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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설정식
대리석에 쪼아 쓴 언어들이 아니라/ 가슴 속을 누가 할켜놓은 상채기 같기도 하고/ 당신의 귓 속을 어루만지는 기후(氣候)와 쉽게/ 궁합이 맞은 천재의 음률이 아니외라// 그것은 뼈에 금이 실려/ 절그럭거리는 원래(原來)의 소리외다//
종(鍾) / 설정식
만(萬) 생영(生靈) 신음(呻吟)을/ 어드메 간직하였기/ 너는 항상 돌아앉아/ 밤을 지키고 새우느냐// 무거히 드리운 침묵이어/ 네 존엄을 뉘 깨트리뇨/ 어느 권력이 네 등을 두다려/ 목메인 명인(鳴咽)을 자아내드뇨// 권력이어든 차라리 살을 아스라/ 영어(囹圄)에 물어진 살이어든/ 아 권력이어든 앗갑지도않은 살을점이라// 자유는 그림자보다는 크드뇨/ 그거쇼은 영원히 역사의 유실물이드뇨/ 한 아름 공허여/ 아 우리는 무엇을 어루만지뇨// 그러나 무거히 드리운 인종(忍從)이어/ 동혈(洞穴)보다 깊은 네 의지(意志) 속에/ 민족의 감내(堪耐)를 살게 하라/ 그리고 모든 요란한 법을 거부하라// 내 간 뒤에도 민족은 있으리니/ 스스로 울리는 자유를 기다리라/ 그러나 내 간 뒤에도 신음은 들리리니/ 네 파루(破漏)를 소리 없이 치라//
송가(頌歌) / 설정식
주검을 끌어안고/ 노래하는 땅이어/ 노래하며 또 호곡(號哭)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여/ 나라를 맞이하는 노래와/ 나라를 보내는 통곡이 조용히 끝이 나면/ 청춘을 고이 받아/ 두터이 묻어 주는 고마운 흙이어/ 그러나 또다시 노래와 통곡을/ 길게 길게 전하는/ 골짜구니의 종심(縱深)이어/ 네 어찌 다만 산이요 드을이랴/ 엎드리면 심장이오/ 또 쓰러져 누우면/ 떳떳한 조국이라/ 우리들 함께 아는/ 진리와 영원은/ 바위에 새긴 죽은 율법이 아니라/ 저마다 끌어안은 주검이라/ 최후를 모르고/ 주검을 놓지 않음이니/ 놓았다 하라 벌써/ 영원에 다음이요/ 오는 생명을 위한 번식의 시초라// 다만 아지 못할 동족이 있어/ 살 베이고 뼈 앗음을 일삼아/ 지속을 자르다 그러나/ 잘라도 잘라도 크는/ 청춘의 육체는 흙이라/ 악에 모반하는 뿌리를 지키기 위하여/ 흙은 숨을 쉬고 자지 않음이라 다만/ 야차(夜叉)와 같은 동족이 있어/ 역사에 밀린 단층의 최후를/ 세 뼘 칼끝으로 지탱하려고/ 매암돌이 몸부림치는 너 비리(非理)/ 둔천배정(遁天背情)의 희생은 다만/ 떨어져 죽지 않는 포도라/ 청춘의 넋의 약하고 또 강함이어/ 그대 위하여 산천에 노한 포도/ 백태(白苔)를 뿜고/ 종야(終夜) 통곡하여 피를 흘리다// 강산은 흘린다는 뜻이라/ 바위에 물을/ 삼림에 바람을/ 드을에 열매의 둥그러함을/ 화판(花瓣)을 벌리고/ 꿀을 이끌라/ 꿀을 마시고 나라에 부복함은/ 내 결코 취함이 아니라/ 일어서서 등고(登高)함이니/ 억울한 땅이/ 다만 야차(夜叉)의 집인가 피 산천인가// 아니라 보라/ 군청(群靑)일세 하도라/ 만경(萬頃) 해소(海嘯)/ 밀어 올린 뭍은 꿈틀거려/ 살아 있는 천지 곧/ 응천(應天)하는 해방의 상징이라/ 무산(茂山) 풍산(豊山) 마천령(摩天嶺)으로/ 같이 넘은 남도(南圖)의 깃은 토조(土鳥)의 뜻/ 동일 언어의 선행(先行)이요/ 유목 이후의 발견이라/ 착락삼양(錯落參羊)/ 만이천봉마다 인연이 서리워/ 함께 다시 뻗은 봉우리 봉우리마다/ 인민 봉화(烽火) 기다리는/ 강토의 정점이니/ 등골으로써 전지(傳之)하는/ 장백산 오대산맥은/ 인민 모반(母盤)의 탯줄이라/ 어느 골엔들/ 신생을 영위하는 출혈이 없으리오/ 나라의 슬픔이/ 골짜구니마다 들어찼다 함은/ 태동의 아픔을 이를 뿐이니/ 들으라/ 불사(不死)의 곡신(谷神)조차 몰아내는 함성을/ 눈물을 북망에 봉하고/ 수백만 청춘의 똑같은 눈초리/ 타는 초롱불/ 봉화재로 오르며/ 구천에 올리는 헌가를// 불이 꺼진들/ 봉화대가 아니며/ 뿔이 꺾인들/ 황소가 아니랴/ 모든 산상(山上)이 강토의 정점이듯/ 모든 가슴은 사상의 초점이라/ 이로써 가히 조국의 섬이오/ 이로써 비로소/ 조국이 풍양(豊穰)함이라/ 이는 다시 황주(黃州) 장단(長湍)벌/ 김제(金堤) 하동(河東)드을에/ 수백만 청춘의 팔뚝같이 여문/ 열도(熱稻)만을 이름이 아니라/ 거기 벌써 서리잡는/ 공화국의 주권이라// 금강은 서방(西方)도 좋을씨고/ 두만강은 동북방(東北方)도 좋을씨고/ 상류(上流) 상상류(上上流)/ 무슨 열매 어디 맺혀/ 익어가는 핵(核)은 민권/ 종심(縱深)으로조차 흘러오는/ 피묻은 낙화 또한/ 우리들만이 아는 소식이라/ 머지않아 부전(赴戰)에서 쏟아지는/ 인민전력(人民電力)으로/ 남해 완도/ 완강한 암흑을 몰아 쫓을 것이라// 그러나 아직은/ 성문을 닫아두라/ 그대 의지와 두터운 입술과 함께/ 굳이 닫아두라/ 대대로 노한 포도/ 저린 이를 모두어/ 탁목조(啄木鳥) 수심(樹心)을 울리듯// 그대들이 으드등 갈고 무릎을 꺾는 서리/ 아닌 그대들 땀이 땅에 말라 쌓여/ 소금기둥 되어서/ 일어서는 주권이/ 내 이마에 닿을 때까지/ 적의 교량의 설계를 거부하고/ 길을 끊으라/ 걸어가지 못할 것을 실어가고/ 테러를 운반하는/ 트럭을 거부하기 위하여/ 괭이를 잠시 이곳에 쓰고/ 성문을 굳이 닫아두라// 반가(反歌)// 지나가는 호랑나비야/ 똑같은 수백만 눈동자의/ 푸른 해심(海深)을/ 어찌 헤아린다 하느뇨/ 비말차운(飛沫遮雲)의 헛됨이어/ 가슴 가슴마다 타는/ 해바라기/ 붉은 사상의 태양을/ 무엇으로 막으려는가//
