.// 물 한 방울// 천사의 캐리어에서 나쁜 냄새가 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제1비가」중에서

요절한 여름 / 강혜빈
편백나무가 날아오르는 시간/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첫 번째 돌에 표시해둔 나를 지나쳐/ 마치 갈림길에서 힌트라도 쓸 것처럼/ 척척함과 약속은 잘 어울려/ 더듬더듬 목구멍 들춰 어둠을 만지듯이// 나는 오늘 가지색 인사법을 배웠고/ 카나리아를 내년 귀퉁이에 묻어주었지/ 철제로 된 새장이 무엇을 책임져?// 날개 터는 방법을 잊어버렸어 어쩐지/ 뾰족한 부리는 당신의 피상/ 나는 오늘 도도한 레몬처럼 거절했고// 편백나무의 날숨은 뿌리를 놓치는 것/ 뱃속이 잠시 투명해지는 그런 것/ 내가 따뜻한 흙을 퍼먹는 동안에/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새끼손가락을 주머니에 넣고/ 어제로 통하는 길을 잘 안다는 듯이/ 그러나 모르는 발바닥처럼/ 하늘을 지나치게 올려다보며// 우리는 절벽을 잊어버릴 수 있어// 똑똑한 버섯들은 어떻게 우는지 들어봐/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타원에 가까운 / 강혜빈
정원을 반 바퀴 도는 데 두 계절// 당분간 입에서 풀냄새가 나도 괜찮니?/ 잘 봐, 기대와 실망을 한 군데에 심으면 얼마나 잘 자라는지/ 무른 말에도 잘 베이는 나뭇잎들은 어떻게 초록인지// 구멍 난 하루를 걸치고 나서는 산책/ 흰 조랑말들의 발자국이 만든 밤은 길었어/ 나와 친해진 것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곳에서 잘 얼었지// 뾰족한 얼음들을 재워 놓고/ 내가 나인 것을 참아보기로 했어/ 칭찬을 한 잔 마시고 싶거든/ 기다란 혀를 감추고 정확하게 웃어봐// 너의 끝과 나의 끝은 일직선으로 달라질 수 있어/ 너무 넓어서 슬픈 정원은 형용사가 될 수 있어/ 이별은 한 마디의 음절만 가질 수 있어// 우리를 한 군데에 심으면 누구부터 시들까?/ 아무렇게나 자란 마음에게는 차가운 물이 좋아/ 소심한 게 아니라 섬세한 거야/ 같은 시옷인데 우는 얼굴이 더 깨끗하지// 너를 절반만 이해하는 데 네 계절// 나의 위와 너의 아래를 묶고 기다리자/ 완전한 우리가 될 때까지/ 우리의 애칭은 늘 그런 식이지/ 잡초, 멍청이. 잡초, 돌연변이.//

괄호 속에 몸을 집어넣고 옅어지는 발가락을 만지는 중입니다 / 강혜빈
열아홉은 괄호가 포함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 바닥에 빨간 울음이 흐언합니다 누군가 날카로운 어젯밤을 소화시키지 못했나 봅니다/ 둘, 여기서부터 가족들의 방은 멉니다 커다란 구름이 말라가는 거실입니다/ 셋, 시계의 뒤편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을 봅시다 아빠는 오후 아홉 시처럼 생겼습니다/ 넷, 우리들은 우리들로 남아야 하기에 아직은 식탁에 앉아 실마리를 꼭꼭 씹어 삼킬 뿐입니다// 벽 너머에서 엄마는 푸르스름 야위어가고 아빠는 배를 까고 누워 노랗게 불어갑니다 시침으로 꿰맨 교복 치마는 나의 알리바이 무지개의 꿍꿍이를 눈치챘나요? 엄마 아빠가 시계 속으로 분주하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나는 혀가 고부라진 아이 입안 가득한 째깍 소리를 녹여 먹으며 내일의 과목을 생각합니다// 구름이 눈썹을 찡그리는 날부터/ 나의 이름이 느리게 증발할 때까지// 증거가 되지 못한 물방울들은 곧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아직 쓸 만한 우리들이에요 까드득까드득, 아빠는 질문을 씹어 먹습니다 어떻게 하면 흘러내리는 심증을 촛농처럼 굳힐 수 있나요? 시간의 부스러기가 천장에서 쏟아집니다 미제로 남은 우리들이에요 까드득까드득, 마음껏 부서질 수 있는// 빨간 울음이 바짝 마르는 아침, 귓속에서 알람이 울립니다/ 아흔아홉번째 이명입니다// 딱딱한 무지개가 완성되면 깨끗한 얼굴로 학교에 갑니다 오전 일곱 시는 무엇이든 시들게 만들 수 있고 그러나 오후 네 시에는 조금 웃어보아도 괜찮은 것 아홉시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뒤꿈치에 쌍무지개를 그려보기도 합니다만 우리들은 조금도 겹쳐지지 않습니다 무지개의 꿍꿍이를 눈치 챘나요? 촉촉한 물방울들이 문 틈새로 탈출합니다 언제 어디서 다른 색깔의 울음이 발견될지 모릅니다// 무지개가 시간을 읽기 시작할 나이부터/ 열아홉이 어른들을 타고 멀리 날아갈 때까지//

