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 박팔양 친구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길가의 한 포기 조그만 풀을/ 보신 일이 있으실 것이외다/ 짓밟히며, 짓밟히면서도/ 푸른 하늘로 작은 손을 내저으며/ 기어이 기어이 살아보겠다는/ 길가의 한 포기 조그만 풀을/ 목숨은 하늘이 주신 것이외다/ 누가 감히 이를 어찌하리까?/ 푸른 하늘에는 새떼가 날으고/ 고요한 바다에 고기떼 뛰놀 때/ 그대와 나는 목숨을 위하여/ 땅 위에 딩굴고 또 딩굴 것이외다// 침묵 / 박팔양 나는 그대의 종달새 같은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보다고 더 그대의 말없음을 사랑한다/ 말은 마침내 한계의 조그만 아름다운 장난감/ 나는 장난감에 싫증난 커가는 아이다/ 말보다도 그대의 노래를 나는 더 사랑한다/ 진실로 그윽하고도 황홀한 그대의 노래여!/ 붉은 노을 서편 하늘에 비끼..
시집 '현해탄' 네거리의 순이(順伊) / 임화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
시 / 설정식 대리석에 쪼아 쓴 언어들이 아니라/ 가슴 속을 누가 할켜놓은 상채기 같기도 하고/ 당신의 귓 속을 어루만지는 기후(氣候)와 쉽게/ 궁합이 맞은 천재의 음률이 아니외라// 그것은 뼈에 금이 실려/ 절그럭거리는 원래(原來)의 소리외다// 종(鍾) / 설정식 만(萬) 생영(生靈) 신음(呻吟)을/ 어드메 간직하였기/ 너는 항상 돌아앉아/ 밤을 지키고 새우느냐// 무거히 드리운 침묵이어/ 네 존엄을 뉘 깨트리뇨/ 어느 권력이 네 등을 두다려/ 목메인 명인(鳴咽)을 자아내드뇨// 권력이어든 차라리 살을 아스라/ 영어(囹圄)에 물어진 살이어든/ 아 권력이어든 앗갑지도않은 살을점이라// 자유는 그림자보다는 크드뇨/ 그거쇼은 영원히 역사의 유실물이드뇨/ 한 아름 공허여/ 아 우리는 무엇을 어루만지뇨// 그..
월향구천곡(月香九天曲) -슬픈 이야기 / 오장환 오렌지 껍질을 벗기면/ 손을 적신다./ 향(香)내가 난다.// 점잖은 사람 여러이 보이인 중(中)에 여럿은 웃고 떠드나/ 기녀(妓女)는 호올로/ 옛 사나이와 흡사한 모습을 찾고 있었다.// 점잖은 손들의 전(傳)하여 오는 풍습(風習)엔/ 계집의 손목을 만져주는 것,/ 기녀(妓女)는 푸른 얼굴 근심이 가득하도다./ 하─얗게 훈기는 냄새/ 분 냄새를 지니었도다.// 옛이야기 모양 거짓말을 잘하는 계집/ 너는 사슴처럼 차디찬 슬픔을 지니었구나.// 한나절 태극선(太極扇) 부치며/ 슬픈 노래, 너는 부른다/ 좁은 버선 맵시 단정히 앉아/ 무던히도 총총한 하루하루/ 옛 기억의 엷은 입술엔/ 포도(葡萄) 물이 젖어 있고나.// 물고기와 같은 입 하고/ 슬픈 노래, 너..
낡은 집 /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에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 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라도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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