경(卿)아 / 설정식
헛간 뒤에/ 비닭이가 와서 운다// 장마 거둔 오후 여덟 시다/ 이월보다 해가 퍽 길어졌다// 시방이사 어두워온다/ 아직 네가 살아 있던 시간이다// 네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먼 데서 이름만 지었다/ 대관령 젓재 문재로 해서 내게로 왔을 때/ 유난히 흰 네 얼굴은 필시 눈보라 탓이라 했다// 다만 눈 코 입 귀 이마 그러니/ 네 얼굴이 언니보다 이쁘다고만 하였다/ 네가 손발을 잎사귀처럼 버리고 떨어질 때/ 아무도 받들어주지 않더란 말이냐// 네가 간 지 넉 달밖에 되지 않는데/ 나는 왜 벌써 네 얼굴이 상막하냐// 어느 문이고 열면 문턱마다 야직하다/ 아까샤 바람이 휭 지나가는 방들이다/ 우리 경卿이 인제 기어 다니기 좋은 집이라고 네 어미/ 걸레질 치던 긴 툇마루다// 차차 어두워지는데도 저 날짐승은/ 네가 아주 그러져 갈 때 저렇게 울었더라는구나// 무딘 무딘 애비는 잠만 잤었다/ 왜 네 얼굴이 잘 생각키지 않느냐// 비닭이 소리 견디기 어려우니 이사를 하재서/ 나는 여기저기 집을 구해보았다// 네 간 뒤에 바다 건너서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와서/ 셋집 구하기도 힘이 든다// 까닭없이 떼를 쓰던 네 작은 오래비는/ 손발을 풀잎새같이 버리고 시방 잠이 들었다/ 비닭이 우는 소리가 그쳤다/ 경(卿)아 너도 잘 자거라//
고향 / 설정식
싸리 울타리에 나직이 핀/ 박꽃에 옮겨나는 박호의 그림자/ 이윽고 숨어들고/ 희미한 달 그림자에 어른거리던 박쥐의 긴 나래/ 뽕밭 너머로 사라질 때/ 할아버지여 지금도/ 마당에 내려앉아/ 고요히 모깃불을 피우시나이까?// 늦은 병아리 장독대에 삐악거리고/ 이른 마실 떠나는 소몰이꾼이/ 또랑 길을 재촉할 때/ 곤히 잠들은 조카의 머리맡에 돌아앉아/ 할머니여 오늘 아침에도/ 이 빠진 얼개로 조용히/ 하이얀 머리를 빗으시나이까?//
샘물 / 설정식
처녀야/ 하루의 물레 손을 그만 쉬고/ 이제 쉬일 때가 되었다/ 어머니의 그 질항아리를 이고/ 어서 너의 집에서 나오너라/ 모두들 불놀이 간다는 저녁이다/ 나와 함께 너는/ 저 숲으로 가보지 않으려느냐/ 별빛이 총총 내려뿌리는 저기/ 아무도 다치지 않은 평화가 있다는 그곳으로/ 우리들의 마른 풀포기에 끼얹을/ 샘물 길으러 가지 않으려느냐//
해바라기 1 / 설정식
삭은 역사 꾸러미와/ (모든 우상과 연대표도 포함하자)/ 비루하게 흘린 땀에 절은/ 아버지의 남루를/ 형상과 다리만 달린 산 송장들과/ 그들이 다시 흘린 기름을/ 사르기 위하여/ 견디지 못하는/ 우리들의 스스로 산 비겁을 또한/ 속죄하기 위하여// 그리고/ 풍성한 배를 어루만질 수 있는/ 새로운 아내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쑥을 버히고/ 새나라 머리 둘 곳/ 바로 그 뒤에서부터/ 해바라기 불을 지르리라//
해바라기 2 / 설정식
해바라기꽃이/ 또 피었다// 해바라기는/ 두터웁고 크다// 길에 먼지가 일어/ 우리들의 눈이 멀어도// 눈부신 해바라기꽃이/ 보아라 바람 속에서 탄다// 아름다운 것에서도/ 해방된 사랑// 해바라기꽃은/ 너의 정열을 비웃는다// 아내여 그러지 말고 어서/ 해바라기 앞으로 돌아서라// 해바라기는 호을로/ 태양에 필적하였다//
해바라기 3 / 설정식
해바라기는 차라리 견디기 위하야/ 해바라기는 차라리 믿음을 위하야/ 너희들의 미래(未來)를 건지기 위하야// 무심(無心)한 태양(太陽)이/ 사슴의 목을 말리고/ 수풀에 불을 질르고/ 바다 천심(千尋)을 짜게 하여도// 해바라기는 호올로/ 너의들의 타락(墮落)을 거부(拒否)하였다// 모든 꽃이 아름다운 십자가(十字架)에 죽은 날/ 모든 열매가 여지(餘地)없이 유린을 당한 날/ 그들이 모다 원죄(原罪)로 돌아간 날// 무도(無道)한 태양(太陽)이/ 인간(人間) 우에 군림(君臨)하고/ 인간(人間)은 또 인간(人間) 우에 개가(凱歌)를 부르고/ 이기랴든 멍에냐 어깨마저 꺼저도// 해바라기는 호올로/ 태양(太陽)에 필적(匹敵)하였다//
해바라기 쓴 술을 빚어 놓고 / 설정식
