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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블루로드 / 박정숙

by 부흐고비 2022. 7. 8.

바람이 분다. 어둠을 더듬어 온 바람은 동해의 눈꺼풀을 살며시 올린다.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우는 엄마의 손길처럼 살갑게 바다의 몸을 쓰다듬는다. 바다는 칭얼대는 아이처럼 몸을 뒤채면서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동심의 푸른 바다, 동해를 깨우는 바람에서도 푸른 색감이 묻어나는 듯하다.

남편과 함께 블루로드를 걷는 중이다. 어떤 손이 있어 밋밋하던 길에 푸른색을 입혀 놓은 것일까. ‘푸른’이라는 말이 주는 청량한 어감이 길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여준다. 게다가 길 위에서, 하루의 처음을 여는 태양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길(吉)한 터의 조건 중 하나가 좌청룡우백호라 하던가. 무성한 솔숲과 동해를 양쪽으로 거느린 오솔길이 해안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여명이 깔린 길은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걸음걸음 긍정의 주문을 걸면 우리 부부에게도 길한 기운이 건너올 것만 같다.

블루로드는 해안을 경비하던 병사들이 다니던 길이었단다. 뿌리를 뒤흔드는 힘찬 군홧발 소리를 구령 삼아 삶의 피돌기를 돌렸는지, 나무들도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있다. 일말의 흐트러짐도 허락지 않을 듯한 나무의 기상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길이 주는 선물일까. 어둠을 가르며 하나둘 작은 해변이 나타난다. 키 큰 해송들 사이로 바다보다 파도소리가 먼저 인사를 청한다. 귀를 씻어 내리는 바다의 소리가 일상에 찌든 가슴을 시원스럽게 쓸고 간다.

사위가 희붐해지는가 싶더니, 드디어 먼 수평선 위로 붉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다가 밀어 올릴 태양을 기다리기로 한다. 길이 선사할 선물에 조바심이 난다.

바다의 산기가 점점 짙어진다.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바다가 절절 끓어오른다고. 세상의 붉은 것들을 모두 끌어다 놓은 듯, 수평선 끝자락이 붉디붉다. ‘힘주세요.’ 오랜 진통 끝에 아이를 세상에 내어 놓던 분만실에 다시 누운 듯 나도 몰래 온몸에 빠듯이 힘이 들어간다. 그러기를 겨우 몇 초, 드디어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순 ‘미끄덩’ 나를 빠져나가 버리던 아이처럼, 태양도 순식간에 원형의 몸체를 바다 위로 둥실 띄운다. 저 경이로운 탄생의 순간이라니.

햇귀를 받아 세상 모든 것들이 제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길도, 그 위를 걷는 몇몇의 사람도 눈앞으로 도드라진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해송의 붉은 허리를 휘감자 푸르디푸른 풍경이 바람과 함께 출렁인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에 붙박여 길 위에 쪼그리고 앉는다.

나는 작은 해안 마을에서 유년을 보냈다. 블루로드의 여느 어촌들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짭조름한 해초 내음이 풍겨오는 마을길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손님처럼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널어놓은 그물을 재바르게 손질하곤 했다. 한바탕 바다와 씨름하느라 녹초가 된 그물을 꿰매고 또 다른 출항을 위한 에너지를 한껏 불어넣었다. 한층 튼튼해진 그물은 생명의 바다를 누비며 제 몫을 톡톡히 해냈을 것이다.

마을 앞 해변은 거친 자갈들로 이루어져 있어 마음껏 뛰어놀 수가 없었다. 언젠가 나와 친구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먼 곳에 있는 도둑굴 백사장까지 해수욕을 가자고 쑥덕공론을 펼쳤다. 그곳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놀다가 점심도 먹고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도둑굴은 어른들이 절대금기의 선을 그어놓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출렁이는 파도처럼 끝없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존재들이 아닌가. 어른들이 금하면 금할수록 우리들은 그곳에 꼭 가고 싶었다.

일곱 명의 친구들이 겁도 없이 산길을 걸었다. 점심으로 라면을 끓이기로 하고 가스버너, 냄비, 김치, 물 등을 하나씩 챙겨 든 채였다. 소풍을 가듯 장난도 치고 신나게 노래도 불렀다.

어느덧 커다란 바위 앞에 도착했다. 반짝이는 은빛 모래와 연분홍 해당화가 곱게 핀 여름 해변이 우리를 반겨 맞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하얀 포말을 몰고 오는 파도를 향해 몸을 던졌다.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정신없이 깔깔거리느라 해가 기우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입술이 새파래진 채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데, 친구 중 하나가 도둑굴의 전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둑들이 보물을 그곳 어딘가에 숨겨 두고 갔는데,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도망을 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금방이라도, 동화책에서 보았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들이 ‘열려라 참깨’를 외치며 덜미를 잡을 것만 같았다.

와락 달려 나가는 친구의 꽁무니를 따라 미친 듯이 뛰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숨이 목구멍에 차오르도록 달렸지만 올 때와 달리 돌아가는 길은 어찌 그리 멀던지. 마을 근처의 바다 위로 갈매기 몇 마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이 저만치 눈에 들어오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야 해변에 버려두고 온 냄비 생각이 났지만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의 태풍 같은 꾸중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그러나 그 뜨거웠던 여름 하루의 기억은 유년의 자화상처럼 내 안에 깊숙이 자리를 잡게 되었던가 보다. 오늘처럼 문득 떠올라 추억으로 되새김질 되는 걸 보면.

바다는 그때의 아이들처럼 흰 이를 드러내고 있다. 한 올, 두 올,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았을, 그때 그 아이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진다. 그들도 나처럼, 이따금은 우리가 함께 적어놓았던 유년의 비망기를 꺼내 읽곤 할까.

목적지인 축산항 등대가 가까이 보인다. 밀물과 썰물이 만나는 곳, 어쩌면 유년의 추억과 불혹을 넘어선 내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다시 초심을 외쳐도 좋을 만치 또 다른 무엇으로 충만한 내가 블루로드, 그 푸른 길 위에 서 있다.

블루로드에서 꺼내 읽은 유년으로 하여 내 안에도 조금은 푸른 물이 든다.

사진 출처:영덕 블루로드의 블루로드속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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