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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자음 동화 / 강돈묵

부흐고비 2022. 7. 6. 07:31

아무리 코로나 팬데믹이라 해도 이웃을 만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감염병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다 해도 지난날의 삶과 완전히 선을 긋고 살아갈 수 있을까. 재택근무를 하며 사이버 공간에서 일을 처리한다 해도 기존의 업무 처리 방식을 모두 덜어내지는 못한다.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하며 가치를 창출하려 한다. 이웃과 함께하고 부대끼며, 기쁨과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찾아 나선다.

사람과 이웃하며 사는 일이 쉬운 듯해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하루를 살아내며 우리는 수시로 끝없이 사람과 마주친다. 남자도 만나고, 여자도 만나고, 동지도 만나고, 원수도 만난다. 이때의 만남에서 얼마나 슬기롭고 지혜롭게 이웃을 마주하고 멀리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는 빛난다. 이 만남에서는 물론 주어진 상황과 처지에 따라 슬기롭게 행동하겠지만, 더러는 미숙하여 오해를 낳기도 한다. 대개 주어진 상황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고 이기에서 처리하고 말면 많은 오해와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언어도 삶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인 음운은 이어짐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모음과 자음의 이어짐으로 우리는 다 같이 소통할 수 있다. 성대를 지나면서 얻은 소리가 구강에 이르면 혀의 위치에 따라 다른 소리로 구별되는데 이것들이 모음이다. 또 구강의 어느 발음기관과 부딪혀 작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로 차별화되는데 이것들이 자음이다. 모든 소리는 모음이든 자음이든 같은 것끼리 어울리거나 다른 것과 어울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소리가 이어지면서 발음하기 어렵거나 거칠면 부드럽게 바꾸기를 갈망하여 일어나는 현상. 즉 동화는 서로 부족함을 채우고 미숙함을 보완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이때는 사심 없이 함께한다는 생각이 우선되어야 순탄하다. 둘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이기를 밀어 넣으면 반드시 불화가 일어난다. 함께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긴요하고 가까운 관계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암수가 함께 하면 다툼이 적듯이 소리도 모음과 자음이 함께 할 때는 별반 문제가 없다. 그러나 같은 모음끼리 혹은 자음끼리 함께 하면 자리싸움이 있을 수 있고, 그때마다 불편함을 뇌까리기 마련이어서 동화의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자음동화(子音同化)는 자음과 자음이 함께 할 때 빚어지는 현상이다. 여기서도 바탕이 같고, 성질이 비슷하면 다툼이 드물다. 신뢰 속에서 서로 믿고 만나기에 불안감이 없고, 웃으며 함께 지내게 된다. 서로 성향이 같고, 조건이 엇비슷해서 생각이 쉽게 소통하니 오순도순 지낸다. 하지만 아주 성질을 달리 하는 것들을 만나게 되면 눈치도 보고 상대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다툼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자음과 자음이 만나면 선머슴애처럼 나대고 어깨에 힘을 주기에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개성이 강함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한다. 불상사가 있으면 안 된다며 그들은 나름의 규정을 정하고 그것에 따라 상호 교류한다. 그래야 서로 편안하고 평화롭다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슬기롭게 동화를 통해 온전히 사귀고 정을 주고받는다.

동화할 때는 반드시 원칙을 지키는 심성이 필요하다. 자신의 이득을 탐하면 바로 불화가 일어날 테니까. 자음과 자음이 이어날 때는 규정과 조건이 구체적이다. 목청을 떨어 울리는 소리(有聲音)와 안 울리는 소리(無聲音)가 함께 할 때 동화의 길을 선택한다. 즉 유성음과 무성음의 만남에서는 유성음의 영향을 받아 무성음이 유성음으로 바뀌도록 규정하였다. 무성음이 유성음으로 바뀌어도 제 뿌리는 끝까지 존중해 준다. 가령 어금닛소리(牙音)의 경우는 모두 ‘ㅇ’으로, 혓소리(舌音)는 ‘ㄴ’으로, 입술소리(脣音)는 ‘ㅁ’으로, 잇소리(齒音)는 바로 옆에서 나는 설음 ‘ㄷ’으로 바뀌었다가 ‘ㄴ’으로 바뀐다. 제 스스로 소속된 곳의 유성음을 선택하지, 남의 것을 탐하는 법이 없다. 이들은 철저하게 본인의 신분과 처지에 맞게 주어진 규정을 지키며 이웃과 교유한다.

사람처럼 욕심이 많은 동물이 또 있을까. 언제 어디서든 다른 사람에 앞서가기를 갈망하고 그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이 같은 욕망으로 늘 자신을 들볶는 게 사람이다. 남보다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일을 그르치기 일쑤이다. 더러는 지나쳐서 저 스스로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사욕에 눈이 멀면 사물의 크게는 확장한다. 별것도 아닌 물건도 엄청난 크기로 다가온다. 그것의 가치도 환상적이다. 하지만 정확한 눈으로 바라보면 언젠가 털어내야 할 먼지임이 분명하다. 사실 그 사욕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별로 크지 않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잘것없는 것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데 지금은 알아채지 못한다. 지금 당장 욕심을 밀어내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다. 내 것을 챙기려는 욕심은 관계를 그르치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쉽게 드러나는데 본인만 알지 못한다. 또 이 일을 본인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오래 남아 바람직하지 못한 쪽으로 작용한다.

한글 속에 들어 있는 심오한 이치대로만 살아도 얼마나 좋을까. 주어진 처지에 만족하면서 항상 함께하려는 마음으로 걸어갔으면 좋겠다. 마음이 느슨해질 때마다 우리말 속에 들어있는 심오한 이치를 꺼내 봐야겠다. 스스로 자존을 지키면 남도 나를 존중해 주리. 감염병 팬데믹이 끝나 마음껏 정을 나누는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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