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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녹음일기(綠陰日記) / 원종린

부흐고비 2022. 7. 5. 07:45

녹음이 우거지던 때 우리는 이사를 했다. 그래서 오래 가꿔온 나무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더욱 서운했다.

나는 작년 6월 중순경에 오래 몸담았던 공주를 떠나서 대전으로 이사했다. 6월 중순이면 성하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여름철에 접어든 것만은 틀림없다. 장마가 일찍 시작되는 해는 수시로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가 떠나오던 날도 바로 그런 날씨여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었다.

이사는 대개 봄 아니면 가을이 제철인데 내가 이런 걸맞지 않은 시기를 택해서 이사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정년으로 강단을 물러난 뒤에 몇 군데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는데 학기 중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한가롭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종강 후 이사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던 것이다.

마침 집을 팔 때 그런 조건을 달았더니 사는 측에서도 쾌히 승낙을 하고 말미를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삿짐을 꾸릴 무렵에는 정원의 나무숲들이 제법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200여 평의 대지에 감나무 한 그루를 빼면 거의 모든 내손으로 심어서 가꾼 나무들이다. 감나무가 따로 네 그루가 더 있었는데 4월 말경이면 가지 끝마다 햇순이 돋기 시작하고 이내 작은 족두리 모양의 꽃이 빈틈없이 핀다. 감이 열매를 맺을 무렵이면 잎이 제법 무성하게 피기 시작한다.

내가 떠나올 무렵에도 감나무마다 작은 열매들이 줄줄이 맺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추나무도 한 그루가 있었는데 몇 해 전부터 나뭇가지 한 구석부터 몽당비처럼 잎이 자질구레하게 피기 시작했다. 바이러스성 장애라고 하는데 그대로 놔두면 이런 나무는 열매를 맺기는 다 틀린 것이다. 신문에서 치료법을 읽은 일이 있어서 그대로 껍질을 벗겨주고 마이신 주사액을 투입했다. 그 효과가 조금은 나타난 것인지 그럭저럭 여러 해째 대추가 제법 많이 달렸다. 담 밑으로는 삥 둘러서 향나무를 띄엄띄엄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손에 닿는 대로 여러 가지 나무들을 주섬주섬 갖다 꽂았다. 수국, 단풍, 앵두, 철쭉, 산단화, 꽃사과, 모란 그리고 사철나무 등이었다. 근 20년 가까이 나의 손공이 들어 큰 나무들이다.

이것들을 모조리 그대로 두고 떠나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뒤에 들어오는 사람이라도 가꿔가며 살면 그래도 심어놓은 보람이 있을 터인데 그것도 가망이 없는 것 같다. 집을 헐고 정원까지 밀어서 연립주택을 지을 것이라니 말이다. 내가 떠나면서 더욱 마음이 언짢은 것은 '럭키'의 실종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언젠가 밤손님이 한 번 다녀간 뒤부터 개를 한 마리 기르게 되었다. 대문 옆에 집을 마련해 주었더니 여름에는 나무 그늘이 들어서 쾌적한 안식처가 되었다. 충실한 수문장 역할을 하는데 떨어져 사는 가족들은 어쩌다가 보는데도 용하게 알아차리고 꼬리를 쳤다.

개의 이름을 이 집주인이 고심 끝에 운이 좋으라는 뜻으로 ‘럭키’라고 지어주었다. 이사를 하게 되면 집의 구조상 '럭키'를 데리고 갈 형편이 못 되어서 여러 날 째 주저하다가 인수자를 물색해 두었다.

