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지의 대형 서점에 들려 보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극장보다도 큰 건물이 온통 새 책들로 꽉 차 있다. 국내의 서점에서 볼 만한 신간을 만나기란 있을 수 없는 일로 알려졌던 시절에 비하면, 책방에 들른다 하면 으레 외국책이 대부분인 헌책방 찾아다니는 것을 의미했던 젊었던 시절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이다. 신문이나 잡지의 광고란을 보아도 책 광고가 차지하는 면적이 결코 적은 편은 아니다. 일본 신문에는 책 광고가 많은데 한국 신문은 영화 광고와 술 광고가 판을 친다는 한탄의 소리가 들렸던 30년 전에 비하면, 대견하기 짝이 없는 발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만 변화하기는 어려운 일이어서, 출판문화의 양적 성장이 오로지 경사스러운 기쁨만은 아닌 것..
속상하고 화나는 일, 억울하고 분한 일, 매일같이 일어난다. 친한 친구 만나 하소연한다. "액땜한 셈치고 잊어버리라"고 위로한다.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겠지" 하며 이번에는 친구에게 화풀이를 한다. 친구는 피식 웃고 만다. 나도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탓으로 큰 손해를 본 경험을 가졌다. 집 한채를 사기 당한 적도 있었고, 속담 그대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아픔도 더러 당했다. 자질구레한 일로 기분이 상한 날은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가 대로상에서 껌을 볼품 없이 씹는 모습을 목격한 날보다도 더욱 자주 있었다. 새로 산 고무신 또는 우산을 도둑맞고 한동안 기분이 나빴던 경험도 있다. 하루 세 끼 먹기가 어렵던 시절의 이야기다. 크게 잘못한 일도 없이 담임 선생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밤..
과연 고승의 풍모답다. 결가부좌한 다리 위로 가지런히 손을 포개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윽한 눈매, 곧고 오뚝한 코 아래 꼭 다문 홀쭉한 입술, 양옆으로 돋은 볼록한 광대에 연륜이 느껴진다. 이마의 세 가닥 주름과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주름, 그리고 툭 튀어나온 울대뼈와 앙상한 쇄골 밑으로 뼈마디가 보이는 손등 탓인지 노승은 더욱 수척해 보인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승상인 건칠희랑대사좌상이다. 이번에 해인사 성보박물관 수장고에 모셔졌던 이 초상을 옮겨와 박물관 특별기획전을 연다고 하기에 한걸음에 달려가 친견하였다. 곳곳에 파이거나 눌린 자국이 있고 색이 긁히거나 조각이 떨어져 나갔지만, 한평생 오롯한 정진으로 일관한 수행자의 모습은 변함없다. 대부분의 불상이 팽팽한 볼살과 함께 단단한 어깨..
박성준 시인, 문학평론가 1986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에 나왔으며,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시집으로 『몰아 쓴 일기』, 『잘 모르는 사이』가 있다. 2015년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는' 동인. 물 / 박성준 종이는 단호해진다// 누구나 액자 파는 가게 앞이 한 번쯤 필요했던 것이다 민은 지나치게 지나친 요구를 한다 하소연이다 절취선처럼 늘어선 얼굴들과 이따금씩 돌발적인 모래바람은 주민들의 구멍 난 부위를 다 감추기에 모자랐다// 염려를 놓지 않아도 언젠나 부주의한 사람들은 곧 잘 사라진다 밤이면 그간의 것을 탕..
이지아 시인 197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이현정.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희곡)을 수상하고, 2015년 《쿨투라》 신인상(시)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오트 쿠튀르』, 『이렇게나 뽀송해』가 있다. 2022년 박상륭상을 수상했다. 강당과 직선 / 이지아 스웨터 털실이 하나 삐져나왔을 때, 겨울이 끝나고 있었다 팔짱은 옆에서 이루어지고, 의자는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더 이상 차분하지 말아야 한다 생닭을 씻는다 다리를 벌리고 마늘을 넣고 대추를 넣는다 나는 배를 가르지 않고 배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굳은 몸을 뒤져서 기저귀를 뺀다 냉담에 살코기가 생긴다 코털을 자를 때마다 다짐한다 아무 상관없이 살자던 사람은 눈을 감아도 보이지 않는다// 들판 위의 챔피언..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 글쓰기와 멀어지지 않으려면 매일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기껏 머리에서 떠올린 단어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맞춰지지 않는 퍼즐 같다. 글머리부터 티격태격하다 힘들게 조합한 문장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쓰고 지우길 반복한 날이 얼추 한 달은 지났다. 생각해 보니 아끼던 안경이 사라진 시기와 딱 들어맞는다. 한 달 전쯤이다. 십오 년 가까이 써온 자줏빛 뿔테 돋보기안경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나절 신문을 볼 때 사용한 것까지는 기억나지만 어디다 벗어두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넓지 않은 집안을 몇 날 동안 뒤져도 행방이 묘연했다. 여분의 돋보기는 두어 개 더 있지만 집에서 글을 읽고 쓸 때 늘 애용해 온 것이다. 긴 ..
집 뒤 공원 길섶에 두 마리 까치가 나풀댄다. 아직 찬바람에 버석대는 검불 여기저기를 쪼아댄다. 아침나절 창밖에서 소리치던 녀석이 이놈인가 싶어 살폈다. 살을 에는 추위에 한동안 자취를 감추더니 봄을 물고 와 부려 놓았다. 며칠 새에 산수유, 개나리가 엷은 꽃잎을 내밀었 고, 벚꽃 움이 곧 터질 기세다. 문득 까치는 한겨울을 어디서 보내다 온 걸까 궁금해진다. 날이 추워 지면 새들이 사라지는 걸 당연시해 온 탓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일이다. 철새처럼 남쪽 따뜻한 곳으로 피접 다닌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으니 더 그렇다. 삭풍 몰아치는 산기슭의 까치집을 쳐다보면서는 빈집일 거라는 생각을 늘 한다. 얼기설기한 갖춤새로는 엄동 한천을 이겨내지 못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봄날 출현하는 녀석은 어딘가 먼 데서 숨어..
서형국 시인 1973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2018년 월간 《모던포엠》 최우수 신인상으로 등단. 공동 시집으로 『시골시인-K』(공저)가 있다. 全人文學 회원, 시나무 동인, 문학동인 volume 회원. 꽃이 꽃배달 하면 / 서형국 뒤틀린 왼팔로 바지춤을 내리고/ 꽃 흐드러진 들에다/ 시원하게 물을 뿌린다// 고추 모종 심는 아낙들 깔깔대다/ ㅡ올해는 고추농사 풍년이겠네// 꽃 한 다발 꺾어 쥐고/ 어눌한 발음으로/ ㅡ어바 어바바// 아랫도리 건수는 잊고서 환하게 웃는다// 다섯 살부터/ 나이를 꽃밭에 뿌린 총각// 그 남자// 분명/ 꽃집 총각이겠지// 온 동네/ 꽃밭/ 주인이겠지// 개고생 / 서형국 짤 만큼 짜낸 시를 탈수기로 돌리면/ 돌돌 원심력은 최대한 멀리 생각을 떨어냅니다/ 그러면 낡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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