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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철의 인문학 / 김경아

부흐고비 2023. 6. 18. 11:37

아들이 손을 흔들었다. 얼마 전 직장을 따라 타지역으로 나간 아들을 보며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열차가 플랫폼을 떠나 소실점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열차가 밟고 지나간 평행 레일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오늘 나는 철길 위에 이별의 시詩 한 소절 뿌렸다.

돌아오는 길, 하늘로 솟은 건물들이 압도적이다. 건물들은 저마다 높이를 자랑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옆에는 새로운 빌딩이 철을 수직으로 세우며 높이 치솟는다. 철은 이 시간에도 강인한 힘으로 문명을 드높인다. 철이 있어 우리는 하이테크 문명을 구가한다. 가히 신철기시대라고 할만하다.

철철철, 철이 넘칠수록 인간은 번영을 누렸다. 철을 화덕에 넣어 빨갛게 달구고 두들기고, 그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인간도 강인해졌다. 철기로 무장한 부족은 강자가 되었다. 힘이 약한 부족을 정복하면서 마을을 파괴하고 오만과 탐욕의 피를 뿌렸다. 철의 연금술이 뛰어난 집단이 곧 문명이라는 명제가 진리였다. 그렇게 인류는 철과 함께 역사를 써내려 왔다.

철은 평화를 일구는 도구도 되었다. 돌을 떼고 돌을 갈아 쓰던 인간에게 철은 혁명이었다. 낫, 볏, 보습, 쇠스랑, 철로 쟁기를 만들어 논밭을 갈았다. 철의 힘이 더해지자 수확은 급속히 늘었다. 자식들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고 옆집 일손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수확한 곡식은 옆집의 옆집과 어우렁더우렁 나누어 먹으며 살았다.

철은 당연한 것처럼 주변에 흔하게 있다. 그래서 무관심했던 철을 다시 생각한다. 광석에 녹아 있는 철도 녹이지 않으면 그냥 돌의 부분일 뿐이다. 용광로에 녹여 하나로 뭉치고 다시 녹여 쓸모대로 가공해야 가치가 살아난다. 철은 망치로 얻어맞고 불에 달궈지면서 더 강하고 더욱 탄탄해진다. 철은 인고의 과정을 지나온 만큼 도도하다.

철은 차갑다. 철문, 철창, 칼, 발음으로도 차가운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철은 그 누구보다 뜨겁게 태어난다. 뜨거운 화덕에 들어가 한 번 데워지면 쉬이 식지를 않는다. 철은 달구고 식히는 동안 속에는 따뜻한 품성을 지닌다. 그래서일까. 철은 도구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영역으로 뻗어나갔다.

도도해 보이는 철이 길게 누우면 길이 된다. 강물 위로 몸을 눕혀 강을 건너뛰게 하고, 늪 위로 몸을 구부려 늪을 가로지르게 한다. 산은 입을 벌려 길을 받아들이고 제 등을 내어주며 길을 낸다. 뭍과 섬을 이어 외롭지 않게 하고 도시와 촌을 이어 사람이 흐르게 한다. 나란히 누운 길은 또 다른 징검다리가 되어 부와 가난을 잇는다.

철길이 지나는 마을마다 역이 생겼다. 마을과 마을, 마음과 마음이 철길 위를 오갔다. 해가 뜨는 시간이 아침이고, 해가 지는 시간이 저녁이던 사람들에게 역은 시간과 시간을 맞춰주었다. 도시와 농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고장의 특산물을 다른 고장에 소개하며 사람과 사람을 이었다. 대야 가득 곡식을 싣고 간이역에 내려 팔러 가던 장수들에게도 나슨하지 않도록 끈끈한 줄을 연결해주었다. 먼 소식도 철길을 타고 왔다. 돈을 벌어 돌아오겠다고 먼 객지로 떠난 아들의 ‘부모님 전상서’가 밤길을 달려왔다. 그러면 ‘객지에서 몸조심하그래이’ 답장이 달려갔다. 집을 나간 삼촌 소식도 오는 사람을 통해 풍문처럼 들려왔다. 떠남과 기다림과 만남이 있는 플랫폼에는 늘 눈물과 설렘과 기쁨이 교차했다.

간이역이라는 마디마다 사연이 깃들었다. 어머니는 객지로 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아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이별은 눈가에 촉촉한 이슬을 남기고, 환한 미소를 남기고, 별 같은 수다를 남기고, 잊지 못할 바람을 남겼다. 아날로그 간이역 마디와 마디, 길을 오가는 정한情恨의 문장들이 철길 위에 뿌려졌다.

이제 간이역도 분주함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었다. 어깨의 봇짐도, 수채화 같았던 감성도 짐을 내려놓았다. 귀퉁이 낡은 벤치에는 한낮의 태양 같은 마음도 하나 앉았다 가고, 꽁꽁 언 겨울날 같은 시린 마음 하나도 앉았다 간다. 간이역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쌍화차 한 잔 건네고 싶다. 또 누군가를 만나면 평행 레일 위에 나란히 서서 두 손을 잡고 소실점까지 걷고 싶어진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철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철학이 있다. 무사는 함부로 베지 않는다는 칼의 철학을, 농군은 벨 것만 벤다는 낫의 철학을, 대장장이는 만 번을 두드려 명기를 만든다는 장인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식솔의 숟가락을 쥔 아버지는 배 고픈 녀석 먼저 먹인다는 배려를, 바느질하는 어머니는 해진 마음까지 깁는다는 마음을 가졌다. 마음속으로 불러들인 철의 가치는 그렇게 정신문화로 승화했다.

철로 된 건물이 수직이라면 철로 된 길은 수평이다. 수직은 창문을 거는 밤 같지만 수평은 창문을 열어 펼치는 아침 같다. 절벽 같은 수직을 강물처럼 수평으로 눕혀 철길은 숱한 삶의 문장을 헹궈내고 흘려보낸다. 떠나고 돌아오는 길 위에서 인간은 기나긴 소설을 쓰고 번뜩이는 시를 쓰기도 하면서 삶을 녹였다 굳혀갔다.

아들과의 이별을 통해 나는 철길 위에 만남의 시를 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직 아들을 보내지 못한 내 마음이 작은 꽃씨가 되어 말갛게 터져 나온다. 나도 함께 철길을 달리며 써 내려간 가슴의 시는 길이 되어 독자에게 달려간다.

몇 달 후, 아들은 평행선을 타고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온다. 그러면 따뜻한 차 한 잔 나누며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눌 것이다. 새로운 문명을 체험하는 아들을 기다리며 나는 철의 인문학을 또박또박 써내려 간다.
/ 2022 포항스틸에세이공모전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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