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초록 등대 / 김태헌

부흐고비 2023. 6. 18. 11:40

빛은 지문이고 서사시다. 등대는 땅의 끝과 바다가 시작되는 경계에서 뱃길을 인도한다. 뱃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나침판이며 길라잡이다.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불빛은 지루하고 긴 항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주어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메시지다. 고독과 낭만의 대명사로 마음을 훔치는 마력을 지녀 뭇 발길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천 년을 이어온 등대의 불빛은 희망을 이끄는 언어이고 위안을 주는 상징이었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끊임없이 바다로 나아갔다. 뗏목이나 통나무배를 타고 어로 활동을 하였다. 좀 더 멀리 나가면서 두려움을 안고 검푸른 바다에 밤낮으로 배를 띄웠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원천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호기심으로 찾아 나선 뱃길이 세계를 연결하는 수많은 바닷길을 만들어냈다.

거친 파도를 거느린 바다는 불안과 공포와 긴장이 항상 넘실거린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뱃사람에게는 붙박이 북극성과 계절 따라 이동하는 별자리가 밤하늘의 나침반이었다. 별이 지상으로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고, 달이 차올랐다가 기우는 모습은 뱃머리의 방향을 정하는 방향타였을 것이다. 다도해에서는 산가늠*하여 뱃길을 잡았다. 크고 작은 섬의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을 보고 물길을 정하는 것이 전통적인 항해법이었다. 눈에 보이는 섬의 여러 모습이 등대 역할을 하였다. 삶은 대본 없는 드라마였다. 생전의 아버지는 세상살이를 험한 바다를 건너는 것에 비유하셨다. 곳곳에 보이지 않는 암초가 숨어있고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망망대해에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훌륭한 뱃사공은 잔잔한 바다를 항해할 때 보다. 험한 바다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라면서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지혜를 배우라고 하셨다.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는 잠시도 쉬지 못하지만, 지혜를 짜내면 안전하고 빨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당부했다.

결혼하던 해에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몰아쳤다. 신혼 초기에 중모리장단으로 한동안 무난했다. 사고로 오른 다리가 골절되어 수술로 깁스하고 있을 때, 쌍둥이를 낳았다. 두 아이가 미숙아로 의료보험 혜택이 되지 않던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했다. 아이 낳은 지 여섯째 날, 장인께서 지병으로 세상을 등지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겨울 아버지께서 세상과의 인연의 끈을 놓으셨다. 자진모리장단으로 다가오던 시련이 휘모리장단의 거친 풍랑으로 몰아쳤다.

한 해 동안에 불어 닥친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절체절명의 고통을 주었다. 엎친 데 덮친 시련이 한꺼번에 몰아닥치자 정신을 못 차리고 갈팡질팡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밤바다를 항해하는 난파선처럼 거친 파도에 휩쓸려 표류했다. 나침반도 없고 밤하늘의 별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등대조차 없는 안개 자욱한 밤바다에서 거친 파도를 타고 넘는 뱃사공이었다. 세상이라는 바다는 거칠고 험했다. 눈뜨기조차 싫었다. 홀어머니와 칠 남매의 장남이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많았다.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었다. 초등학생인 막냇동생까지 가시밭길 세상살이를 이끌어야 했다. 기대거나 의지할 곳조차 없었다. 세상이라는 바다가 두려웠다. 어둠을 비추는 한 줄기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정리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빙빙 돌며 유혹했다.

염치없는 눈물조차 말랐다. 빈손으로 출발했던 신혼살림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격랑에 위태위태했다. 감당하기 벅찬 아이의 병원비 마련에 손을 놓고 있었다. 칠 남매를 거느린 어머니는 품이 넉넉한 묵언의 바다였다. 무너지고 좌절하며 방황할 때 숨을 틔우는 가느다란 불빛이셨다. 토닥이는 위로와 격려에 마음을 다잡았다. 초롱초롱한 아이의 해맑은 눈망울은 버팀목이었고 희망의 등대였다.

스스로 등대가 되어야 했다. 등명기에 불을 밝히고 이정표가 되기를 자처했다. 거친 세상으로 나아가는 동생들의 앞날을 비추는 외롭고 쓸쓸한 등대가 되어야 했다. 곳곳에 도사린 위험을 알리며 마음속에 등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매운바람 몰아치는 험한 길을 비췄다. 가족의 응원과 기대를 등에 업었던 동생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형으로서 느끼는 뿌듯함을 주위에서 부러워했다.