열 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 / 강혜빈
숫자를 좋아하는 흰 토끼는 편지를 써 오라고 했어/ 거짓말을 완벽하게 훔친 아이에게 내주는 특별 숙제/ 말랑말랑한 지우개 똥 연필 끝에 꾹꾹 뭉쳐/ 사랑하는 선생님, 저희가 잘못했대요.// 시험지 위로 진눈깨비가 내리는 교실// 무서운 이야긴 속으로 해야 더 무섭지/ 칠판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모르는 아이가 빳빳한 채로 상장을 받고/ 종례가 끝나면 답장이 왔어/ 아니, 너희가 아니라 너지.// 안으로 접힌 귀 토끼의 가장 단순한 장점/ 만져보고 싶어 3분의 1로 나뉜 귀/ 왜 우리들은 밋밋한 귓바퀴를 가졌지?/ 좀더 수학적으로 생기질 못하고// 어렴풋이 웃고 나면 어른에 가까워질까?/ 토끼의 진짜 얼굴은 손목에 새겨놔야겠어/ 기다리는 미술 시간은 오지 않는데// 명치를 찌르면 실내화가 미끄러지는 마술/ 복도 끝과 끝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봐/ 부풀어 오른 선생님, 시리도록 하얀,// 뒷문에서 굴러 나오는 귀 두 짝/ 청소 도구함에 숨은 눈알/ 창문에 붙은 천삼백일흔 개의 입 그리고 입// 나는 토끼를 해부하는 상상을 했을 뿐인데요?/ 책상 밑에 숨어 지우개 똥만 뭉쳤는데요?//

뱀의 날씨 / 강혜빈
할머니는 그날 오후 빨래를 개고 있었습니다/ 삼촌의 파자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 얼룩은 아들로, 아들은 엄마로 벗겨내는 거라면서/ 척척한 양말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얼룩은 그늘에서 말려야 하나요?// 삼촌은 허물을 벗고 삼촌들로 불어납니다/ 엄마라는 단어에 슬슬 똬리를 트는/ 독신주의 채시기주의 완전무결 무신론자 삼촌들/ 입속에 불혹이 자라 말을 잊은 삼촌들/ 특기는 식탁 밑에서 기절하기/ 마흔답게 혓바닥 날름거리기 또는/ 잠자는 할머니를 죽은 쥐로 착각하기// 얼룩은 그늘에서 더 축축해지나요?// 집 안 가득 비눗물이 차오릅니다/ 방 세 칸이 조금은 말끔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얼룩의 무늬가 바뀌는 시간일 텐데요/ 할머니가 좀처럼 탈수되지 않습니다// 부글부글 거품이 된 집을 내려다봅니다/ 누가 옥상에 삼촌을 널어놨습니다// 깊어진 그늘의 손을 잡아봅니다/ 나를 벗을 준비는 이제 되었습니다//

