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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운문사의 노송 / 변종호

부흐고비 2022. 7. 15. 18:15

늘어선 노송군락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천년 고찰을 수호하느라 저마다 가슴팍에 상흔을 새기고 있다. 긴 세월 강인한 생명력으로 뿌리내리고 줄지어 서 있는 노거수는 오백 나한의 모습이다.

일주문 대신 들머리에 도열한 소나무는 하나같이 일제의 만행을 간직하고 있다. 수령 일백 년을 훌쩍 넘어섰을 노송, 제 몸을 톱으로 유린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도리 없이 진을 뽑아야 했던 민초의 가슴도 쓰렸으리라.

청도 운문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정갈한 비구니 도량에는 보존하는 보물도 많지만 꼭 찾아보고 싶은 것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처진소나무이다. 우리나라 소나무 중 세 번째로 지정됐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매년 음력 삼월삼짇날이면 비구니 스님들은 오백 년을 살아낸 노송에 막걸리 열두 말을 물에 희석하여 공양한단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저리 수세가 좋은지 나무의 위용에 숨이 턱 막힌다. 솔잎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건드리기만 해도 푸른 물이 배어 나오고 진한 향이 풍길 것 같다.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에 창건하였고 중건한 만세루 옆에 자리하고 있다. 3m의 밑동에 수폭은 20m의 반원형이며 가지가 자라면서 밑으로 향해 처진소나무로 판명되었고 마치 큰 우산을 펼쳐놓은 것 같아 기이하고 아름다웠다.

일천오백 년 운문사와 소나무를 비교하면 창건 당시에 있던 나무는 아니다. 그렇다면 희귀한 나무를 어디서 구해 어떤 의미로 심었는지 궁금했다. 통상 소나무는 기개와 절조, 풍류, 안일과 탈속을 상징하는데 그런 연유일까.

임진왜란 때 일부 당우가 소실되는 것도 지켜봤던 소나무이기에 운문사의 산증인이지 않은가. 살아온 나이만큼이나 짊어진 무게도 만만치 않은가 보다. 오죽하면 마흔 개가 넘는 지주대가 떠받치고 있으니 말이다. 나무의 안을 들여다보니 용이 승천하듯 뒤틀리며 기운차게 뻗어간 나뭇가지에 탄성이 나온다.

속리산 정이품송을 시작으로 천연기념물 소나무를 찾아 전국을 다닌 적이 있다. 가는 곳마다 다른 생육환경으로 나무의 특징이 있었지만 처진소나무는 달랐다. 비구니 스님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인지 수형이 매우 빼어났다. 가지가 뻗을수록 아래로 향하는 것은 부처님을 향한 끝없는 하심이 아니던가. 어찌 보면 도량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무시로 흔들리는 학인 스님을 도닥이며 자비를 베푸는 관음보살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목탁 소리 염불 소리를 자양분 삼아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저만큼 수세樹勢를 펼친 노송이라 견뎌낸 세월만큼 삭여야 할 아픔도 많았을 테고 품어야 할 대상도 넓고 깊었지 않았겠나. 절집의 역사와 산문을 드나든 불자의 기원 하나하나도 거북 등 같은 표피에 모두 새겼지 싶다. 가히 혈기 왕성한 소나무는 절대 갖출 수 없는 덕목을 겸비했음이다.

처진소나무를 통해 나를 돌아본다. 혈기 왕성하던 시절에는 마냥 젊음이 이어질 것으로 여겼기에 시기하고 탓하며 욕심을 채우느라 달달 볶았다. 가지를 펼치기는커녕 하늘바라기에 키 재기만 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여겼으니 옆을 볼 여유조차 없어 품고 보듬어야 할 피붙이며 주변도 돌보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만큼 살아보니 알겠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사실과 그리 흔들어대던 근본도 마음임을 알았다. 꿈이라 부르며 이루려 전전긍긍했던 것도 부질없음이요, 인생이 스치는 바람이라는 것도 터득했다. 피가 뜨거울 때는 높이 멀리 볼 수는 있었으나 교만함이 따랐고 내려다보지 않았기에 타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사려 깊지 못해 베풀지도 않았다.

고적한 절집에 북풍이 스친다. 만고풍상을 겪으며 수백 년을 붙박이로 살아왔음을 증명하듯 육중한 몸은 묵언 수행 중인데 가지 끄트머리만 파르르 떤다. 법당을 더듬은 바람결에 향내와 솔향이 가득하다. 가슴이 탁 트인다. 찌든 마음이 청정해지는 기분이다. 이미 해탈의 경지에 들어선 노송을 한동안 바라보자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두 손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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