그러나 막상 떼놓고 갈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서운해서 식구들이 모두 마지막 지혜를 짜는 중이었다. 그 무렵이었다. 이삿날을 며칠 앞두고 어느 날 이웃집 부인이 다녀가는데 달려들며 짓다가 그만 묶어놓았던 줄이 끊어져 버렸다. 그 순간 '럭키'는 때를 만난 듯이 집 밖으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전에도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내 돌아와서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돌아오는 기척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개는 영물이라더니 저를 떼놓고 가는 것을 눈치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이삿짐을 꾸리기에 여념이 없는데 뜰에 돌아다니는 '럭키'의 모습이 언뜻 눈에 띄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쓰다듬어 주려고 가까이 가는데 주인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다시 사라져 버렸다. 아주 우리의 손을 떠나고 말았다. 충직한 개의 속성으로 봐서 그럴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름값도 못하는 것 같아서 야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주인집의 고심을 짐작하고 스스로 사라지기로 결심한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마음에 걸렸다. '럭키'의 소식이 묘연한 이사를 하게 되어 서운한 마음 이를 데 없었다. 지금도 가끔 길에서 비슷한 개를 만나면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지만 번번이 허사였다. 나무 그늘 속에 가린 그의 안식처에서 충직하게 집을 지켜주던 '럭키'의 모습이 가끔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직 한창 이삿짐을 꾸릴 때였다. 간국에 절어서 얼룩진 책들을 보면서 나는 오래전에 피난짐을 꾸리느라고 허둥대던 일이 떠올라서 잠시 일손을 멈추었다. 이미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도 녹음 철이었고 나도 녹음처럼 심신이 싱싱한 젊은 시절이었다. 그동안 내가 집을 몇 번 옮겼기 때문에 같은 집은 아니지만 피난짐을 꾸리던 곳도 터가 넓었다. 채마밭도 몇 두둑 일궈 놀았고 집 둘레에는 나무가 꽤 우거졌었다. 6·25 동란이 터지고 나서 며칠이 지난 때였으므로 지난해의 이사 때보다는 한 열흘은 더 늦었던 것 같다. 녹음이 제법 짙게 우거졌던 기억이 난다. 원래 6.25 동란은 남침의 시기를 녹음 철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때를 택했을 거라는 추측이 나돌았었다.

피난민들이 급한 소리를 하면서 떼를 지어서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번 북진 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라고 장담하던 우리 국군의 막강한 힘만 믿고 설마 여기까지는 어떠랴 싶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젊은 피난민이 터덕터덕 걸어가면서 비웃듯이 내뱉고 간 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던 것이다 “서울은 이미 인민공화국이 되었는데 무엇을 꾸물거리느냐?"라고 정신이 펄쩍 나서 짐을 정리하고 피난 보따리를 꾸리느라고 허둥댔던 것이다.

이삿짐은 이웃이나 친지들이 도와주지만 피난짐은 다들 똑같이 당하는 일이 아닌가. 내 코가 석자도 더 빠진 지경이어서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어려서 어른들로부터 '난리'라는 말은 가끔 들어왔지만 우리가 직접 그런 꼴을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그 무렵 용하게 학교의 사택을 한 채 얻어 들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교사가 거처하던 일본식 주택이었다. 이것을 '다다미'를 들어내고 온돌방으로 개조한 것이다.

방 하나가 여유가 있어서 내가 근무하던 농고 학생 두 사람을 하숙시키고 있었다. 봉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운 때여서 같은 동료 가운데도 방이 여유 있는 집에서는 흔히 하숙을 쳤다. 만만한 것이 같은 학교의 제자들이었다. 우리 집에 둔 하숙생도 같은 학교의 학생들인데 한 사람은 내가 담임하던 반 학생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집안의 아우뻘이었다.

두 학생이 다 실습용으로 삽과 괭이, 호미, 그리고 낫 등의 농구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내외가 피난짐을 꾸리느라고 허둥대고 있는데 두 학생이 똑같은 낯빛으로 변해 가지고 나에게 대들었다. 저희들 농구 가운데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있으니 찾아내라는 것이다.

