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문과 원문 상현과 하현에 파도 소리 줄면/ 해녀들 짝 이뤄 풀처럼 진을 쳐 돌아보며 옷 벗으라 재촉하고/ 허리춤 꽉 묶었는지 꼼꼼히 살피네 바다에서도 평지를 걷듯 하고/ 저마다 두레박 하나 끼고 있네 머리 숙여 발을 차고 입수하니/ 물에 사는 인어인가 의아하네 잠시 사이에 고요해져 그림자도 없으니/ 바다거북과 상어한테 잡혀먹히지는 않았는지 잠시 뒤에 보니 번갈아 머리 내밀고는/ 휘파람 불듯 숨비소리 내뿜네 오르락내리락 십여 차례 반복하더니/ 광주리에는 해산물이 가득 둘러앉아 해산물 헤아리는데/ 바위처럼 수북이 쌓여 있네 뛰어난 재주에도 천대받아/ 마을에는 함께 살지 못하네 중국 사람들 전복 크다고 자랑하며/ 손가락 몇 개 겹친 크기라 하는데 지금 보니 대야와 쟁반만 한 것도 있고/ 작은 것도 말 위의..
강신애 시인 1961년 경기 강화 출생. 1996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으로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불타는 기린』,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가 있다. 팬데믹 / 강신애 닿을 수 없는 차가운 침상에/ 봄이 숨결을 다 쓴다// 마스크 쓴 구름이 홀로 간 자들을 조문하는 동안/ 창궐한 전염병이/ 수백만 생명을 구했다고도 한다// 바이러스와 테러리스트와 이산화질소 중/ 어느 것이 견딜 만한가/ 어디에 산소호흡기를 댈까// 우리는 오랫동안 독을 먹고 살아왔는데/ 기침 소리에 소스라치는 어두운 골목/ 하얀 얼굴이 라일락 향기를 휘젓는다// 나는 숙주고/ 너는 에어로졸이야// 익사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꽃가루야// 늙은 주에서 임신한 고양이로 불안을 숨기고..
도심 한복판 빌딩 숲 속에 의뭉스러운 카페 하나 성업 중이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면도로에 붙은 주택의 얼치기 변신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골이 빈 것 아니야? 이런 곳에 카페라니” 주인은 통 크게도 남쪽 벽을 깨서 통창을 냈다. 담장을 허물고, 골목 사이에 둔 앞집 담벼락에다 선사시대의 모습을 벽화로 그려 넣었다. 손바닥만 한 집이 훤해졌다. 늙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뿐인 정원에다 거칠거칠한 송판으로 무릎 높이의 담장을 둘러 알록달록 페인트를 칠하고, 사립문이랍시고 야트막한 대문도 달았다. 살림집인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마다 올려둔 화분에는 주인을 닮은 앙증맞은 꽃들이 색색으로 피었다. 온갖 정성으로 치장을 했어도 옛날 시골 장터를 찾아온 서커스단 어린 여배우의 서툰 분칠 같았다. 그런데도 넥타이 졸라매고..
큰애 친구 중에 한참 어린 동생을 둔 아이가 있다. 둘은 필시 그런 공통점으로 친해졌을 것이다. 여섯 살, 일곱 살 손위의 맏딸로 살아가는 공감대 같은 게 분명 있을 테니까. 주말에 둘이 함께 참여하기로 한 학교 행사의 세부 일정이 나왔는데 저녁 늦게야 끝나겠더란다. 우리 딸이 걱정 삼아 너무 늦는 거 아니냐고 말을 건네니 그 친구 답이 이렇게 돌아왔다. “난 좋아. 집에 있으면 동생 돌보기 힘든데 잘 됐지 뭐,” 아아, 장녀의 고단함이여, (참고로 우리 딸은 동생이랑 주말에 붙어 지내는 게 좋다고 말해서 엄마를 안심시켰다. 아아. 장녀의 이 후덕한 마음 씀이여.) 언니, 누나라는 말에는 엄마를 흉내 낸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 편안한 의자를 닮은 글자 니은이 단어의 중심에 놓여 새되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