불안한 예감은 늘 적중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간절한 기도는 어려움이 잘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주의 깊게 살펴도 세상은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동생은 촉망받은 법조인이었으나 믿었던 사람의 배신과 사기라는 복병을 만났다. 건강을 잃었고, 상황마저 점점 악화하였다. 급기야 세파를 견디지 못하고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내 등대에도 불이 꺼졌다.

등대는 두려울 때 진가를 나타내는 삶이라는 언어였다.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였다. 비바람이 불고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친 바다를 항해토록 도와주는 생명의 불빛이고, 안도의 속삭임이었다. 푸른 갈기 앞세우고 매섭게 달려드는 파도에 맞서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바다에서 꿈을 캐는 사람에게 아늑한 안식처였다.

등대를 세워야 했다. 비바람과 풍랑을 이겨내도록 어둠을 밝히고 이끄는 등대가 필요했다. 참척慘慽의 아픔을 삭이지 못한 어머니에게 위안이 되어야 했다. 아픔이 숨이 죽어 머뭇거리다가 발효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씨줄과 날줄이 설피창이로 엮인 세상살이를 안전하게 안내하는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를 세워야 하는 데 점점 지쳐갔다. 마음을 다독이고 다짐하였지만, 현실과의 괴리에 슬그머니 꽁무니를 내려놓았다. 맥없이 무너지는 각오가 허탈하고 씁쓸하여 괴로웠다. 대양을 누비고 싶은 원대한 꿈을 가졌던 동생을 법조인으로 안내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고향 바다를 떠올렸다. 바다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파도가 푸른 갈기를 세우고 달려왔다가 거친 숨을 뱉으며 백사장에 스러졌다. 탕탕한 햇볕에 햇미역이 소금기를 꾸역꾸역 뿜어내며 갯바람에 몸을 말렸다. 몽돌이 구르는 소리와 갈매기 노래에 귀를 내주고 갯내와 해국의 꽃향기가 마음을 움켜잡았다. 휘뚜루마뚜루 뛰어놀다가 낯선 익숙함이 버무려진 바다를 바라보곤 하였다. 꿈과 희망을 품게 했던 바다는 추억의 한 자리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상심한 마음을 달래려 등대를 찾았다. 짙은 안개가 가득 찬 바다는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칠흑 속에 등명기가 깜박이고 있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삶을 건져 올리는 배가 걱정되었다. 그때 ‘뚜우-’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적霧笛이었다. 안개 자욱한 바다에서 배의 충돌을 막기 위해 내는 고동 소리였다. 밤바다보다 더 위험한 안갯속 뱃길을 인도하는 음파 표지였다. 두려움의 바다에서 희망을 속삭이는 거룩한 신호였다.

갯바위에 앉았다. 해무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회한의 시간이 일렁이고, 지난 시간의 그리움이 밀려왔다. 우뚝 솟은 등대가 청잣빛 하늘과 코발트 빛 바다가 만나는 소실점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미지로 떠나는 꿈과 낭만을 응원하는 눈길이었다. 굽이치는 파도에 켜켜이 묵은 삶의 비늘을 털어냈다. 육지의 초록 신호등은 안전을 상징하지만, 바닷길의 초록 등대는 암초가 있으니 피해 가라는 의미다. 암초, 암초가 문제였다. 윤슬에 동생의 모습이 출렁거렸다. 새침데기 파도가 말을 걸어왔다. 초록색 등대를 세우라고 으밀아밀 속삭였다. 다시 등대의 역할을 떠올렸다.

* 산가늠 : 섬과 섬이 겹치는 각도와 거리를 따져 어로 포인트를 정하고, 절기마다 가늠해둔 여러 조건을 기억해두었다가 어로에 임하였다.
/ 제10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박지에 피는 꽃 / 김순경  (0) 2023.06.18
활자나무 / 이승애  (4) 2023.06.18
철의 인문학 / 김경아  (0) 2023.06.18
어탁(語拓) / 제은숙  (2) 2023.06.18
대청, 골목을 모으다 / 이춘희  (0) 2023.06.1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