일곱 베일의 숲* / 강혜빈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요/ 당신을 망치는 일은 너무나도 간단하니까요// 누군간 치렁치렁 매달렸던 버드나무 아래/ 여러 겹의 그림자를 밟고 섰습니다// 시침이 다시 움직이면 저주가 시작되니까요// 눈꺼풀에 커다란 눈을 덧그린 사람들/ 서로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깔깔깔 울타리를 넘어가고/ 진실은 눈꺼풀 속에서 세모네모 너울거리겠지요/ 진짜 슬픈 게 뭔지 모르는 사람들만이 더 크게 웃습니다// 콧소리로 말하면 들리지 않는 이야기// 돌로 변해버린 아빠들을 마음속에 진열하다 보면/ 없는 아이의 보드라운 무릎이 스쳤다 가는 것 같으니까요/ 나의 몸이 자라는 동안 나는 모르는 내가 되어/ 주머니가 많은 소문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기나긴 춤이 끝나면 소원을 말해보세요/ 은쟁반에 당신의 머리만 담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불을 털다가 울지 않을 것이며/ 부케를 받은 사람이 가장 먼저 이곳을 떠날 것이며/ 춤의 시작을 기억할 것이며/ 발로 쓸어내린 이름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요/ 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발음할 수 없으니까요//
* 헤로디아의 딸보다 먼저 살로메였던 그녀들에게

미니멀리스트 / 강혜빈
나는 말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 - 거트루드 스타인// 찢어진 이불을 덮고 잤다// 오랫동안/ 찢어진 마음에 골몰하였다// 깨어날 수 있다면/ 불길한 꿈은 복된 꿈으로// 빛 속으로 풀쩍/ 뛰어든 고라니가 무사하므로/ 오래된 건물이 무너짐을 마쳤으므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므로// 기지개를 켜듯 이불의 세계는/ 영원히 넓어지기/ 모름지기 비밀이란 말하지 않음으로/ 책임을 다 한 것으로// 어디든 누가 살다 간 자리/ 어디든 누가 죽어간 자리// 오랫동아 비어 있던 서랍은/ 신념을 가지게 된다// '가끔 우리가 살아 있는 게 기적 같아"// 이 세계에서는 매일매일 근사한 일이/ 무화과 스콘 굽는 냄새가/ 누군가/ 3초에 한 번씩 끔직하게// 복선을 거두어 가지 않으면서/ 한 줌의 사랑을 꿰매어주면서// "혹시 사람을 좋아하세요?"// 더는 버틸 수 없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기로//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될 때/ 긴 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울 때// 아래층에서 굉음이 들렸다//

ghost / 강혜빈
가벼워지는 연습이 시작된다/ 물 위에 눕듯이// 녹슨 어제는 선반 위에 놓이고/ 오늘은 악력기처럼 윤기가 흐른다// 천사는 허리를 굽혀/ 뒤를 들추어 본다// 힘주면 아파요,/ 고파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면/ 나빠지고 있다는 의미// 꼬리 같은 호스 드리우고/ 천장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깃털을 세어본다// 꿈속에서는 옛 친구들과 함께였다/ 알록달록한 빛을 쫓다가 깨어나면// 모르는 얼굴들 드나든다// 과일들 이름들 기다림들 젖은 수건들/ 아직 열두 밤을 더 건너야 한다// 문밖이 따뜻하다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의미// 머리맡/ 시든 개 한 송이와 함께 잔다// 우리는 더 이상 자라지 않으므로/ 친구가 될 수 있다/ 서로의 멍을 핥아주면서// 너를 나의 개라고 부를 것/ 길러본 적 없는/ 죄책감이라고 부를 것// 풍경이 모서리부터 지워진다/ 수북이 쌓인 오후 속에서/ 형광등처럼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필연적으로, 비가 한 개씩 내린다// 날씨 이야기를 하지 않는/ 물방울이 되고 싶었지만// 등을 떠밀고 싶다가도/ 정말로 떨어져버리면/ 가장 슬플 것 같은 뒤통수가 있다// 혼자서 문이 잠기고/ 혼자서 문이 부서지고// 천사가 뾰족한 시간을 바닥에 끌며 돌아온다// 코 아래 손가락을 대면/ 가지런히 숨을 쉬어주자// 오래전 꾸었던 꿈처럼 천천히/ 팔다리가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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