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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이방인의 봄 / 하병주

부흐고비 2022. 7. 7. 07:30

어지러웠다. 오랜만에 화창한 햇볕을 대하니 너무 눈부시고 현기증이 났다. 그대로 땅바닥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일어나면 그만이고 별로 문재 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의 그런 모습이 남의 눈에는 크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왜 그러세요, 도와드릴까요?”

눈을 들어보니 20대로 보이는 아가씨가 나의 팔을 잡고 흔들면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서야 그 아가씨는 제 갈 길을 갔다. 회색 바지에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머릿결이 뒷목을 덮은 키가 훤칠한 아가씨였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내 곁에 머문 시간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진한 여운을 남겼다. 요즘은 길을 가다가 약자가 폭행당하는 장면을 목격해도 못 본체하고 그냥 지나가는 세상이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인한 ‘생활 속 거리두기’ 운동이 정착 되면서 우리 주변에 서먹한 분위기가 형성되어가고 있다. 단체 모임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건 기본이고 친구간이나 일가친척, 심지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왕래가 많이 줄어들었다.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가깝게라고 말은 하지만 그게 말처럼 되지 않고 오랫동안 못 만나니 마음도 멀어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물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접근해서 도와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아가씨가 참으로 고맙고 대견해 보였다. 계절로 보면 입춘이 지난지가 벌써 한참이나 되었으니 봄 마중을 생각해볼 때다. 그러나 바깥나들이를 못해 봄을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 더구나 여기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삭막해 있는 나의 마음에 그 아가씨가 한 자락 따스한 봄바람을 불어넣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모처럼 만나는 화창한 햇볕에 이끌려 무작정 밖에 나왔다가 실로 마음이 훈훈해지는 일을 겪은 셈이었다.

낯선 지역에 대한 지리도 익힐 겸 거리를 한번 돌아볼 양으로 발길 닫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주위 풍경은 낯설고 어느 것 하나 눈에 익숙한 게 없었다. 그때 얼핏 눈길을 끄는<친절상회>라는 간판이 보였다. 흰색 바탕에 주홍색 글씨로 단조롭게 쓴, 어쩌면 촌스럽다 할 만큼 투박스런 간판이었다. 또한 ‘상회’라는 이름 자체가 요사이는 그리 흔한 게 아니다. 상점 간판도 시대의 흐름을 아주 민감하게 반영한다. 옛날에는 새로 간판을 걸었다 하면 주로 ○○상회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퍽이나 다채롭다. 간판 이름만 보고도 손님이 마음을 움직일 만큼 온갖 기교를 다 부린다. 주위에 있는 간판들을 죽 둘러보았다. ‘양계장집 아들’이라고 쓴 통닭집, ‘바로 이집’이란 이름의 식당, ‘The 잘 hair’라는 글씨에 여러 가지 색깔로 멋을 부린 미장원이 있는가 하면 ‘인생 닭갈비’라고 거창하게 써 붙인 간판도 보였다. 그렇다면 ‘친절상회’는 도대체 무엇을 파는 곳일까? 부쩍 호기심이 일어 닫혀있는 문을 가만히 열고 들어가 보았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건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ㄴ자로 길게 놓인 나무 의자와 의자에 맞대어 놓은 기다란 탁자였다. 내가 잠깐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더니 60대 초반 쯤 되었을 여인이 나왔다. 여인은 내가 들어온 사연을 말하자 웃음 띤 얼굴로 곁에 놓인 항아리에 긴 자루가 달린 플라스틱 바가지를 넣어 휘휘 젓더니 막걸리 한 사발을 잔이 넘치게 담아서 내게 권하는 것이었다. 봄 미각을 자극하는 냉이 무침 한 접시도 함께였다. 알고 보니 그 곳은 서민 대중을 상대로 하는 막걸리 집, 즉 옛날의 ‘선술집’이었다. 특별한 안주를 주문하지 않을 때는 막걸리 한잔에 천 원을 받는데 나는 처음 이사 왔다고 하니 공짜로 한잔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뜬금없이 잔잔한 감동을 맛보았다. 비록 하찮은 막걸리 한 잔이라 할지라도. 술 마실 시간은 아니지만 여주인의 고마운 성의를 매몰스럽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내가 술잔을 들고 있는 동안 여인은 가게의 내용을 설명했다.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장사는 아니란다. 올케 언니가 구멍가게를 하던 곳인데 그만두게 되어 간판도 그대로 둔 채 재미 삼아서 하고 있다는 것. 자기의 영감님이 옛날 왕대폿집 다니던 추억을 회상해서 그런 방식으로 해봤는데 의외로 나이 지긋한 손님이 꽤 많단다.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손님이 좀 뜸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이것을 시작한 후로 손님들과 대화도 나누고 자연히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어 젊어졌다면서 얼굴을 살짝 붉힌다. 젊었을 때는 제법 예쁘단 말을 들었음직한 모습이다. 그녀는 입담이 꽤 좋은 것 같았다. 혼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장사를 하니 소일거리도 되고 자기 능력으로 용돈도 벌어 쓸 수 있어 일거양득이 아니라 일거삼득이라고 넉살스럽게 이야기하는 여인의 얼굴에 즐거움이 넘실거렸다. 처음에 60대 초반으로 보았던 그녀의 나이가 70세가 다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가 본 곳에서 마치 오래 정 붙이고 살던 동네 같은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들어와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닳아진 장사꾼도 아닌 여인이 낯선 이방인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었다. 굳이 안 받겠다고 하는 걸 억지로 천 원짜리 한 장을 탁자 위에 놓고 나오면서 앞으로 종종 이 대폿집을 애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는 곳이 자주 바뀌어 주위 환경과 동화 되지 못하고 자꾸만 겉돌았다. 처음에 항구도시 여수(麗水)에서부터 시작해서 광주와 서울을 거쳐 지금은 경기 북부의 소도시에까지 이르렀다. 그동안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별의 별 일들을 다 겪기도 했다. 언젠가 이러한 나의 인생 여정을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에 비유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도토리가 한번 나무에서 떨어지면 바람에 날리고 언덕을 구르고 물결에 휩쓸리고 언제 어디에 정착하게 될는지 알 수 없다. 다행히 토양 좋은 곳에 멈추게 되어 싹이 트고 거목으로 자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깊은 물에 떠내려가 영영 싹도 틔우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나의 인생 여정이 꼭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현대의 도시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비유이기도 하다. 모두가 고향을 잃고 이 곳 저곳을 전전하면서 살아가는 이방인들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잠깐 둘러본 이 거리가 제법 마음을 끈다. 지나치게 넓지도 않고 답답할 정도로 좁지도 않은 도로도 좋다. 교통은 한가하고 길가에 드문드문 제멋대로 주차된 차량들이며 상점 앞 인도에 내어놓은 상품들로 해서 조금은 질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혼란스러울 정도로 무질서 하지도 않아 더욱 정겹다. 흙 묻은 발로 걷기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깨끗이 청소 되고 질서 정연하게 정리된 도로 보다는 적당히 너저분한 곳이 부담 없이 걸을 수 있어 소박한 친근감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잠시 밖에 나왔다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일을 두 번이나 겪었다. 마치 고향에라도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다.

지난겨울은 북극 한파와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참으로 혹독하게 춥고 지루한 나날을 힘겹게 지냈다. 하지만 이제 따사로운 봄날이 머지않았다. 길갓집 담장 밖으로 보이는 목련 나무의 꽃눈이 한껏 부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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