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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냉면 / 류영택

부흐고비 2021. 3. 26. 14:15

망치질 소리가 들려온다. 바깥에서 형이 두드리는 소리다. 걱정이 된 모양이다. 일을 하다 말고 서둘러 답신을 보낸다. 탕 탕 탕.

정화조 차량 탱크 용접 일은 긴장의 연속이다. 안과 밖, 형이 두드리는 망치질은 동생이 무사한지 안부를 묻는 것이고. 내가 두드리는 망치질은 망을 보다 말고 어디 가지나 않았을까, 형을 붙들어 두려는 마음에서다.

형과 처음 손발을 맞춘 것은 우리 집 뒤주를 터는 일이었다. 라면을 사 먹기 위해서였다. 긴긴 겨울밤, 꽁보리밥으로 배를 채워서 그런지 몇 번 방귀를 뀌고 나면 이내 배가 고파 왔다.

아무리 우리 것이라고 해도 도둑질은 도둑질이었다. 겁이 났다. 뒤주에 들어가려다 말고 형과 신호를 정했다. 누가 나타나면 두 번, 지나가고 나면 한 번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자루에 곡식을 퍼 담으며 연방 망 잘 보고 있느냐고 물었다. "뭐 그리 겁이 많아!" 짜증 섞인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시작한 곡식 도둑질은 이듬해 봄까지 이어졌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형과 붙어 산다. 집을 나설 때면 형과 내가 먹을 도시락을 싸 들고 가게로 간다.

형은 가게 마룻바닥에 도시락을 펼쳐 놓고 밥을 먹는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편치 않다.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한 번이라도 자신의 앞날을 생각했더라면 최소한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었을 텐데. 망을 보다 말고 화장실에 갔던 것처럼 형은 매사에 진지하지 못했다. 훗날 그게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형은 허구한 날 싸움질이나 하는 사고뭉치였다.

형의 사고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그 많던 문전옥답 다 팔아먹은 것을 생각하면 밉고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도시락밥에 질리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인다. 형이 좋아하는 냉면을 마음 놓고 먹으려면 지난날 뒤주에 들어갔던 것처럼 정화조 통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탱크 용접 일은 뒤주 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겁이 난다. 폐쇄된 공간이 두렵고 메탄가스와 용접 가스에 질식하지나 않을까 무섭다. 적막하기만 한 통 속에 용접기를 들이대는 순간, 번쩍 스파크 불빛과 함께 통 속에 남아 있던 메탄가스가 폭발하는 것처럼 "쩡" 귀청을 울린다. 한두 번, 하루 이틀 해 온 일이 아닌데도 그럴 때면 소름이 확 끼쳐 온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는 형도 다를 게 없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오히려 더 불안해한다. 동생이 질식한 것은 아닐까. 탱크 안이 잠시만 조용하다 싶으면 작은 망치로 철판을 두드린다.

하지만 작업 시간이 길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밖은 느긋하고 안은 불안하다. 치매를 앓는 사람처럼 형은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는지, 통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생은 기억조차도 없다. 망을 보다 말고 가게를 찾아온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길 가는 사람들의 이정표 노릇을 한다. 그런 형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라 작업을 하다 말고 수시로 망치질을 한다. 그래도 밖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쾅쾅쾅" 오함마질을 해 댄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망치질을 해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아마도 형은 통 속에서 쭈그러진 철판을 펴고 있는 줄로 생각한 것 같다. 흔히 있는 일이다. 벌어진 철판 틈새를 메우느라 망치질을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형은 안에서 신호를 보내는 줄 알고 연방 망치질을 해 댈 때도 있다. 몇 번 그런 일이 있다 보니 신호에 무디어진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찌 망치질과 신호를 구분 못하나! 마음이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람이 찾아와도 걱정, 혼자 있어도 걱정이다. 용접기 홀더를 내동댕이치고 통 속을 기어 나온다. 작업등, 고압 호스, 용접기 줄이 널브러진 좁은 통로를 들락거리는 게 여간 성가시지가 않다.

통풍구로 고개를 내밀자 형은 넋을 놓은 채 앉아 있다. 손에 들고 있던 망치마저 떨어뜨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오죽 졸리면 저럴까. 백번 이해가 되면서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덕지덕지 기름이 낀 차체에 용접 불똥이 옮겨 붙어 통 속에서 로스구이가 될 뻔했었던 게 어제 일 같은데 천하태평, 어쩌면 저렇게 배짱 편하게 졸고 있을까." 온갖 한탄을 속으로 삭인다.

"형, 뭐 해!"
고함을 치자 형은 허둥지둥 망치를 움켜잡는다.

작업이 끝나 가자 형에 대한 미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아무리 화가 나도 형을 불평하지 말았어야 했다. 비록 속으로 한 말이지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작업 끝날 시간에 맞춰 음식을 주문한다. 형은 곱빼기 나는 보통. 살얼음이 낀 육수를 벌컥 마시고 내려놓는 형의 냉면 그릇에 넓적하게 썰어 놓은 한 점 돼지수육을 올려놓는다.

"동생 너나 먹지."


형은 자신의 그릇에 담긴 계란을 내 그릇에 올려놓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땜질하여 번 돈으로 사 먹는 음식이지만 이럴 때면 라면을 사 먹던 지난날의 그 모습과 별반 다른 게 없다. 굳이 다른 게 있다면 훔친 곡식과 맞바꾼, 손수 끓여 먹던 라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질긴 냉면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형은 자기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내게 무슨 큰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지켜 주는 수호천사쯤으로 생각한다. 둥둥 떠 있는 토마토 한 점을 형의 그릇에 마저 옮겨 놓는다.

"동생, 이 집 냉면 맛 진짜 끝내 준다."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혼자서는 살아가기 힘든 '업보' 같은 형. 출세한 삶은 아닐지라도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렇게밖에, 더 이상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뒤주에 들어갈 때나 정화조 통 속에 들어갈 때나 제대로 손발 맞은 적이 없는데도, 그래도 망을 봐 줘야 안심이 되는, 냉면발만큼이나 질긴 형과의 인연이 서럽다.

"이 집 냉면 맛 끝내준다." 울컥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벌컥 냉면 육수로 가라 앉힌다.

 

 

고령 ‘빵꾸쟁이’ 류영택 작가 유고 수필집 발간

수필가 고(故) 류영택은 생전 ‘빵꾸쟁이’였다. 8t 트럭의 타이어를 때우는 일이 그의 주특기였다. 한번은 그가 수필 쓰는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호언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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