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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햇빛 마시기 / 최원현

부흐고비 2022. 7. 8. 07:45

“마셔 보세요!”

김 원장이 내놓은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묵직했다. 그러나 무얼 마시라는 걸까. 유리컵 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셔보세요!” 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 ‘훅’ 하고 들이마셔 봤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 그녀의 설명이었다.

내가 지금 마신 건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둔 것이란다. 좀 맹랑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햇빛을 내 속으로 들여보내준다? 그러면 내 속에선 어떻게 반응할까. 갑자기 들어온, 아니 한 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한 밝음이 어둠 속의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다가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산부인과병원 원장이다. 표정으로 보아도 전혀 장난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는 매일 그렇게 햇빛을 받아 마신다고 했다. 순간 내가 마셔버렸던 유리컵을 다시 바라보았다. 컵은 다시 창가의 제자리로 가 있었지만 해가 없어졌으니 햇빛도 없다. 그런데도 유리컵에 내가 채 마시지 못했던 몇 개의 햇빛 알갱이들이 남아 보석가루처럼 빛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고 보면 햇빛도 포근히 안기거나 한곳에 담겨 쉬고 싶을 수도 있겠다.

태양에서 발산된 빛이 대기 속을 뚫고 내려와 발견한 한 작은 공간, 거기 갇힌다기보다는 빠져든 순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건 어머니의 품속 같이 안온할 수도 있고 태양으로부터 보내지던 순간의 보드랍고 따스한 느낌일 수도 있다. 그 먼 거리를 달려와 이른 곳이 고작 작은 컵 속이라는 것이 화가 날 법도 하지만 땅으로 스며들어버리는 수많은 동료들을 보면서 그나마 그들과는 다른 곳에 이른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일억 오천만 킬로미터, 빛은 초당 삼십만 킬로를 가니 태양에서 발산된 빛이 이곳에 닿는 데까진 약8분 20초가 걸린 셈이다. 그렇다고 그 거리가 짧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빛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었다면 어떨까. 로켓이라면 5개월을 가야 하는 거리요, 비행기라면 17년, 소리였다고 하면 15년이고, 새마을호 기차라면 114년, 걸어서는 4,270년이나 걸리는 거리다.

내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맛이 어때요?” 그녀가 다시 물어왔다. “글쎄요. 향긋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얼버무리자 마음이 상대에게로 가는 데는 0.5초라더니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맛은 없을 거예요” 해 버린다. 그의 말은 참 사무적인데도 싫진 않다. 사실 여기 무슨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어느 날 진료를 하다 물을 마신 컵을 마땅히 치울 곳도 없어 창가에 놔뒀다. 그런데 햇빛이 창 안 깊숙이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그 햇빛이 창가의 컵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도 보였다. 순간 햇빛이 컵에 담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석가루 같은 빛의 알갱이, 하나님의 선물이 지금 컵에 담기고 있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컵을 들어 주욱 들이 마셔봤다. 가슴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빛이 들어간 가슴 속에서 반가운 악수소리가 막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바깥 나라는 어떠니?’ 서로 묻고 답하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 했다. 그는 그렇게 햇빛받이 컵을 창가에 계속 놓아두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매일 햇빛을 받아 마시게 되었을 수 있다. 어쩌면 나도 그랬을 수 있다. 내가 전혀 부정적이 안 되는 것도 그와 같은 생각을 나도 일찍부터 하고 있었을 수 있고 아니더라도 그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가능한 데다 거기에 내가 공감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에만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 잡히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다. 정작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아주 큰 것도 작은 것도, 아주 먼 곳도 가까운 곳도 볼 수 없는 게 우리 눈이고 들을 수 없는 게 우리 귀다. 공기나 햇빛, 바람의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문득 김 원장이 내게 햇빛이라며 마셔보라고 한 건 보이지 않는 것도 보라는 특별한 마음 씀 같이 생각이 되었다.

햇빛 마시기, 참 그럴싸한 생각이지 않은가. 내 안의 어두움을 밝혀줄 기회요, 엄청난 살균력이 있다는 햇빛이니 그게 또 내 안 깊숙이 들어가면 거기 있으면 안 될 것들이 순식간에 괴멸되는 최고 유익의 기회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게 햇빛이었는데 나는 그걸 너무 모른 체 하고 살아오지 않았나싶다.

너무 큰 은혜나 사랑에는 고마워할 줄도 미처 깨닫지도 못 하고 사는 게 사람이란다. 그런 면에서 김 원장이 더욱 고맙다. 그 고마움의 마음 표시로라도 나도 당장 내 방 창가에 가장 투명한 컵 하나를 놓아두어야겠다. 그리고 거기 담긴 햇빛을 소중히 내 속 깊이로 들여보내 주리라. 그것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밖에 되지 않을 지라도 내 삶 속엔 아주 작게라도 소중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날 것 같다. 어쩌면 내 마음도 한결 깨끗해지고 생각도 정신도 맑아질지 모른다.

햇빛 마시기는 내 안으로 햇빛 들여보내기다. 바깥세상을 안 세상으로 들여보내기다. 생각의 전환이다. 마실 수 있는 것의 영역 확대다. 새롭게 보기다.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아름답지 못하거나 바르지 못한 생각과 마음들이 들여보내진 햇빛으로 하여 씻기고 닦이고 다듬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컵을 준비하러 가는 내 마음도 창가의 햇빛보다 더 밝아진다. 내 안으로 햇빛 들여보내기, 내 안이 밝아지게 되면 세상도 조금 더 밝아질 게다. 내 안의 어둠이 걷히면 거기 새로운 희망의 싹들이 마구 피어날 것 같다.

사진 출처: https://www.wanderlustchlo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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