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판소리에는 귀명창이 있다. 귀명창에는 추임새가 날고 있다. 판소리 공연장에 갔다. 그곳에서 귀명창을 만났다. 부채를 쥔 소리꾼과 북과 북채를 쥔 고수(鼓手) 뿐인 단촐한 무대다. 고수가 엇! 기합 소리를 내며 북채로 타당 탁, 북을 치자, 소리꾼이 춘향가의 쑥대머리 대목을 시작한다. '그때 춘향이는 옥중에서 머리를 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설인 아니리를 한다. 다시 고수가 엇! 타당 탁, 북을 치면 소리꾼은 '쑥대머리~' 하며 본격적인 창으로 들어간다. 고수는 시작이나 변화, 음절마다 박을 치며 '얼씨구' '잘한다.' '좋다' 등 추임세로 소리꾼의 목을 풀고 흥을 불러낸다. 소리꾼의 창과 고수의 추임새에 몸짓의 발림이 어우러지면 조용하던 관중석이 소란해진다. 판소리를..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나는 잠이 많은 편이다. 집안 내력이고 어머니가 으뜸이었다. 손자를 등에 업고 재우다 방바닥에 엎드려 손자보다 먼저 잠든 어머니 모습은 자주 보는 광경이었다. 팔순에 접어든 누님도 잠이 많아졌다고 하소연한다. 가히 잠보집안이다. 닮은꼴이 있다. 농장 구석에 두 평쯤 연못을 만들고 미꾸라지를 넣었는데 온데간데없다. 미꾸라지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다닌다는 옛말이 사실이었던가. 대신 개구리천국이 되어있다. 비단개구리인데 이 녀석들이 잠이 많다. 연못바닥에 까맣게 깔려있던 알집이 도롱뇽인 줄 알았는데 비단개구리였다. 덩치가 큰 참개구리는 다 자라면 인근 풀숲이나 제법 먼 거리로 행동반경을 넓히지만 비단개구리는 그렇지 않다. 밤낮으로 연못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참개구리처..
티브이에서 토크쇼나 인터뷰를 시청하다 보면 자연스레 반말을 섞어 쓰는 경우를 목격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는 괜스레 당사자도 아니면서 ‘왜 반말이람?’이라고 혼잣말을 한다. 상대방이 나이가 어릴 때, 나이가 어린 여성일 때에 반말은 더 자주 목격이 된다. 물건을 판매하는 이가 고객인 나를 포함해 내가 살 물건에까지 표하는 이상한 존칭도 이제는 다반사가 됐다. 어법을 몰라서 그러는 걸로 느껴진다기보다는 어법을 어기면서라도 최대치의 존칭을 써서 고객을 대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느껴진다. 모두가 그렇게까지 존칭을 하면서 상품을 팔기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강박일 것이다. ‘했음’ 같은 식으로 소위 ‘음슴체’도 상용화된 지 오래다. 반말을 하기도 뭣하고 존댓말을 하기도 뭣한 어정쩡한 경우일 때에 사용한다. ..
김소연(金素延) 시인 1967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여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현대시사상》에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7년간의 화이부동…“시어의 뜻 얘기 하느라 밤 새우기도 했죠” [우리는 짝] 부부 시인 함성호-김소연 문학 동인으로 만나 1995년 결혼 시 세계 다르지만 삶은 찰떡궁합 www.hani.co.kr 그래서 /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문수암으로 가는 중이다. 현불사를 지나서 백천계곡 길이다. 기암괴석과 산 그림자는 맑은 물에 모습 드리우고 단풍이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은 화려하고 불타는 듯한 단풍의 물결이 매혹적인 설악산 천불동 계곡 쪽을 많이 찾는다. 하지만 나는 태백산 백천계곡 단풍터널을 위 반열에 올린다. 은은하고 고즈넉하기까지 하여 더 가깝게 다가오고, 조용히 사색에 젖을 만하기 때문이다. 백천계곡에서 가장 검붉게 물드는 것은 당단풍나무 잎이다. 빨간 것은 회나무이며 불그스름한 것은 복지기나무이다. 산벚나무 잎은 붉은 듯 갈색을 띤다. 노란 것은 생강나무 잎이며 노르끼리한 것은 산겨릅나무와 함박나무이다. 같은 단풍도 위치와 환경에 따라서 이렇게 여러 가지로 다른 색..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초록 연잎 위에 영롱한 물방울이 동글동글 맺혀 있다. 부처님이 세상을 밝히라고 보내신 전령인가, 받들어 올린 꽃대 위에 수천의 연등이 불을 밝힌다. 지금 나는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에 있다. 산책로에 넘쳐나는 사람들이 제등행렬을 하는 듯하다. 연꽃마다 사월 초파일 절 마당을 밝히던 연등과 겹쳐진다. 부처님의 가피력을 청한다. 사상 유례없는 역병을 소멸하고 마음이 맑아지게 해 달라고. 바람이 연꽃 대궁이를 흔들지만 아직 이르다고 침묵하는 봉오리에서도 촛불의 불꽃이 어린다. 만개한 꽃이 향기를 날리다가 가장 아름다울 때 자신을 버리고 씨앗을 잉태한다. 연밭을 빛나게 하는 것은 연잎과 꽃봉오리나 활짝 핀 꽃만이 아니다. 조신하게 내생을 기다리는 연실(蓮實)을 품..
스크린의 느린 화면에서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에 떨어진다. 문득, 포물선 상의 한 점을 지나고 있는 느린 걸음의 내가 보인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도 화살촉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 패턴의 반복이라고도 한다. 시간을 과거로 돌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한 지점을 선택할 수 있을까. 나이 들어가며 선택할 때 걸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좋게 보면 심사숙고를 하는 것이지만, 대범했던 성격이 소심해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인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 작은 것에도 자주 망설인다. 남편과 건강검진을 받고 나와, 벌써 한 시간째 식당을 결정 못 하고 있다. 그도 딱히 결정하지 못하고 내 결정에 따를 심산인 듯, "글쎄 어디가 ..
2021 포항스틸에세이 대상 바위에 부딪친 파도가 하얀 가루로 부서진다. 육지까지 올라올 것처럼 밀어붙이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뒷걸음치는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그제야 파도에 몸을 내어주었던 바위들이 바닷물 사이로 하나둘 되살아난다. 해안가 사람들이 오밀조밀 동네를 이루듯 갯바위에도 다닥다닥 갯것들이 모여 산다. 숨어 있던 게들이 슬그미 기어 나오고 엎드렸던 따개비와 굴들은 참았던 긴 숨을 토해낸다. 추위가 뻣속까지 스며드는데 낡은 가방을 멘 노인이 얼른거린다.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길쭉한 쇠갈고리를 쥐었다. 이 바위에서 저 돌 위로 겅중거린다.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는지 굽은 허리를 더욱 깊숙이 구부린다. 돌돌 말아놓은 거뭇한 보따리 하나 바위에 얹어 놓은 것 같다. 가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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