두고 두고 노래하고/ 또 슬퍼하여야 될 팔월(八月)이 왔소// 꽃다발을 엮어/ 아름다운 첫 기억을 따로 모시리까/ 술을 빚어 놓고 다시/ 몸부림을 치리까// 그러나 아름다운 팔월(八月)은 솟으라/ 도로 찾은 깃은 날으라 그러나/ 아하/ 숲에 나무는 잘리우고/ 마른 산(山)이오 눈보라 섣달/ 사월(四月) 첫 소나기도 지나갔건마는/ 어데 가서 씨앗을 담아다/ 푸른 숲을 일굴 것이오// 아름다운 팔월(八月) 태양(太陽)이/ 한 번 솟아 넓적한 민족(民族)의 가슴 우에// 둥글게 타는 기록을 찍었소/ 그는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목마른 사람들의 꽃이오/ 그는 불사조/ 괴로움밖에 모르는 인민의 꽃이오// 오래오래 견디고/ 또 기다려야 될 새로운 팔월(八月)이 왔소// 해바라기 꽃다발을 엮어/ 이제로부터 싸우러 가는/ 인민십자군(人民十字軍)의 머리에 얹으리다// 해바라기 쓴 술을 빚어 놓고/ 그대들 목을 축이러 올 때까지 기다리리다// 팔월(八月)은 가라앉으라/ 도로 찾은 깃을 접고 바람을 품으라/ 붉은 산(山) 황토벌도/ 역사의 나래 밑에 그늘진 자유/ 방자 엄돋는 인민의 꽃 해바라기에 물을 기르라// 자유가 두려운 자/ 아름다운 사상과 때에 반역하는 무리만이/ 이기지 못하는 무거운 역사의 그림자// 팔월(八月)은 영화(榮華)로운 팔월(八月)의 그림자를 믿으라/ 죽임을 모르는 인민들은/ 죽임을 모르는 팔월(八月)의 꽃/ 해바라기에 물을 기르라//
포도 / 설정식
얼마나 많은 주검들이기에/ 이렇게 산으로 하나 가득/ 제물(祭物)을 바치었더냐// 우리 애기 머리같이/ 말랑말랑한 착한 과실일지라도/ 죄(罪)를 구대(九代)에 저리게 할/ 단한 이빨 앞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소금으로 변하는 예지(叡智)// 포도는/ 육체와 영혼 사이에 서서/ 위태로이 떤다//
붉은 아가웨 열매를 / 설정식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른 잎새보다/ 더 푸른 청춘을/ 어찌하여/ 모란 모란 모란도 아닌 것을/ 모란보다 더 붉은/ 피로만 적셔야 하며// 붉은 모란보다/ 더 붉은 입술보다/ 더 붉은 사랑을/ 어찌하여/ 이글이글 타는 불도 아닌 것을/ 너는 도리어 화약을 퍼부어/ 헛되이 이십(二十)을 익어/ 헛된 젖가슴을/ 헛되이 식어가는 젖가슴을―// 청춘은 잘 먹기 위하여 있었고/ 잘 자기 위하여 있었고/ 청춘은/ 서로 함께 발을 벗고/ 흙을 밟기 위하였고/ 청춘은 아 서로 함께 끌어안기 위함인데// 어찌하여 이곳에/ 청춘은/ 견디기만 위하여 있고/ 팔목이 그리워 내 팔목이/ 고향같이 그리워 찾아오는 포리(捕吏)가 있어/ 새우잠을 이리저리/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만 하며/ 어찌하여 손톱까지 무기로 써야 하며/ 청춘은/ 아 어찌하여 이렇게도/ 몰라보게 되었느냐// 상추쌈에 사랑같이 매운 풋마늘 맛을/ 솎은 배추에 두릅나물이며/ 아리배배한 무릇 한번 실컷/ 사랑같이 씁쓸하여도 보지 못하고/ 오월도 모르고/ 칠월도 모르고/ 팔월이면 으래히 바다건만 바다도/ 사랑같이 따거운 모래찜질도 모르고/ 갈 길이 바쁜 듯이 가고 또 가는 청춘이/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요 셋도 아닌 땅/ 푸른 풀/ 푸른 드을이여/ 몸부림쳐 문질러/ 뜨거운 것을 조직하라/ 남조선에 푸른 것이여/ 네 어찌 다만 미래같이 푸르고만 있으랴/ 그리고 너 이름 가진 온통 모든 꽃들은/ 하늘이 까맣게 색까맣게/ 성신(星晨)을 얽어 놓 듯/ 산 우에서와 산 아래/ 구릉 이쪽에서 구릉 저쪽에/ 한가지 꿀을 조직하라/ 네 어찌 무슨 염치로 유독/ 요란하게 돌아앉아/ 몰라보게 되어가는 산천을 모른다 하랴// 굴뚝에 까치가 집을 짓는 곳/ 이곳은 남조선/ 풍부하게 배부른 아내가 어찌하여 귀찮은 곳/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밤이 간신히 지새면/ 밤을 기다리기 십년 같은 곳/ 이곳에서 날새들은/ 뿔뿔이 흩어져 울어서는 아니 되겠다/ 어머님 땅이 깊이 깊이/ 모든 뿌리를 얽어 놓 듯/ 아래서부터 우으로/ 우에서부터 아래로/ 밤에서 낮으로 낮에서 밤으로/ 한가지 노래를 조직하라/ 네 어찌 무슨 낯으로 저 흔하고 흔한/ 총알을 혼자서만 두려워하랴// 가자/ 가자 이렇게 푸르고 또 뜨겁게 하며/ 꿀과 노래로 청춘과 총알 사이로 가자/ 뻐근하게 살아갈 보람도 있는/ 삶을 조상하며 또 꿀범벅 피범벅/ 붉은 아가웨 열매를 삼키면서/ 남조선으로 가자//
잡초 / 설정식
