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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느 여름날의 스케치 / 김학

부흐고비 2023. 6. 25. 20:43

염천의 개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앞집 옥상의 빨래가 갑자기 무녀(舞女)의 치맛자락처럼 펄럭이기 시작한다. 찌는 듯하던 여름밤의 무더위가 슬그머니 뒷문을 박차고 꽁무니를 뺀다. 혁명군인 양 치달아온 바람이 고요한 누리에 파문을 일군다. 뜨락의 나무들은 바람의 위세에 눌려 저마다 아부의 깃발을 흔든다.

키다리 백목련은 무당춤을 추어대고, 분기(分器)에 발을 담근 대나무는 나긋나긋 승무를 춘다. 수줍음을 타던 백합은 사근사근 어깨춤을 추어대고, 대추나무․은행나무․모과나무․사과나무․감나무․백일홍은 디스코를 춘다.

어느덧 우리 집의 손바닥만 한 뜨락은 무도장이 되고 말았다. 바람이 한눈을 팔면 몸놀림이 느슨해지다가 바람이 다시 눈을 부릅뜨면 어느새 춤동작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바람에 놀아나는 나무들의 작태다.

우스개 같은 어느 직장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탁구를 좋아하는 실권자가 부임을 했더란다. 그러자, 틈만 나면 직원들은 탁구장으로 몰려들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르자, 그 실권자는 테니스 코트를 드나들었다. 또,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 새로운 실권자가 부임했고, 그 새로운 실권자는 축구를 즐기는 분이었다. 직원들은 탁구나 테니스는 외면하고 축구장을 찾기에 바빴다. 월급이 적다는 불평은 접어둔 채 그 박봉을 털어 유니폼을 맞추어 입고 뻔질나게 운동장을 찾았다. 자리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실권자의 기호에 따라 몰려다녔다. 마침내는 퇴근 시간을 앞당기면서까지 축구장 찾는 게 예사롭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오래지 않아 그 회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바람에 희롱당한 나무와 무엇이 다르랴.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쏟아지는 속도가 금세 중중머리를 건너뛰어 휘몰이쯤에 이른다. 바람의 눈치를 살피며 춤을 추던 나무들이 이번에는 관현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나뭇잎의 넓고 좁음, 두껍고 얇음에 따라 빗방울 부딪는 음향이 실로 다르다. 뿐만 아니라 내리는 속도나 빗방울의 크기에 따라 음색도 달라진다.

어둠을 뚫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지붕에도, 장독에도, 돌멩이에도, 인도 블록에도 비가 내린다. 빗방울은 그 자신이 부딪치는 대상에 따라 다른 음색을 낸다.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의 손놀림에 따라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연주되듯이.

다양한 소리들이 어울려 대자연의 합주를 이룬다. 오선지에 기록조차 할 수 없으니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생음악인 셈이다. 지금 우리 집 뜨락에서는 빗방울이 연주하는 경음악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빗방울의 연주 솜씨가 새삼 놀랍다.

시침이 자정의 고개를 엉금엉금 기어오르고 있는데도 비는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수구로 빠지는 마당가의 물줄기가 도랑이 되어 흐른다. 우르릉 쾅쾅! 천둥과 번개가 고즈넉하던 밤의 적막을 깨트린다. 빗방울의 연주가 절정에 다다른 모양이다. 순간, 오싹하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누에의 뽕잎 갉아 먹는 소리 같던 빗방울의 연주가 갑자기 총탄이 작렬하는 전쟁터의 소음으로 엇바뀐 탓일 게다.

해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달님마저 그를 따르던 궁녀, 별무리를 이끌고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채 기세가 당당하던 비가 다시 성깔을 누그러뜨린다. 더불어 나는 두려움의 사슬에서 풀려난다. 언뜻 시계를 보니 시침은 새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비가 멎는다. 비가 멎었다. 배음(背音)인 양 들려오는 간헐적인 차량의 발자국 소리만 없다면, 산사의 적막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나무들의 모습이 한결 더 푸르고 싱싱해 보인다. 목욕탕에서 갓 나온 열아홉 살 큰 애기의 자태처럼 풋풋하다. 자르르 윤기가 흐른다.

바람과 빗방울이 철수한 뜨락엔 또다시 평화가 샘물같이 솟아오르고 있다. 흘금흘금 눈치를 살피며 춤을 추지 않아도 되고,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음악을 연주하지 않아도 된다. 나무들은 원래의 자유를 되찾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좁은 뜨락의 나무들에게서 힘 있는 자에게 우롱당한 민초(民草)들의 슬픈 역사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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