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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날의 추석은 포도와 누나의 향기로 그윽했다. 그때만 해도 내 고향 강화도엔 포도가 거의 생산되지 않았다. 누나는 대나무 바구니 가득, 서울의 시장에서 산 포도를 들고 고향집을 찾았다. 남정임 윤정희 같았던 머리, 소매가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투명했던 옷, 그리고 이국의 향기를 닮은 화장품 냄새. 희디 흰 얼굴. 차부에서 내려 고향집까지의 시오리 길을 걷는 동안, 사람들은 문밖에 나와 서울내기가 되어 돌아오는 누나를, 뒷모습이 다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바라보곤 하였다 한다.

누나가 집에 머무는 며칠 동안 고향집은 포도와 누나의 향기로 은은했다.

 

결코, 맹세코 잊을 수 없는 건 포도와 함께 가져왔던 두 개의 라면. 온 식구가 나누어 먹었던 그 라면 맛은 서울이 어떤 곳이라고 떠드는 백 마디 천 마디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황홀한 설명이었다. 누나가 돌아가고 나면, 포도와 화장품과 라면 냄새만 사라졌던 게 아니라, 엊그제까지 보이던 마을의 옥분이, 근임이, 정숙이 누나까지 사라졌다. 마을의 누나들은 그렇게 하나둘, 나중에는 모두 사라졌다. 그러곤 내 누나처럼 그들은 추석 때 포도와 라면을 사 들고, 다소 요란한 모양의 서울내기가 되어 고향집엘 들렀다.

신문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그 누나들의 모습에서 크고 넓은 바깥세상을 겨우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 어머니와 함께 딱 한 번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어두워져서야 누나가 산다는 하월곡동 자취방에 당도했다. 좁고 어둡고 가파른 골목을 더듬듯 올라간 곳엔 세 사람이 앉기에도 비좁은 방이 있었다.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방. 시골집 농기구 헛간보다 훨씬 작고 낮고 옹색한 집들. 라면이나 실컷 먹어보자던 기대는 깨끗이 사라지고 무작정 눈물이 나왔다.

크고 넓은 바깥세상이 아니었다. 누나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 뒤로 누나는 사라져 추석 때마저도 고향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어머니는 딸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헤매며 수소문한 끝에 인천의 어느 공장 숙소에 몸져누운 누나를 데리고 왔다. 번 돈도 없고, 그나마 약값으로 다 써 버려 차마 고향에 올 수 없었어요. 그때 누나가 한 말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커다란 손으로 누나의 등짝을 후려치며 눈물을 훔쳤다.

 

겨우 몸을 추스른 누나는 다시 대처로 나갔지만, 그곳이 나에겐 더 이상 밝고 넓은 바깥세상이 아니었다. 돈이 없으면 빠져나올 수조차 없는 갇힌 세상이었다.

서울 집에서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서둘러 고향 선산을 향한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고 코스모스가 한들거린다. 이제 나의 바깥세상은 고향이다. 그곳에 선산이 있고, 아직 몇몇 친척이 살고, 수백 년 된 마을의 회화나무 그늘이 여전히 무성하여 참으로 다행이다.

무엇보다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고맙다. 크게 숨 쉴 수 있다. 예전엔 가고 싶어도 쉬 가지 못했던 바깥세상이 서울이고 대처였다. 지금은 고향이, 고국이, 가고 싶어도 쉬 갈 수만은 없는 바깥이 되었다.

실업자와 취업 준비생들, 비행기표와 긴 휴가를 얻을 수 없는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은 시원한 고향길과 가을꽃을 꿈에서밖에 그릴 수 없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바깥으로 바깥으로 나가던 누나는 지금 저 작은 섬나라 사이판에 서 살고 있다. 하지만 누나가 끝내 크게 숨 쉴 바깥은 이제 고국이고 고향이 아닐까. 가족이 아닐까. 추석이 되어 나는 소망한다. 나 자신, 누군가의 바깥이 될 수 있기를.

추신: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남자인 내 입장만 생각한 것 같다. 남자 들이야 아무리 귀성길이 멀어도 자기 고향이니 그렇다 치겠지만, 여성들은 뭔가? 그녀들도 추석엔 어쨌거나 그녀들이 나고 자란 시원한 바깥, 친정엘 반드시 가야 한다.
// 조선일보, 2008.9.12.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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