오늘 죽은 듯이 깔리운 아우성은/ 아람으로 자랑하는 왕자 서기 이전부터/ 바람 함께 무성하였다// 쓰러지고야 말/ 년륜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다못/ 운명의 거대함이라 하였다.// 말굽이 지나오고 또 지나가도./ 겁화(劫火)* 따끝에서 따끝을 쓸어도/ 드을(들)을 엉켜 잡은 잡초 뿌럭지./ 쓰러지지 않는 년대는 다못./ 인민으로 붙어 인민의 어개우로만 넘어갔다// 피라. 화려할대로./ 그러나 백화 너의들의 발아래/ 년륜으로 헤아릴 수 없는 생명으로./ 무한 죽었다 다시 살어나는/ 여기/ 뿌럭지들임을 알라.//
* 겁화(劫火) : 파멸될 때에 일어 난다는 큰불
여름이 가나보다 / 설정식
마을 어구 표주(標柱)에는 나란히 내려앉은 잠자리/ 이제는 오동잎도 더는 자라지 않으려니―/ 헛간 뒷마당에 다롱다롱 여무는 감과/ 처자(處子)의 댕기 걸린 대추나무 함뿍되는 열매가/ 호을로 서리맞아 그 빛이 붉어간다./ 염소의 귀밑털 같은 하이얀 구름/ 피어 날이 개이고 보면/ 그 하늘 높다 뿐이랴―함지로 퍼내이고 퍼내어도/ 끝 모르게 괴어 솟아오름이 이마작의 하늘이다.// 아쉬운 아쉬운 주월(晝月)이 어울린/ 긴 포구(浦口)는 밀물로 소리 곱고/ 더 곱게 낙조(落照)로 희한하게 물든다./ 이 언덕에서 천막(天幕)을 헐어 그네, 여름봇짐을 싸 짊어질 때/ 희랍(希臘)의 그 아양을 본뜬 계집들/ 반허리에 휘감은 엷은 옷을 추키며/ 거리에서 숨어들고/ 이날도/ 천기예보(天氣豫報), 흰 깃발은 멀리 나부낀다./ (내 사랑하는 숲과 들로 돌아가보면)/ 뉘엿이 해 저물어/ 두 가슴으로 새어드는 바람/ 수만 줄기 높낮은 벌레울음/ 수풀과 덩굴에 사모치고/ 어디 갔던 고양이 집으로 기어들 때/ 할머니는/ 널어 말린 뽕잎담배를 치맛자락으로 거둬들인다./ 소수레는 천천히/ 두 바퀴에 이가는 여름 저녁을 감으며 감으며/ 먼 뒷골에서 예돌아든다./ 젊은이는 꼴단에 비껴앉아/ 소방울에 고요히/ 장단을 놓으며/ 언덕길을 굽이돌 제/ 품앗이 베아리꾼 젊은 주인(主人)을 맞이하는/ 삽사리는 싸리문 밖으로 내달으며 짖나니/ 오 이러할 때/ 남묘(南畝)에 할아버지도 원두막에서 내려온다.//
임우(霖雨) / 설정식
이렇게 장마가 한창일 때/ 산으로 들어간 사나이가 있었다/ 발광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수연(脩然)히 숲에 들어가/ 삼매(三昧)를 찾음도 아니었다/ 순사(巡査)에게 쫓겨 산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푸실푸실 끊이지 않고 내리던 날/ 지붕 위에서는 잿물 같은 낙숫물이/ 쭈룩쭈룩 떨어지던 오후였다/ 노파는 노체(露體) 황황(惶惶)/ 누구 메투리든지 아모게나 끄을고/ 산으로 따라갔다/ 그것은 내 동무의 어머니였다/ □ 후렴(後念)// 억조억(億兆億) 줄기 더운 빗속에/ 빙점으로 내려가는 장자/ 테러는 또 생명을 앗아갔다/ 아 생강이래도 있으면/ 푹 달여 마시고/ 독한 엽초나 피우고 싶은 밤이다//
달 / 설정식
바람이/ 모든 꽃의 절개(節介)를 지키듯이/ 그리고 모든 열매를 주인(主人)의 집에 안아들이듯이/ 아름다운 내 피의 순환(循環)을 다스리는/ 너 태초(太初)의 약속이어/ 그믐일지언정 부디/ 내 품에 안길 사람은 잊지 말아다오/ 잎새라 가장귀라 불고 지나가도 종내사/ 열매에 잠드는 바람같이/ 바다를 쓸고 밀어 다스리는/ 너 그믐밤을 가로맡은 섭리여/ 그 사람마저 나를 버리더라도 부디/ 아름다운 내 피에 흘러들어와/ 함께 잠들기를 잊지 말아다오//
동해수난(童孩受難) / 설정식
너는 나보다 작고 또 작은데/ 자꾸 달라는 것이 허무하구나// 내가 너를 업고 네가 내게 업혔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구름같이 가벼우냐// 꾸어다 먹은 보리쌀을 갚지 못하여/ 산(山)은 푸르지 못하는 것이냐// 아가 텅 비인 아가/ 내 품 속같이 텅 비인 아가// 길은 원래 십리라 먼 것이 아닌데/ 너는 어느새 나를 닮았느냐// 수수깡을 짜 먹느라고/ 네 이빨은 벌써 하얗게 늙었느냐// 그러나 아가/ 이불보다 두터운 밤이 올 게다// 가벼운 것을 즐기며/ 죽은 듯이 같이 자자 그러면// 내일 아침/ 참새를 잡아 주마// 광주리 덫을 놓고/ 온 하늘에 참새를 다 잡아 주마 그리고// 내년에도 겨울은 올 게다/ 눈이 오시거들랑 목침만한 메주도 쑤자// 수수깡 껍질에 메주콩을 끼어/ 너와 나의 심사(心思) 같은 눈 속에 파묻었다 주마// 아가 텅 비인 아가/ 아 병(病) 없이 시드는 아이에겐 밥이 약인데/ 해는 어쩌자고 다시 길어지는 것이냐//
영혼 / 설정식
