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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에서 보내 준 자동차가 대문 밖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듣고도 나는 10분 이상 꾸물거렸다. 세미나 장소까지 가는데 한 시간 남짓 걸릴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리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문을 나섰을 때 운전기사는 자동차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같은 손을 태울 때는 운전석에 앉은 채로 기다리는 것이 보통인데 차 밖에 나와 서 있는 것은 예외에 가깝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기사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운전 시동을 걸었다.

큰길로 들어서자마자 운전기사는 회의가 시작되는 시간을 물었다. 여덟시 반부터라고 대답했더니 좀 빨리 가야겠다며 그는 안전벨트를 어깨에 걸었다. 가는 도 에 도로 확장하는 곳이 있어서 평상시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약 10분쯤 달렸을 때 기사는 카세트 테이프를 꽂아 넣었다. 유행가가 아니라 베토벤의 '운명'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노래말 없는 경음악 정도를 즐기는 운전기사는 더러 보았지만 무거운 고전음악을 선호하는 기사는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백밀러에 비친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의 선량해 보이는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뒷좌석에 앉은 나의 기호에 맞추려고 그 곡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가 교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을 때 "교수님, 속력을 좀 내겠습니다" 하며 기사는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내가 무엇을 적고 있었으므로, 흔들리더라도 양해를 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나는 작년에 일본에서 겪은 운전기사들의 용의주도한 태도를 상기하였다.

일본 사람들에게 직업의식이 투철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들을 직접대했을 때의 인상은 소문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욱 깊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택시 운전사의 경우나 개인 회사에서 보내 준 승용차 운전사의 경우나 손님이 지루함 또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역력하였다. 관광 명소 부근을 지날 때는 안내와 설명을 잊지 않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한국의 경제 발전 또는 한국 문화가 일본 문화에 미친 영향 등을 화제에 올려서 무료함을 덜어 주었다. 여덟시 반까지 회의장에 도착하도록 하려고 애쓰는 기사의 성의를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재촉을 하는 것은 좋지 않을 듯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나, 기사는 교통법규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운전에 무식한 내가 보기에도 그 기사의 운전 솜씨는 아주 탁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야가 넓고 상황 판단이 정확하여서 속력을 꽤 내고 있는데도 불안감을 주지 않았다.

팔당(八堂)을 지나서 양수리(兩水里)로 향하는 길의 오른편 경관은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이런 경치 좋은 곳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가지 못하고 빨리 차를 몰게 되어 아쉽다고 말하면서, 이따가 돌아가는 길에는 천천히 구경을 하면서 가자고 기사는 나를 위로하였다.

돌아올 때의 기사와 나는 꽤 친숙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운전 기술을 배운 지가 몇 해나 되느냐고 물었고, 그는 군대에서 배웠으니 한 10년 전의 일이라고 대답했다. 군에 복무하는 동안에 한 가지라도 기술을 배워두는 것이 좋을 듯하여서 운전병을 지원했던 것인데, 제대할 무렵에는 사단장 차를 몰았다고 하였다. 사단장은 제대하지 말고 장기 복무를 하라고 종용했으나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의무연한만 채우고 나온 지가 칠팔 년 가까이 된다는 말도 하였다.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과 신록이 싱그러운 연산(連山)을 왼쪽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기사의 자서전에 귀를 기울였다.

제대한 뒤에는 어느 회사 차를 몰았다. 열심히 저축을 해서 개인택시 한 대를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회사에 사표를 냈다. 개인택시는 수입은 좀 나은 편이었으나 건강에 무리가 갔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게 마련이어서 피로가 겹쳤고, 운동이 부족 하여서 위장을 버렸다. 돈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건강과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되어서, 2년 7개월 동안 굴리던 개인택시를 팔고 다시 월급쟁이가 되었다. 일요일이 되면 낚시터를 찾아간다고 하였다. 단체로 가지 않고 혼자 가기를 좋아한다. 조용한 물가에 홀로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수면을 바라보면 그렇게 마음이 평온할 수가 없다. 오늘도 나를 회의장까지 태워 다 주고 기다리던 시간을 이용하여 강물에 낚시를 드리웠다.

그러나 일요일에도 연구원장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기꺼이 핸들을 잡는다. 자동차를 모는 것은 자기의 직업이고 연구원장은 일이 많은 양 반이니까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 것이다. 나는 원장이 인복을 잘 타고났다고 생각하면서 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사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일이다. 자기는 고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대학까지 보낼 결심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나는 그의 뜻이 잘 이루어지기를 속으로 기원하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오는 가운데 차는 이미 시내를 접어들고 있었다. 서울의 거리는 언제나 다름없이 복닥거렸지만, 이것이 모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겠거니 생각하니 그리 짜증스럽지는 않았다. (1986,5.27)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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