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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꽃을 세우다 / 조현숙

부흐고비 2023. 6. 18. 11:52

저기서 꽃 무더기가 걸어온다. 포개고 또 포갠 꽃숭어리들을 한 아름 안은 엄마가 만삭의 임부처럼 뒤뚱거린다. 꽃들이 앞을 가리고 잎사귀가 눈을 찌른다. 화사해서 더 가늠이 안 되는 무게가 묵직하게 배를 타고 내려간다. 그래도 씨억씨억 잘도 걷는다.

염천의 햇발이 자글거려도, 엄동의 된바람이 칼춤을 추어도 기어이 희붐한 새벽길을 열어 꽃 떼를 몰고 간다. 동살 아래서 분홍, 오렌지, 보라, 연노랑 꽃주름이 일렁인다. 사람들이 꽃을 본다. 꽃만 본다. 깍짓동만 한 무더기에 가려 발은 보지 못한다. 꽃들이, 댕강 잘린 발목으로 그들의 꽃밭을 떠나왔음도.

꽃집 앞에서 망설인다. 꽃 선물을 좋아하지 않으니 사는 일도 거의 없다. 그래도 작정하고 나선 길이다. 통유리문으로 꽃꽂이를 하는 여자가 보인다. 연분홍 거베라 줄기를 들어 밑동을 자르고 침봉에 꽂는다. 순간, 장딴지가 찌릿해진다. 저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침봉의 날 선 촉감이 따다다닥 퍼진다. 친정집 창고 방에서 먼지를 껴안고 층층이 쌓여 있는 수반과 녹슨 침봉들이 부스스 몸을 일으켜 나를 끌어당긴다.

손을 담글 때마다 수반의 물이 차란차란 차오른다. 엄마가 침봉에 꽃을 꽂는다. 그것은 뿌리가 잘린 꽃을 반듯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어떻게 뻗어나가든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일이다. 흙과 식물의 뿌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산다. 뿌리가 흙을 붙잡지 않으면 흙은 바람에 날리고, 흙이 뿌리를 움켜쥐지 않으면 뿌리는 새들거린다. 그런 흙도, 뿌리도 없다면 날카로운 침봉에라도 서야 할 일이다. 수반의 물을 움켜쥐고 뼈로, 핏줄로, 오장육부로 보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꽃들을 일으켜 세우고 활짝 피어나도록 받쳐주는 손길에는 자비가 없다. 쓰러지거나 기울지 않도록 단련하는 혹독함만이 있다. 차고 날카로운 침 위에 서는 맨발은 언제나 처연하다. 그래서 엄마의 꽃꽂이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을 이고 촉촉한 흙에 발을 묻었던 시간을 떠올린다. 환한 햇살만 있던 것도 아닌데, 폭풍우를 가려주고 벌레를 잡아주던 다정한 손길만 있던 것도 아닌데, 때때로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를 싹둑 잘라 그 꽃밭을 떠났다. 뿌리째 뽑을 순 없었으리라. “제가 가진 멋대로 자라게 두어야지.”,“스스로 빛살과 해충과 비바람을 견디며 뿌리를 키워나가고 자유롭게 가지를 넓혀가도록 해야지.” 남의 일에는 입바른 소리도 쉽게 내는 법, 사람들의 허랑한 말씀들이 무겁고 아프기도 했겠다. 엄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어쩔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자유롭게 날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변명처럼 말했다.

그렇다고 상처가 사라질까? 아물기도 전에, 새살이 돋기도 전에 후벼파는 침봉 위에서 상처는 덧나고 더 시렸다. 차라리 말라버리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힘을 줄수록 침봉에 꽂힌 발은 허전하고 헛헛했다. 원래 뿌리가 있었던 사실을 아니까. 뿌리가 남아있는 그 꽃밭으로 가서 다시 흙 속에 발을 묻고 싶을 때도 있었으니까.

꽃집 주인이 밖을 내다본다. 눈이 마주칠까, 나도 모르게 움찔 고개를 돌린다. 오래전, 한적한 주택가에서 꽃집을 하던 엄마도 그렇게 자주 밖을 내다봤다. 팔리지 않는 꽃들이 목을 떨굴 때마다. 이슬 같은 생이나마 장하게 살아내고 마침내 땅에 누운 그들에게 잘 가시오, 인사를 건넬 때면 나는, 내게 묻곤 했다. 추레한 통속의 삶이어도 기어이 빳빳하게 허리를 세우던 엄마에게 꽃숭어리들은 지옥이었을까, 천국이었을까.