노들강물은/ 말썽 많은 이 토지/ 언덕과 고랑을 적시기 전에 우선/ 굶주린 영혼을 불러가기 바빠/ 녹았더냐// 기(旗)를 내리고/ 행렬은 팔짱을 끼는도다/ 공장은 녹이 슬어서 쓸개/ 쓰디쓴 쓸이 도리어 혀는/ 애국가를 구으르지 못하는도다/ 가위눌린 어깨들의/ 꺼진 파도 비를 맞으며/ 시청 앞으로 밀리는도다// 문을 열어주오/ 끼니를 대어주오/ 그대는 누구시오/ 아 말이 통치 않는구나// 고요히 닫으신 당신의 문 안에/ 부인은 몇 살 된 영혼을 또/ 지난밤 사이에 누이셨늬까// 어둠이 굳이 닫은 밤이어/ 누구를 부르러 나는 또/ 어느 문(門)으로 나가야 하나이까// 당치도 않은 봄이/ 누구의 버림받고 잔인하기 위하여/ 하필/ 일어도 못 나는 생명 휘젓기 위하여// 휘라 휘라/ 등은 오직 견디기만 하리/ 이천(利川) 이백리 쌀 두 말 땀은 얼마/ 흘리라 언제는 바로/ 다만 버들가지는 핀가 젖인가/ 흘리기만 하리/ 흐름은 따름인가 아니면 버림받은/ 바다로 가리// 산인가 하마 바람 따라 새로 뻗었을 뿐/ 생각없도다 너와 같도다/ 바위에서 옥(玉)이 스스로 구을러도/ 나는 멀리 우연을 보는도다// 허무를 두드리는 깃이여/ 남지(南枝)는 어데냐/ 한줌 흙 입에 물고/ 차게 누운 영혼은/ 돌아도 눕지 말라//
묘지 / 설정식
새로운 나무토막 비(碑)들이/ 눈에 밟히는// 기척 없는 시월 한낮// 멀건 어느 이야기 속 땅 같은 이곳에서/ 스스로의 숨소리를 두려워할 즈음/ 여기/ 하얀 소나무 관 내음새 풍긴다//
무(舞) / 설정식
연륜간이 자라는 허리를/ 끌어안아서 모자랄 허리를/ 땀으로 깎으면서 육체는/ 청죽(靑竹)에 필적하여 가다가// 피부는 온통 잠을 깨고/ 잠재우기 저렇게 어려운 분노를/ 끌어안기가 힘이 들어 쪼개지는/ 살은 연륜을 타고 청춘 때문에 자꾸 자라서// 머리를 치어드는 것/ 하늘이 무거운 것을 받드는 것으로 하며/ 어깨를 들기 전에 육부(六腑)를 비틀고/ 육부를 비틀기 전에 청춘은/ 배꼽에 사모쳐// 한 팔을 드는 것/ 지평선에 가즈런하여/ 폭압을 견디는 어깨들과/ 책임을 하나로써 하며// 한걸음 옮겨놓되 사랑이 깰까/ 저어하는 시늉인가 시늉도 아닌 것은/ 맵시 이전을 밟고 선/ 조국 땅일 게라 사뿐 떼는 길/ 천리가 지척인 유배길// 낮추어서 죽은 듯이 우리 호흡을/ 주검에 가차이 낮추어서 그리는/ 포물선은 등허리/ 돌아앉은 강산을 넘어/ 우리 함께 가는 길일 게라// 조국으로 가는 길/ 어데 감히 응지(凝脂) 들어설 자리 있으리/ 다만 땀으로 깎은 육체는 청죽(靑竹)/ 청죽(靑竹)마저 멀리 물려 놓고/ 다만 무거이 뜨는 눈/ 하늘에 성신(星晨)을 들이삼킨/ 눈으로 마주치는/ 우리들 잠을 버린 눈으로써/ 다만 내일의 조명을 삼는 게라//
물 긷는 저녁 / 설정식
해 저물어 개로 떨어지는 물소리 맑아가고/ 마을 아주머니네/ 다림질 할 흰옷을/ 이리저리 풀밭에 널 때/ 베적삼 긴 고름을 씹는 처자(處子)의 두 눈동자는/ 이상한 살결의 용솟음으로 짙게 타오른다/ 매태 낀 우물 귀틀에/ 두레박줄 잠깐 멈추고/ 물 우에 가늘게 흔드는 흐릿한 모션에/ 영롱한 꿈 맺어 보다가/ 치마 속으로 삿붓이 흘러 드는 바람결에 놀라/ 주춤하고 둘레를 살피며/ 울렁거리는 두 가슴에 손을 얹는다.//
실소(失笑)도 허락지 않는 절대의 역(域) / 설정식
봄이 오겠으면 오고/ 또 가겠으면 가시오/ 작약이 피려거든 피고 또/ 지려거든 지시오// 뒷짐을 지고 걷습니다/ 한새 아무데/ 쓸데없는 우리들 손일랑/ 착착 접어 뒷짐을 지고/ 그냥 돌아서서 갑니다// 안녕히 계시오/ 민족(民族)을 사랑하려걸랑 하시고/ 나라를 위하려걸랑 위하시고/ 연설도 연회도 독립이라도/ 아 곤두박질이래도 하시오// 우리들 뒷짐지고 가는데야/ 하 죄될 것 무엇이겠소/ 무진강산(無盡江山) 구경하며/ 우리들 주렁주렁 돌아갑니다// 돌아오는/ 우리들의 주권이 서기 이전/ 어느 놈의 손톱/ 어느 놈의 발톱도 거부하는// 차아(嵯峨)한 바위/ 이곳은 실소(失笑)도 허락지 않는/ 절대의 역(域)/ 아 우리 주렁주렁 뒷짐진 인민은/ 뼈를 뼈를 흙 속에 아니라/ 차라리/ 저 바위 가슴에 묻으리다// 봄이 오겠으면 오고/ 가겠으면 가고/ 진달래 붉은 술도 좋을 것이고/ 또 피묻은 손을 씻으려거든/ 예대로 드리운 항복이오/ 버들잎도 훑어/ 굽이굽이 흘리시오// 흘러서는 갈 수 없는/ 우리들의 발이오/ 갈 수 밖에 도리 없는/ 우리들의 길이오/ 세상이 다 형틀에 올라/ 피와 살이 저미고 흘러도/ 모든 호흡이/ 길버러지같이 굴복하여도/ 주권이 설 때까지는/ 아지 못하노라 하는 거부의 역(域)/ 바위 속으로 들어갑니다.//
지도자(指導者)들이여 / 설정식
두둑 커다란 발이겠다/ 저벅저벅 십리 백리라도 시원찮을/ 우리들의 젊은 정갱이를 어데다 두고/ 백주(白晝) 두리번거리며/ 손바닥으로 기어 다니는 우리들을/ 그대들은 어떻다 하느뇨// 견디기 무거운 알알이어든/ 가라/ 차라리 바람같이 가라/ 쭉정이를 날리는/ 바람같이 가라/ 술과 왜콩이 들어오고/ 면포(綿布)와 금덩어리 나가는 바다 있음을/ 그 바다 사나운 물결보다/ 무서운 무지(無知) 예 있음을// 우리들의 꺼진 어깨와/ 허울 벗기운 구릉(丘陵)이 가지런함을/ 아 그리고/ 저산은 영광을 위하여서보다/ 차라리 낙뢰(落雷)를 몸소 받기 위하여 솟아 있음을/ 그대들은 어떻다 하느뇨// 견디기 어려운 멍에어든 벗으라/ 그리고 차라리 수레를 타라/ 우리들의 여윈 어깨로 메운/ 가벼운 이 수레를 타라//
