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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구두 / 김응숙

부흐고비 2022. 7. 7. 07:45

예쁘다 너는. 섹시하다 너는. 한동안 나는 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너를 눈여겨보아 왔다. 그러나 이토록 화사한 너를 만나러 오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나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혹독한 겨울이 머물러 있었다. 봄이 오고 꽃이 피어나도 그 냉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마침내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오늘, 나는 깊은 호흡으로 애써 그 냉기를 몰아낸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너에게로 다가선다.

너는 옛날의 나를 기억케 한다. 너의 몸은 아침에 갓 깨어난 섬세한 꽃잎 같은 피부에 싸여 있다. 송아지 가죽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촉감은 진저리가 쳐질 만큼 부드럽다. 입안에 침이 고여 혀를 깨물 뻔한다. 너에게서는 비릿하면서도 초콜릿 향 같은 소녀의 살내음이 난다. 그러나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창밖에 벚꽃처럼 매혹적인 핑크빛의 몸을 가지고 있는 너는 이미 소녀가 아니다.

탄력이 넘치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살결에는 정열의 붉은빛도 스미어 있다. 브이자형의 턱 선이 날카롭다. 유선형의 몸매가 날씬하다. 뒤축에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열려 있는 눈동자를 닮은 두 개의 장신구가 달려 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거울 같이 반짝인다. 게다가 애증의 이중주도 능히 타고 갈 만한 예민하고도 강인한 황금빛의 10cm 굽이 있다. 찬연히 빛나는 킬 힐이다.

오직 너만은 위한 높고 투명한 진열대 위에서 너는 수많은 구애에 지친 듯 무심한 눈길로 나를 바라다본다.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는 도도함이 관능적인 선을 타고 온몸에서 흐른다. 나는 네게 사랑받을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난다. 나는 늙었고 다리도 투박하며 게다가 사랑에 목말라 있다.

점원은 내 앞에서 망연히 서 있는 나를 대신하여 너에게 수작을 건넨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가며 너의 맵시를 보여준다. 침이 마르게 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나와 짝을 짓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나는 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나는 이미 너에게 빠져 있다.

너를 얻기 위해 한 몸처럼 익숙해진 그녀를 버리기로 한다. 거미줄처럼 끈적한 인연의 고리를 모질게 벗어 버린다. 이미 체념으로 눈을 감은 그녀는 밀착된 나의 발을 스스로 벗어나 저만치 나뒹군다. 엎어져 있는 그녀의 깊은 흐느낌을, 혼곤한 피곤으로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육체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상처는 깊다. 긁히고 찢기고 때에 찌들고, 내 사랑의 몸부림에 뒤틀어져 있다. 한때 자존심으로 높이 치켜들었던 굽에 난 상흔은 벗겨진 피부 속에 하얀 뼈조차 드러나 있다. 내가 언제 저리도 많은 상처를 입혔던가.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린다. 이제 다시는 그녀를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 내가 어떤 사랑의 행로를 따라 부딪치고 넘어지고 거절당했는가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오늘과 같은 날이 다시 돌아온다 할지라도.

진열대에서 내려온 너는 이제 다소곳하다. 하지만 나는 잠시 망설인다. 후회의 눈물로 얼룩진 발등과 자책의 시간들로 굳어진 발뒤꿈치를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너를 떠날 수 없다. 부끄러운 발가락들을 꼼지락거리며 나는 너에게 발을 밀어 넣는다.

나는 나의 발에 꼭 들어맞는 너를 감탄해 마지않는다. 왕자가 찾에 헤매던 신데렐라의 구두도 이리 잘 맞았을까 싶다. 그러나 너는 신데렐라의 구두가 아니다. 더 이상 나도 남겨진 구두 한 짝을 들고 처량하게 왕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가 아니다.

나는 나의 두 발로 굳건히 땅을 디디며 홀로 선다. 10cm의 황금빛 자존심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잠시 비틀거린다. 그러나 너와 함께라면 이 정도쯤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한층 자신감이 생긴다.

사랑의 멍에로 내려앉았던 어깨가 펴진다. 스멀스멀 종아리로 올라온 저릿한 통증이 한순간에 전율이 되어 등허리를 타고 오른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머리를 바로 든다. 비로소 창밖의 세상이 또렷이 보인다. 오랫동안 주눅이 들어 있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린다.

'그래, 너희들은 다 죽었어.'

나에게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채찍을 휘둘렀던 자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킬 힐의 위력이다. 꼿꼿해진 척추에 힘을 주며 또각또각 몇 걸음을 걸어 계산대로 간다. 누군가가 알면 눈이 휘둥그레질 금액이지만 그대는 모른다. 천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이 기분을.

창밖에는 너의 몸 색깔을 닮은 벚꽃잎이 바람에 휘날린다. 봄이 가고 있다. 이제 너와 나는 사랑이 저 벚꽃잎처럼 난분분하는 도시의 거리로 나설 준비가 되었다. 다시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다.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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