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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온 세상이 꽃길이다. 고인쇄박물관 뜨락에도 봄꽃잔치가 벌어졌다. 모닥모닥 핀 영산홍이 온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삼색제비꽃, 흰색 철쭉꽃, 낮달맞이꽃도 저마다 꽃술을 치켜올렸다. 푸르른 하늘 허공에 상형문자가 만화방창 찍혔다.
꽃을 눈에 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금속활자 조형물 ‘직지’가 눈길을 끌었다. 활자 장인이 오 년여 간 피나는 노력 끝에 복원한 금속활자이다. 전시관에는 직지와 시대별 인쇄문화 및 한국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활자의 제작과정, 인쇄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감상하니, 삶을 바꾸기 위해 혼을 쏟아낸 선조들의 숨결이 깊게 느껴졌다.
천천히 돌아보는데, 특이한 모양을 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원통형 나무 모양에 작은 솔방울 같은 것이 다닥다닥 열려 있었다. 하나는 색깔이 거무스름하면서 쇠붙이 같고, 하나는 누런빛에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졌다. 저것은 무엇에 쓰이는 물건일까.
낯선 물건에 눈을 가까이 대고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굵고 단단한 기둥에서 곧게 뻗어 나온 가지에는 활자가 송이송이 피어있었다. 가만 보니 금속으로 만들어진 활자나무와 밀랍으로 만든 활자나무였다. 한 자 한 자 새겨진 활자는 냅뜰힘이 많은 장정을 닮았다. 쇠의 견고함과 글자의 단호함이 서로 맞물린 금속활자 나무는 보기에도 옹골찼다. 글자들은 하나같이 위를 향했다. 저 글자를 뚝뚝 따서 조합하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될 것 같았다.
금속활자전수교육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침 장인이 주물사주조법으로 활자를 만드는 방법을 시연하고 있었다. 장인은 양각으로 새긴 어미자를 거푸집에 놓고 갯벌 흙을 채워 자국을 내었다. 주입구에 쇳물이 들어갈 수 있는 탕도와 글자에 쇳물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가지쇠를 만들었다. 거푸집을 덮을 뚜껑에도 거푸집과 같은 방법으로 갯벌흙을 채우고 쇳물이 들어갈 수 있는 홈을 팠다. 거푸집을 덮어 단단하게 조인 다음 설설 끓는 쇳물을 부었다.
잠시 식힌 다음 거푸집을 열었다. 흙과 불, 쇠의 인연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활자 나뭇가지 끝에 꽃이 만발하였다. 장인이 나뭇가지 끝에 핀 꽃을 하나씩 따서 말끔하게 다듬으니 온전한 활자가 되었다. 활자를 조판에 가지런히 놓은 뒤, 유연묵을 묻히고 그 위에 한지를 놓고 인체로 골고루 문질렀다. 다음 한지를 떼어내자 선명하게 찍힌 활자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인이 활자 나무에 꽃을 피우는 의식은 조심스럽고도 정성스러웠다. 활자를 위한 오체투지, 신성한 노동의 땀이 그를 적셨다. 의식이 끝나자 그는 허리를 펴고 땀을 닦았다. 거푸집을 열고 꽃이 활짝 핀 활자 나무를 들어 올릴 때, 장인의 표정은 의연했다. 1,200℃의 쇳물과 장인의 염원이 빚어낸, 쇠붙이와 이타심이 합쳐져 만들어진 활자꽃이다.
내 안에서 뜨거운 무엇이 솟구쳐올랐다. 벌겋게 일렁이다 옹골차게 굳은 쇳물이 피워낸 활자 꽃을 보자 600여 년 전 문명의 꽃을 피웠던 문물의 시원이 내 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안에 깊이 새겨진 인류애와 장인의 열정과 쇠의 순종이 있었기에 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예전에는, 지식과 정보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활자가 발명되고 책이 하류층으로 보급되면서 바야흐로 무지의 둑이 허물어졌다. 닫혀있던 세상이 서서히 열리자 계급도 무너졌다. 성장을 거듭하며 정치, 사회, 문화, 역사, 철학, 종교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차갑게, 때로는 뜨겁게, 쇠의 힘은 인류의 가슴에 녹아들어 문명의 꽃을 피웠다.
활자나무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새벽닭 울음소리에 맞춰 소식을 전하는 신문도 더는 활자를 쓰지 않는다. 활자는 소임을 다했지만, 장인은 활자 나무에 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고 쇠붙이는 펄펄 끓어오르고 있다. 벌건 쇳물이 흘러 들어가던 탕도와 그 길로 뻗어나간 가지쇠 그리고 가지 끝에 핀 꽃을 보는 내내 가슴이 뿌듯했다.
갓 태어난 활자 꽃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장인의 피와 땀 그리고 설설 끓어오르던 쇳물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쇠붙이는 불을 순순히 받아들여 불을 품었고, 불은 쇠 속으로 들어가 합일을 이루었다. 쇠의 숭고한 용해와 불의 열망이 피워낸 활자꽃 속에는 무한한 힘이 담겨있다.
며칠 자판을 두드려도 글길은 사막을 걷는 것 같았다. 머리를 쥐어짜며 휘두른 펜에선 헛꽃만 피었다 스러졌다. 조바심이 났다. 이대로 문충文蟲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싶어 밤잠을 설쳤다. 눈시울을 붉히는 날이 허다했다. 어쩌다 생각이 고여 펜을 잡으면 신기루처럼 아득히 사라졌다. 꽃눈 하나 틔울 수 없어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활자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저 작은 활자나무가 꽃을 피우기까지 수없는 좌절과 절망이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쇳물 같은 붉은 열정과 뜨거운 가슴이 있었기에 활자나무 기술이 완성되었고, 조합된 활자는 책을 찍어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활자나무를 만드는 장인의 정신이 있다면 나도 언젠가는 글꽃을 피울 수 있겠지. 쇠가 달구어져 활자꽃을 피우는 시간을 통해 나는 모자란 열정을 충전한다.
활자꽃, 그 문화적 자부심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장 앞에 서니 책장에 꽂힌 책들이 온통 꽃나무로 보였다. 욕심이 넘쳐 샀지만 표지도 넘기지 않은 인문학, 읽다가 덮어버린 수필집, 팽개친 책 속에 핀 마음의 꽃들이 궁금했다. 책 서너 권을 빼 들고 책상에 앉았다. 한 권씩 펼칠 때마다 활자꽃이 길을 열었다.
나는 지금 활자꽃이 만발한 꽃길을 읽고 있다. 그윽한 문향에 마음도 취한다.
/ 2022 포항스틸에세이공모전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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