피수레 / 설정식
사직(社稷) 덮세운 무슨 껍데기/ 질그릇 깨어지듯 와지끈하던 날/ 차라리 차라리 하고/ 어미 가슴 헤치고 총부리 받던 날// 장거리로 수레는 피를 흘리고/ 팍팍 찍은 먹은 또 무슨 기(旗)/ 끊어진 다리 깨어지 머리/ 산 시체 가득 싣고 느리기도 하더니/ 울기만 하면/ 보조원(補助員) 온다는 자장가/ 어미나들 피리 속에서 자란 소년(少年)/ 아하 처음 흘리던 긴 눈물/ 일곱 살이던가 너는 두려웠더냐// 만세(萬歲)소리 쓸어간 뒤/ 길은 넓었고 길드라 해서 그랬나/ 용현(龍峴)고개에 올라가서 또 울었더라/ 구름은 드리우고/ 바람은 이는 늡다리벌 내려다보면서/ 짜디짠 눈물 미음같이 삼키며/ 외롭지 않음을 알았더라// 그 봄이 가도록 피리를 잊었고/ 피수레는 고을마다 굴렀던가/ 겻드리 무렵 되면 고래에 올라가/ 멀리 여해진(汝海津) 바다에/ 큰 배 무수히 떠오르기만 기다렸더라//
태양(太陽) 없는 땅 / 설정식
곡식이 익어도 익어도 쓸데없는 땅/ 모든 인민이 등을 대고 돌아선 땅// 물줄기 도리어/ 우리들 입술 찾아 흐르기도 하고/ 흘러도 그러하나/ 벌써 모래 가득 찬 아가리/ 황토(荒土)에 널리기도 한 땅―// 다 못 아는 것은 땅은 영원히/ 우리들의 것이기/ 숲을 찾는 바람같이 달려갈 역사이기/ 백번 천번 어미네 품 속 같은 흙/ 갈아 갈아 창(槍)끝 번득이듯/ 보삽 어루만지는/ 손가락 매듭만이 굵어진 것을// 황소 소 너는/ 언제까지 어질기만 하려느냐/ 가까이 가까이 서로 방불(彷彿)한 그림자들 한군데로/ 남산(南山) 어느 고을에도 있는 남산(南山)으로/ 바람은 비바람은 어데든지/ 숲 울성(鬱盛)한 곳으로 모였다// 땀을 흘려도 흘려도 쓸데없는 땅/ 태양(太陽) 없는 땅// 너희들 무시무시한 무지(無知) 지긋지긋/ 흰 이빨 자국 이문살 멍들은/ 아 소같이 둔하다는 무식한 우리들의 등/ 더운 피 흘린 항거(抗拒)를 위해서는/ 시월(十月)은 오히려/ 서리 내리기조차 주저하였다/ 태양(太陽) 없는 땅// 굵어진 손매듭 손톱 자국 자국/ 꽂은 감자눈/ 뜬 부릅뜬 황소 뉘 배불리기 위해 아/ 성난 남산(南山) 숲 어데서나 이는 거센 바람 일 듯이/ 버리고 달아난 창(槍)끝 같은 보삽들이 꽂힌 대로/ 길게 길게 돌아누운 땅// 곡식이 익어도 익어도 쓸데없는 땅/ 모든 인민이 등을 대고 돌아선 땅//
또 하나 다른 태양 / 설정식
강동지와 조밥을 곰방술로 퍼먹고 자라던 그때부터 봉선화씨를 퉁기는 너의 힘을 나는 알아왔다// 그리고 네가 물 우에 흙과 흙 밑에 물과 또 짜고 슴슴한 바람과 더불어 나의 피를 빚어주기에 무한한 노력을 한 것도 잘 안다.// 애초에 인간이 스스로의 이마를 쪼아서 뚫어 발견한 창(窓)같이 석류열매가 또한 스스로의 세계의 개벽(開闢)을 가르는 것을 볼 때마다/ 그리고 밤송아리 터질 때마다/ 나는 그들의 뒤에 누워 있는 너의 권위에 습복(褶服)하였다// 그러나 무자비한 태양이여/ 나는 너의 평등에/ 항시 불평이었다// 네가 억울하고 무자비하였기에/ 네가 태울 것을 대우지 않고 사를 것을 사르지 않았기에/ 허영을 질투를 그리고 증오를 나는 숭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네가 매운 강동지와 깡조밥을 빚어/ 가장 수고로이 부어줄 때에도 그 잔(盞)은/ 마시면 내 혀는 나를 속이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피는 슬프게도 생명에서 유리되고 말았다/ 피는 슬프게도 짐승에게로 가까이 흘렀다// 다시 말하거니와/ 무자비한 태양이여/ 나는 네가 임금(林檎)을 시굴게 또 달게 그리고 또 떨어뜨리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잘 알았다 하나/ 나는 네가 네 자신밖에 태우지 못하는 슬픔인 줄은 몰랐다//내 눈 앞에서 또 한 개의 임금(林檎)이 떨어진다 그러나/ 죽음으로밖에 떨어질 데 없는 나의 육체는/ 떨어지지도 않으면서 심히 무겁구나 무엇이 들어찼느냐 과연 그러나/ 이제 모든 실오라기와/ 너의 지난 세월의 나의 긴 누더기를 벗어버리고/ 버렸던 탯줄을 찾아 찾은 배꼽을 네 얼굴에 비비련다/ 그러면 또 하나 다른 태양/ 나의 가능한 아내 속에// 과연 자비는 원형을 들어내어/ 너에게로부터/ 나에게로 옮겨다 맡길 것이냐//
