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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과 원문 |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은, 경술년(1010, 현종1) 거란이 처음 침입했을 때 여러 신하들은 항복을 논의하였는데 홀로 파천(播遷)하여 회복을 도모하자고 청하였고, 무오년(1018) 거란이 재차 침입했을 때 상원수(上元帥)로서 서도(西都)에 나가서 교전할 때마다 어김없이 이기니, 10만의 강포한 적들 중에 귀환한 자가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거란이 전투에서 이처럼 심하게 패배한 적은 없었으며 시중보다 훌륭한 공을 세운 신하는 없었다. 그러나 개선한 뒤 곧바로 고로(告老)*하였고 임금이 친히 금화(金花) 여덟 가지를 꽂아 주자 배사(拜謝)*하며 감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공을 세운 것이 훌륭한 점일 뿐만이 아니라 고로한 것이 더욱 훌륭한 점이다. 일흔 살에 치사(致仕)*한 일은 고려 초에 이미 전례가 있었는데 벼슬살이의 즐거움에 취해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은 모르는 자가 어쩌면 그리도 많았단 말인가.
* 고로(告老): 벼슬하던 사람이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기로 청함.
* 배사(拜謝): 웃어른에게 삼가 사양함.
*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姜侍中邯贊當庚戌契丹之初侵也, 諸臣議降, 而獨請去邠, 以基恢復. 戊午契丹之再侵也, 以上元帥出西都, 每戰必克, 十萬強寇, 還者不過數千. 契丹之敗未有如此之甚, 人臣之立功未有盛於侍中. 然凱還之後, 旋卽告老, 而金花八枝, 謝不敢當. 其非立功之爲盛, 告老之爲尤盛也. 七十致仕, 麗初已有其例, 而貪樂酣豢, 知進而不知退者何限耶?
-이만도(李晩燾, 1842~1910), 『향산문집(響山文集)』 권8 「여사제강보단(麗史提綱補斷)」
해설 |
위는 이만도가 쓴 「여사제강보단」의 일부이다. 분량이 방대한 『고려사』의 요약본이 유계(俞棨, 1607~1664)가 지은 『여사제강』이라면, 그 책 중 일부에 붙인 저자의 평이 「여사제강보단」이다. 이 부분은 일종의 사평(史評)으로 고려 역사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담겨 있다.
저자는 강감찬에 대해, 거란이 처음 침입했을 때 화친하지 말고 일단 피한 뒤 훗날을 도모하자고 홀로 주장한 점, 재차 침입했을 때 직접 출정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해 적군이 거의 전멸할 정도의 피해를 입힘으로써 거란이 처음 침입했을 때의 본인 주장을 증명한 점을 먼저 든다.
이러한 공훈은 임금이 황해도 금천(金川)까지 직접 마중 나와 금화 여덟 가지를 꽂아주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물러났고 저자는 이를 더욱 훌륭한 점이라고 평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도성 남쪽에 별장을 짓고 만년을 보냈는데, 당시에 일기가 화순하고 풍년이 들어 온 나라가 평안하니, 사람들이 그 공을 모두 그에게 돌렸다고 했다. 당시 사람들 또한 그가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히 물러나 만년을 보낸 모습을 훌륭하게 여긴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70세가 되면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난다는 말이 유가(儒家)의 경서(經書)인 『예기(禮記)』에 실려 있고 고려 초기에 이미 그러한 전례가 있었지만 권력에 취해 이를 이행했던 사람은 적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유로 강감찬의 만년을 거론하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여사제강보단」에 나타난 저자의 고려 역사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위와 유사하다. 『여사제강』의 특정 기사를 거론하고 그 일에 대해 자신의 당위를 견해로 제시한다. 저자의 이러한 사고는 이미 흘러갔다고 가벼이 생각하기 쉬운 과거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면서도 그가 처한 현실 상황과도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1866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1876년 집의로 있을 때는,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목숨 걸고 반대한 최익현(崔益鉉)을 비호하다가 파직되었다. 안동에서 강학(講學)에 전념하던 1895년에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일본에 항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는 을사오적을 처형해달라고 상소하였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었을 때는 24일간 단식하다가 순국하였다. 국가가 위태로울 때마다 저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끊임없이 투쟁한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행적은 강감찬과 다른 듯 닮아있다. 살았던 때는 달랐지만 양자 모두 국가의 운명을 위협하는 외세의 침략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 다만 시대와 상황이 달랐을 뿐이다. 국치(國恥)의 날에 저자는 본인의 최후를 직감하면서도 강감찬과 같은 만년을 바라지 않았을까.
강감찬이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치사를 청했던 시점과 저자가 국치의 울분을 품고 유명을 달리했던 때를 헤아려보면 모두 70세 전후의 나이였다. 옛적에 70세를 치사의 나이로 규정하고 현대에 정년을 두어 퇴임할 시기를 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신체적, 정신적으로 쉬어야 할 시기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강감찬은 공을 이룬 뒤 물러났고 저자는 고령에도 음식을 끊다가 숨을 거두었으니, 각자 자신이 지키던 가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강감찬이 공을 이룬 뒤 물러나지 않고 그 힘으로 국정을 좌우했다면 우리는 그를 다르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침략해 오는 외세에 평생 동안 투쟁해 온 저자가 나이가 많다고 해서 국가의 치욕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만절(晩節)*을 잘 지킨 분들이라 하겠다.
* 만절(晩節): 늘그막의 시절.
각계의 원로 인사가 특히 정치에 입문했다가 오랫동안 쌓아왔던 명망을 잃는 경우를 요사이에 종종 보게 된다. 무엇인가를 일관되게 쌓아온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평생 쌓아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서 출처(出處)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이며, 그것을 지키고 있을 때의 나와 그것을 버렸을 때의 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해 보인다.
글쓴이 : 강만문(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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