뜨락에 채마를 몇 두둑 가꿔왔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나는 이 밭에서 일할 때는 필요한 대로 가끔 학생들의 농구를 빌려 쓴 일이 있다. 학생들이 찾아내라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 하는 말이었다. 난리가 나고 보니 순진한 학생들조차도 사제간이고 친지고 안중에 없을 정도로 다들 환심이 되어 있었다. 어려운 일을 당해봐야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농구를 다 챙기자 그들은 변변한 인사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의 허전하던 마음을 지금도 가끔 반추할 때가 있다. 녹음만 무성한 집에서 우리 두 내외는 대강대강 짐을 꾸려서 큰 반침 속에 싸놓고 대못을 야무지게 쳤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현실 앞에서 못 몇 개에나마 그래도 기대를 걸었던 것일까. 세간들을 언제까지 온전하게 보존해 줄 것으로, 그때 책은 따로 잘 감춘 셈으로 뜨락에다 단지를 몇 개 묻고 그 속에 넣었다. 뒷날 피난길에서 돌아와서 파내고 보니 간국이 배어서 얼룩이 졌다. 그 뒤에 그 책들을 서가의 구석구석에 꽂아 두었었는데 그것들이 눈에 띌 때면 그때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짐을 꾸리고 농구를 찾아주고 책을 묻고 정신 차릴 겨를이 없었다. 난리가 뭔지도 알 리가 없는 어린 딸아이가 짐을 꾸리는데 천진스럽게 훼방을 놓았다. 미처 다른 생각은 할 여유도 없이 아버지가 야단을 치자 딸아이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뒤에 우여곡절 끝에 아우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전황 속에서 우리 형제는 몇 달 동안을 부산 바닥을 헤맸다. 극에 달한 불안 속에서 나는 집안 식구들이 생각이 나서 시름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특히 딸아이를 울리고 온 일이 머리에 떠올라서 그렇게도 가슴 아플 수가 없었다. 전황 여하에 따라서는 우리 또한 영원히 이산가족이 안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다행히 몇 달 뒤에 수복이 되어 내가 피난길에서 돌아오자 그사이 딸아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잊고 있었다.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뒤로 물러섰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딸아이인데 선뜻 품에 안길 기세가 아니었다. 나는 아이를 힘껏 끌어안고 벅찬 감동을 삭이느라고 애썼다. 그동안 겪은 일을 생각하면 헤어졌던 가족을 무사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이 천우신조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 달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이 계속되는 동안 계절은 어느덧 짙푸른 녹음은 간 곳 없고 깊은 가을철로 접어들고 있었다. 색색으로 곱게 물들어 가는 고향 산야의 단풍을 바라보니 새삼 세상이 조화 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 나의 강의의 어느 대목에서는 학문의 발상에 대해서 설명할 때가 있었다. 사람은 제일 먼저 가장 가까운 '나' 즉 인간을 생각하게 되어 철학이 생겼다. 나의 뿌리를 캐다 보면 조상을 생각하고 결국 조물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철학 다음으로 종교가 생겨났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 즉 사회과학이 생겨나고….

미국의 어느 학자가 주장한 학설을 그대로 외워냈던 것이다. 그러면 어느 학생들은 조물주는 누가 만들었느냐고 짓궂은 질문을 한다. 내가 아주 난처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훈장의 체면상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내가 그런 것을 알면 이런 자리에 서서 쩔쩔매는 훈장 노릇을 하겠느냐"고 우선 침을 한 방 놓는다. 그러고 나서 "조물주는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계신 분이다. 그래서 세상은 모두가 조화 속에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라고 얼버무린다. 어쩌면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조화를 깨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라는 생각도.

하찮은 인간들이 서로 잘난 체하고 헐뜯고, 싸우고, 더럽히고 그래서 스스로 멸망하는 자업자득의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유감없이.

나는 그때 심란했던 머릿속을 가다듬으며 다시 이삿짐을 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창밖의 정원에는 무성한 녹음의 초록빛이 한층 더 싱그럽게 다가왔다. 가끔 그 사이로 6월의 미풍이 일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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