거리에서 들려주는 노래 -동무 만나기 전 가던 길 멈추고 발을 구르며 동생을 나무라는 노래 / 설정식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 냉큼 서거라 서라 동생아!/ 이 불쌍한 어린것아 두 다리가 부러졌느냐/ 어서 바삐 형이 일깨울 때 번득 일어나거라/ 그래서 그 널쪼각에 전선(電線) 토막 대인 병신(病身)썰매를/ 앉아서 뭉갤 때 밀던 쇠꼬챙이와 함께 내어던지고/ 내 고함에 발맞춰 두 다리 쭉 뻗고 가슴 버티고/ 얼음 얼린 강판 위를 내달아라.// 다름없는 권(圈)을 더듬어 구을으는 태양의 발산하는 빛이/ 같은 전주(電柱) 밑에 그 시각의 그림자 새길 때/ 나는 동무를 만났노라/ `괴로운 자문자답(自問自答)에/ 가슴 쓰려 발 뻗다가/ 미닫이 뚫었네'/ 그는 이 한 쪼각 시(詩)를 주며 나에게 묻기에/ 부릅뜨고 소리질러 그에게 들려준 노래 있으니―// 동무여! 정신(精神)을 가다듬어/ 크게 땅이 꺼지도록 갱생의 심호흡을 하라/ 그대는 그 숨의 탄력을 얻을지니 미닫이 뚫은 두 다리에/ 한아름 약골의 소아(小我)를 싣고 북악(北岳)에 오르라!/ 그대의 끓는 혈맥(血脈)의 피가/ 벗 디딘 두메에 쏟아져 통(通)할 때가 되면/ 누두형(漏斗形)의 심곡(深谷)에는 용암(鎔巖)이 불꽃을 품은 채 흘러내릴 것이니/ 그 속에 마땅히 그대의 쓰린 가슴의 소아(小我)를 던지라/ 미련(未練)과 모든 기억(記憶)도 함께 불사를지니 그리하면/ 영겁(永劫)으로 타가는 횃불은/ 머지않아 이 나라 소년(小年)들의 두 눈동자에 비치울 것이다./ 그리고 아―그 다음은 말할 수 없다.// 군악보(軍樂譜)에 맞추어 소집나팔 소리 들려야 할 파고다공원(公園) 육각당(六角堂) 돌층계에/ 조선(朝鮮)을 잊은 조용한 아비시니야의 노술사(老術士)가/ 동전(銅錢) 긁어 모으던 손톱을 깎을 때/ 나는 동무를 만났노라/ `절로 넘어지면 울지 않고 일어나는/ 아가야/ 너도 인간(人間)이 다 되었고나// 배고플 때 아플 때 엄마 없을 때/ 어린 애기는 울음도 가지가지/ 오―창작가여 조고마한 시인이여'/ 그는 이 한 쪼각 시(詩)를 주며 나에게 묻기에/ 부릅뜨고 소리질러 그에게 들려준 노래 있으니―/ 동무여 들어라!/ 시인이란 그 공사(工事)에/ 무쇠의 근육과 울뚝 펼쳐진 가슴과 굳세인 허리와/ 그리고 맑고 깊은 눈동자를 가진 위대한 직공(職工)을 가르침이니/ 한 개의 인간이 창궁(蒼穹) 밑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발견이 시(詩)인 것이다./ 이 발견의 기록은 아예 어여쁜 대리석에 아로새길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큰 은행나무에 쪼아 둘 것이니/ 그리하면 그대의 노래는 자라는 나무와 함께 영원히/ 커질 것이다.//
조사(弔辭) -환산(桓山) 이윤재(李允宰) 선생께 드리는 노래 / 설정식
어느 하늘가를 거닐으시는가/ 우리 이렇게 한데 모이면/ 어쩔 수 없이 영혼이라도 믿고 싶은 것이// 살아 생전은 또다시 이리도/ 억울한 주검이 흔하여/ 죽어가서는 영혼이라도 믿고 싶은 것이// 억울한 것은 남았으라/ 이루지 못한 손은 쥐었으라/ 선생은 억울한 선생은 영혼으로 남았으라// 그리하여 우리 선생의 손을 따뜻이 잡게 하시라 행여 들으실까/ 이렇게 한데 모인 겨레의 음성일진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시던 겨레의 말은 다시/ 이렇게 혀와 함께 굳어도// 겨레의 음성일진대/ 행여 알아들으실까/ 우리 이곳에 실로 오래간만에 모이기는 하였어도/ 피 비 내릴 하늘일지/ 아 혀는 하늘보다 가차운 데 있건만/ 냉가슴 타는 부화 돌아앉은 그림자/ 다만 몸부림치는 그림자를 살피시고/ 이 말씀 들으시라// 선생은 배가 진정 고프시었고/ 선생은 진정 배고픈 것을 가벼이 여기시고/ 뒤축이 물러앉은 편리화(便利靴)를 끄을고/ 삼월이 이는 뿌연 먼지 독립문 모슭/ 저놈들 촌토(寸土)를 남기지 않는 발길을 피하여/ 사라지기를 저 세상 가는 길손 같이도 하였으나/ 아는 하필 선생만의 환란이 아니요/ 진정 겨레의 것이었어라// 일본제국주의는 서른하고 또 여섯 해/ 무게 나가는 대추와 사과와/ 하다못해 도토리 열매와/ 저 착하게 엎드린 푸른 드을을/ 어질게 밀고 나온 모든 곡식의 씨앗과/ 우리들의 살이나 다름없는 쌀과 보리를 앗아가기 위하여 그리고/ 감지 못하고 선생같이 세상 떠난/ 원혼들의 검은 눈동자나 다름없이/ 깊이 덮이운 좁쌀같이 깔깔한/ 조선사람의 흙 속에 감초인/ 무게 나가는 구리와 은과 금을 캐어가기 위하여/ 하다못해 짚오라기 칡넝쿨 머리털/ 피마자마저 훑어가기 위하여/ 저놈들은 신의주(新義州) 석하(石下) 백마(白馬)로 부산(釜山) 한끝/ 마지막 조선땅에 부술기를 구을려/ 아 우리 또 하나 다른 심장을 마련케 하여 울리고/ 우리들의 가슴이 두터우면/ 굵은 총알로써 하고/ 여윈 어깨면 여린 칼날을 들어 저미고/ 할애비를 가두어 아비로 하여금 손자를 잡게 하여/ 손으로 끄을기 마소같이 하여/ 대동아전쟁이라는 초열지옥(焦熱地獄)에 잡아가고/ 발로 차기를/ 