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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머리 지도 / 홍윤선

부흐고비 2023. 6. 25. 20:58

나무들이 호수에 물구나무를 하고 섰다. 안동호에 물결이 일렁이면 반영은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낮은 산성을 옆으로 끼고 양쪽 동네를 잇는 부교가 호수면 위에 표표히 늘어져 허청댄다. 안동선비순례길이 물 위에 떠 있는 선성수상길을 가로지르며 첫길을 수굿하게 열고 있다. 마을 간 줄다리기라도 있었던 걸까. 겨루기를 끝내고 이제 막 내려놓은 굵은 밧줄 같다. 운동회가 한창일 가을날이다. 나의 물그림자를 나무들 사이에 세운다. 구름덩이 서너 점과 섬 같은 산과 설핏 물든 단풍들이 정물처럼 고요한데 물비늘에 뜬다리가 꿀렁인다. 나도 따라 속이 울렁이고 눈이 뱅그르르 돈다. 작은 여파에도 통째로 휘둘리고 만다. 이럴 땐 멀리 보아야 한다. 세상이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흔들리는 것이라고 나만 멈추면 된다고 난간을 힘껏 붙잡았다.

​ 물 아래 긴 역사를 가진 예안마을이 있다. 선성은 예안면의 옛 이름이다. 반세기 전 안동댐을 만들면서 시간과 더불어 수장되었다. 들여다보아도 빛이 차단된 무채색 마을은 수심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머리 위로 기러기 떼 날아갔던 하늘, 비행운이 흰 선을 그었던 흔적을 따라 다리가 놓였고 순례객들은 발밑에 호숫물과 사라진 마을을 두고 걷고 있다. 그들 중에는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온 이들도 있겠지. 내가 멈추어 선 데는 예안국민학교가 있던 곳이다. 박제된 풍금과 오래된 사진 몇 점만이 찬란했던 뭍에서의 시절을 회상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운동장에 만국기가 펄럭인다. 까까머리 남학생 예닐곱이 출발선에서 화약 총소리를 기다린다. 긴장한 종아리와 날 선 허벅지 위로 바람을 가를 두 팔이 예리하다. 저 눈빛의 속도라면 시공간을 뚫고 나와 물 위를 뛰고도 남겠다. 저러다 갈릴리 호수까지 갔다 오는 건 아닌지 상상이 경계를 넘는다. 결승선을 통과한 승자의 표정에서 올림픽 월계관에 버금갈 영광이 묻어난다. 여학생 둘이 매달리기를 하며 철봉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무게를 줄일 요량으로 신발도 벗었건만 한 친구는 벌써 팔이 반쯤 풀렸다. 개구진 남자애들도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지켜본다. 그날을 마무리했을 교가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 중력을 거스를 수 없듯 예정된 수몰을 미루지 못했으리라. 쥐고 있던 막대기를 맥없이 놓은 아이들처럼 사람들은 만부득이 여기를 떠났을 것이다. 이제 물고기 떼가 교실을 누비고 다니겠지. 흑백의 사진은 색이 빠지고 모서리가 닳아 희부연해진 마을 사람들의 기억과 닮았다.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조각도로 급히 파내다 일부는 깜박해버린 먹빛 판화처럼도 보인다.

​ 마을 전경을 찍은 흐릿한 사진 옆에 또렷한 그림지도가 나란하다. 선성산 아래 예안국민학교와 면사무소, 그 앞으로 우시장과 양주장과 옹기전이 낙동강 물길을 따라 줄지었다. 시간을 붙들고자 길을 넣고 색깔을 입히고 이정표를 적어 종이에 그렸으나 폐동 주민들은 결국 그들의 머리에 새겼을 것이다. 언제라도 다시 찾아가려는 듯 머리 지도로 선명해졌으리라. 수몰 마을의 퇴락한 모습조차 건져내고 싶은지 못다 한 이야기가 호수 위 고깃배의 어화漁火처럼 어룽어룽 떠다닌다.

​ 예안마을 그림지도 위에 또 하나의 지도가 겹쳐진다. 한반도의 남쪽은 잘려서 없고 상반신만 있는 북한 지도가 시댁에 있다. 시어른 두 분은 이북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이다. 갈 수 없는 금기의 장소, 북한은 지워져야 마땅했다. 과거는 책으로 배웠고 현재는 뉴스로만 접할 수 있다. 물고기의 세계가 된 예안마을처럼 사사로운 일상에서 없어진 땅덩이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반쪽 지도는 테이프에 의지해 견디기가 버거워 여러 차례 떨어졌다. 접착제가 말라붙은 가장자리는 부질없는 세월 자국으로 누르퉁퉁하다. 그것은 팔과 다리를 생략하고 조각한 아버님의 토르소 같다. 힘에 부친 듯 가까스로 벽에 매달려 묵은 기침을 뱉어낸다. 저 종이지도는 소용없는 희망과 함께 점점 퇴색되어 가지만 구순이 넘은 아버님의 머리 지도는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함경남도 북청을 찾아 손으로 동그라미 여러 개를 그린다.

​ 나에게도 머리 지도가 있다. 그림으로 기록하지 않아도 지도에서 찾을 수 없어도 이미 온몸에 각인된 골목길이다. 드난살이 끝에 어머니가 자식 넷을 데리고 첫 집을 장만해 당당히 걸어 들어왔을 주름 깊은 고샅, 그리고 내가 태어난 푸수한 집.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가 탁주를 한 사발 마시고 흥얼거리며 큰집으로 올라가던 등 굽은 두름길. 건넛집 왕벚꽃과 황매화 꽃숭어리가 언제 화르르 피어나는지, 어느 집에서 석류와 무화과가 입을 쩍 벌리는지, 누구네 텃밭에 배추와 부추가 우북수북 자라는지, 앞집 여주 덩굴은 슬금슬금 어디로 뻗어나가는지 눈으로 선연하게 그릴 수 있다. 식구들을 기다리며 까물까물 잠들었다 깨어나 동트는 아침인지 어스름 저녁인지 분간이 안 돼 그만 울어버린 어린 날. 한길까지 심부름 가야 하는 밤에는 눈을 감고 내달려도 끝이 없던 후밋길이 젊은 어머니가 나무널 타고 누워 나가실 때는 왜 그리 짧았을까.

​ 그곳에 다시 갔을 때 나는 길을 찾지 못했다. 동네를 가로질러 넓은 도로가 생겼고 공터에는 낯선 건물이 들어섰다. 번듯한 집들은 내 머리 지도를 의심하며 비웃기라도 하는 양 묵묵부답이었다. 짧아진 골목만큼이나 마음이 뜯기어 나갔다. 어찌 이리 늦었냐고 꾸짖지 않는 몇몇 옛집만이 구석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발전이면서 동시에 나에게는 폐허였다.

​ 강은 이미 마을을 삼켰고 이념의 선은 아직 단단하여 넘을 수 없다. 그렇지 않더라도 흐르는 세월을 막아서지 못한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도 한 장 거머쥐고 궁벽한 지난날의 흔적을 찾는다. 잔해를 품으려고 한다. 그때를 복기해 한 시절을 의연하게 다시 마주하려는 용기일 게다. 서둘러 떠나느라 충분히 위로하지 못했던 순간을 보듬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시간 앞에서는 누구라도 과거로부터 떠나온 이주민이 되니까. 헛것 같으나 실재했던 애잔한 아름다움이 쇠락 속에 있어 애처롭고 더욱 귀하다.

​ 안동호의 물이 바다로 흘러 시어른의 북청과 나의 동네와 어떤 이의 고향에 닿아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지도가 만들어지겠지.

// 제13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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