“북구문화회관에서 공연해요. 선생님 집 근처니까 꼭 오셔야 해요. 보고 싶어요.”

대학 입학해서 처음 참여하는 뮤지컬이라고 아이는 한껏 들떠있었다. 걸핏하면 집을 나와 애를 먹이던 아이였다. 담임인 나는 아이를 귀가시키기 위해 서글픈 내 유년의 역사까지 들먹이고 말았는데 아이는 어느새 번듯한 대학생이 되었다. 가끔 보내오는 메시지에는 벋나지 않고 잘 버텨준 시간이 보인다.

꽃꽂이는 생계의 수단이고 위로와 축하, 헌화와 장식이기도 하지만, 상처와 결핍으로 흔들리는 존재들이 정처를 찾아 헤매는 것을 보면서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가출 청소년들을 품어주고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들이나 수십 마리 유기견을 돌보기 위해 당연한 일상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이들이야말로 침봉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에 치이고 삶에 꺾인 꽃들이 똑바로 설 수 있도록 온기를 주는 사람들. 존재 이유, 꿈 많은 소녀, 나의 불안을 진정시켜주세요. 이런 꽃말을 들어주는 사람들. 화사한 꽃에 가려진 침봉처럼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저 묵묵히 안아주는 사람들.

세상의 숨탄것들에 어디 만만한 생이 있던가. 어디에 뿌리를 내렸건 절로 생긴 건 없다. 겨우 호리만큼의 인연으로 뿌려졌어도, 썩지 않고 싹을 틔우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은 자로도, 저울로도 잴 수 없을 길이와 무게일 것이다. 피우고 터트리느라 저도 어쩔 수 없는 생 몸살은 또 얼마나 앓았을 것인가. 하물며 사시랑이 발목이야. 그 여정을 꼿꼿하게 갈 수 있도록 침봉은 그렇게 날을 세우는 것이다.

퍽퍽한 땅을 파헤치는 등 굽은 호미가 아니라서 찔리고 휜 손은 보지 못했을까. 여리여리 고왔던 엄마 손은 꽃 때문에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손가락 관절염을 달고 사느라 밤마다 앓는 소리를 낸다. 꽃에 매달려 사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꽃이 아닌 작물을 내다 팔았으면 애처로웠을까. 채소는 씹어 삼키기라도 하지, 밥이라도 되지, 그렇게 뾰족하게 내밀고 달려드는 내 가시에는 또 얼마나 찔렸을까.

대학교 2학년, 등록금 마감 시간을 겨우 몇 분 남겨두고 정신없이 달려오던 엄마는 봉두난발에 맨발이었다.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꼴로. 살면서 그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그때는 몰랐다. 자식 넷이 벗나가지 않도록 그렇게 다잡아야 했음을. 자식들의 발을 침봉 위에 놓을 때 엄마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세상은 그보다 차고 서럽고 무섭고 아픈 곳이니까. 침봉처럼 강하고 수반처럼 단단한 어미가 되지 않으면 자식들을 세상에 번듯하게 내놓을 수 없을 테니까.

다감한 말 같은 거 빈말로도 못하는 엄마에게 허기를 느낀 적도 많았지만, 사랑의 모습이 그뿐일까. 다시 뿌리를 내려주느라, 새살이 돋게 하느라 곤고했던 시간을 이젠 안다. 엄마에겐 꽃을 꽂는 일이 지옥 위에 천국을 세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피고 지는 꽃밭만 이야기하느라 그 꽃밭을 나온, 나올 수밖에 없던 꽃의 얘기를 듣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시린 발을 어루만져주고 벗나가지 않도록 살펴보았나. 선생으로서 그런 심지心志만은 가지려 했던 것도, 엄마의 심지心地는 웅숭깊다는 걸 은연중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월급을 고학생에게 몽땅 내어주고 두 시간 넘게 걸어서 일터를 오가던 남동생을 떠올리면 시린 발을 침봉 위에 꼿꼿하게 세웠던 세월이 그리 아프지만은 않다.

꽃집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돌아보는 주인의 얼굴이 환해진다. 작은 꽃다발 하나 만들어 나오니, 저기서 꽃 한 송이가 걸어온다. 푸석거리는 생을 쇠심줄로 살아온 꽃의 맨발이 씨억씨억 걸어온다. 나도 꽃을 향해 걸어간다.
/ 2022년 흑구문학상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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