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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지삿개 / 김영화

부흐고비 2022. 7. 11. 07:35

오늘은 하늘도 맑고 투명하다. 오랜만에 가까운 친구들과 봄나들이에 나섰다.

들녘은 온통 노란 유채꽃으로 물들었고 연초록의 싱그러운 보리 물결이 봄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하였다. 머릿속을 메우던 잡념도 슬며시 물러간다.

서귀포 중문의 ‘지삿개’에 도착하여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해송 사이로 멀리 수평선이 보였고, 두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바닷가가 끝없이 펼쳐졌다. 해안선 끝자락에는 중문 해수욕장과 산방산도 눈에 들어와 멋스러운 풍치를 더해 주었다. 몇 발짝 더 다가서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해안선 아래로 병풍을 둘러놓은 듯 펼쳐진 절벽과 어우러져 바다 풍경의 독특함을 보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해변의 현무암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연을 느끼고 받아들임도 나이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지는가 보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편안하게 다가온다.

해안가 바위 절벽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봄바람에 실려 상큼함을 실어다 주었다. 화산 활동으로 바닷속에서 솟아난 육각형, 오각형의 기둥들이 엉켜 커다란 바윗덩이를 이루며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마치 바다에서 하늘로 치솟는 것처럼 보이는 다각형의 기둥에 규칙적으로 갈라진 틈새가 선명하게 보였다. 촘촘히 서 있는 형국이 기둥 같다고 해서 기둥 주자를 써서 주상절리柱狀節理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바위 등 하나하나의 독특한 모양과 무늬를 설명하기에는 그저 환상적이라는 말밖에 없는 듯하다.

어느 유명한 조각가의 숙달된 솜씨로도 빚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자연의 신비함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구멍의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을 타고 내려가니 이내 해안에 이르렀다. 검은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갖가지 바위들이 직선과 곡선으로 어우러져 출렁이는 옥빛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거북이 등과 같은 육각형 무늬가 꼼꼼하게 새겨진 까만 바위와 끊임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하얀 포말이 대조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옥상에만 올라가도 저 멀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제주 바다…. 주상절리대 앞에 서면 새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속에 석수장이 애달픈 사연이라도 금세 실려 오는 듯한데 파도가 심하게 일 때는 높이 20m 이상 장관을 연출한다.

아침저녁으로 무심코 바라보던 그 한결같던 바다의 느낌이 오늘은 새롭기만 하다. 특히 거센 파도를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하얀 포말로 부서지면서도 또다시 밀려오는 모습이 마치 절망과 고통을 실어 가고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오랜 세월 모진 풍파에 제 몸이 떨어져 나가도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저 수많은 바위를 보면 삶이 치열함과 진지함이 느껴진다.

우리가 걷고 있는 맞은 편에서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젊은 여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몸은 가냘프게 여위었고, 백발 머리에 얼굴은 희고 창백했으나 소박하고 정겨운 미소가 가득하다. 따뜻함이 고인 아름다운 풍경이다. 할머니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본다.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인생을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장수한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가장 많이 느낀 사람이다.’라고 한다. 나이를 먹는 것은 무조건적이지만 삶을 성숙시키는 나이는 오로지 내 선택이 아니던가.

나이가 들었다고 다 산 것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나이를 먹으며 제대로 익어가고 싶다.

온 세상은 싱그러운 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다와 마주 선다. 수평선에 눈을 두니 내 마음자리가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삶의 찌꺼기로 무거워진 나를 비우면서 타박타박 걷는 길이 가볍다. 이 길을 걸어간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에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담아 갔을까. 일이든 여행이든 할 수 있을 때 하며 사는 건 행복이며 후회 없이 사는 게 아닐까.

늘 허덕이면서 바쁘게만 살았던 지난 세월을 돌아본다. 지난해에 응급실 갔던 기억 도 떠오른다. 삶이란 하루하루 견디어내는 것인데, 겉에서 바라보는 타인의 삶은 모두가 다 행복하게만 보여 막연히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아픔을 수반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반복되고 부대끼는 일상으로 삶이 허무하다는 말은 이제 속으로 삭이련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일이 닥친다고 해도, 저물어가는 인생길에 담백하고 단순한 절제의 삶으로 물 흐르듯이 조용히 걸어가리라. 마음속에 환한 불이 켜지는 느낌이다.

소풍은 사람을 넉넉하고 너그럽게 해주는 마법이 있는 것 같다.

지삿개 바위와 그 늠름한 물결에 속이 시원하게 뚫리고,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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