날짐승의 주검보다 가벼이 하여/ 내 동지의 숨을 끊을 칼을 가는/ 공장에 도야지떼같이 몰아넣어/ 급기야(及其也) 알뜰히도 살뜰히/ 모조리 깡그리 산에서 솔뿌리 캐듯/ 우리들 손톱마저 뽑았어도// 다만 땅에서 이는 더운 기운같이/ 식을래야 식을 수 없는/ 우리들 등어리 땀과/ 죽기 전까지 흐르는 피와/ 죽어서도 전하는/ 우리들의 말을 또한 기어이 앗아가기 위하여/ 철부지 돌부리에 넘어져/ 아이고 어머니 외마디소리를 쳐도/ 벌금을 걷어간 것은 또 그만두고라도/ 우리들 배꼽 아래에 괴이는 생각을 또한/ 어찌 어찌 알았다 하여 목에 칼을 채우고/ 손과 발로 그리는 우리들 몸가짐이/ 저들의 살아 있는 우상과/ 죽은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손과 발목에는 고스랑을 채워/ 대화숙(大和塾)에서 형무소로 보내어/ 간신히 주먹에 남은 뼈끝으로/ 두터운 벽을 또닥여/ 음향으로써 겨우 동지의 안부를 묻게 하고/ 기진하여 먼저 떠난/ 부모의 부음을 듣게 한 것// 선생은 이 역사 속에 말라갔고 우리 또한/ 살찌지 못한 역사는 바로 어제러니/ 싱싱한 봄풀 모두 미나리마냥/ 탐스러이 푸르르고/ 날씨 좋이 넓은 어깨를 찾아 나지막히 날아오던/ 샛문 밖 고개너머 홍살문 앞으로/ 우리 한때 잠시/ 느릿한 그림자를 즐기며/ 선생 또한 무슨 기적인지/ 소리쳐 웃으시던 날 아 역시/ 저놈들이 다 앗아가지 못하고 남긴 것이 있어/ 참나무 절구통같이/ 패이고 또 무거운/ 식민지의 청춘의 가슴일지라도/ 오월과 꽃과 더불어 선생은/ 우리와 함께 계시었고// 손은 어찌하여 그리도 까미하시고/ 잇몸은 어찌하여 그리도 깨끗하지 못하시던가/ 아 황송하여라/ 마상(馬像)이라고 별명을 지어 부르던/ 선생은 진정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어도/ 잘 생기지 못한 선생의 큰 콧구멍은/ 착한 아기같이 떨리기도 하더니// 미구에 마소같이 끄을려/ 홍원(洪原) 철창에 갇히시니/ 선생의 죄는 대체 무엇이오니까/ 몸소 쓰신 조선말사전 원고뭉치로/ 머리칼 설핀 머리 이마를 맞으실 때/ 벌써 버리신 육체라 차라리/ 무쇠 방망이가 오죽 가벼웠으리 다만/ 우리 죽어서 죽어 가서 기어이 다시/ 이 땅에 태어나자고 맹서하셨으라// 갈릴리의 의로운 사나이는 일찍이/ 가시관을 무겁다 하지 않았거니와/ 서생은 육체밖에 더 벗을 것이 없었으라/ 다만 육체를/ 우리 다시 찾기만 하면/ 보람 헛되지 않아 해방은/ 진정 우리들 인민의 것이라 믿었더니/ 아 저 하늘 어느 별의 조화인지/ 낯설은 배 항구에 범람하고/ 또다시 우리 다른 심장을 울리며/ 육중한 트럭들은 달리자/ 이방사람의 밀을 받고 이스라엘의 흙을 파는 자/ 동족은 벌써 아닐 수 밖에 없는 슬픈 칼자루/ 자르는 살과 뼈다구니만 아닌 밤중/ 어두운 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에서/ 슬기로이 횃불을 들고 간/ 선생의 아들 원갑(元甲)은/ 일찍이 아배의 몸이 차디차게 식어나간/ 철창에 오늘 다시 갇히니/ 원갑(元甲)의 죄는 대체 무엇이오니까// 원갑(元甲)은 억울하여라/ 프로메듀스가 억울하였듯이/ 억울한 것은 남으라/ 억울한 것은 나의 살과 뼈와 노래 속에 남으라/ 그리하여 이렇게 나로 하여금/ 저주하고 또 찬송케 하라/ 이방사람의 귀에 대고 흥정을 소근거리는 것을/ 어찌 조선말이라 하리며/ 내 어찌 동생을 잡은 자의 손을 따뜻하게 잡으리며/ 내 어찌 모르는 죄악을 안다 하리오// 이제 내 남조선 비린 바람에 쉬인/ 목청을 울립며/ 선생을 곡하며 또 노래함은/ 반드시 그대 가장 위대한 조선사람인 까닭이 아니요/ 그대 반드시 내 가장 사랑하는 스승인 소치가 아니라/ 원갑(元甲)이가 억울한 탓이요/ 진실로 진실로 어찌할 수 없는 우리들의 어질고 착하고 아름다운/ 열통과 부화라 어찌할 수 없어 원갑(元甲)의 동무들은/ 모두 위대할 수 밖에 없고/ 또 노래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라/ 내 한 음계를 드높이노니/ 환산(桓山) 이윤재(李允宰)/ 아 내 스승은 헤아리시는가//
헌사(獻詞)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에 드리는 / 설정식
화강석/ 천년 낡은 뜻은/ 산을 떠나/ 불기둥 됨이라/ 메어다 쌓아 올린 성채(城砦)/ 굽은 어깨로 늙은/ 인민의 땀은 숭늉이러니까/ 해에 저린/ 고마움이어/ 오장(五臟)에 배이도록/ 천년을 가는 것을// 천년을 가는 것은/ 청동(靑銅)만이오니까/ 꽃을 날리고/ 가시 돋음은/ 뿌리를 지킴이라/ 미음 같은 땀을 삼키며/ 굵은 뿌리로 헤아리는/ 조국의 흙이어/ 네 바람 속에/ 안식을 나르게 할/ 나래 돋치려/ 천년을 묵은 인민의 어깨라// 이제 때 정(正)히 왔음은/ 보람 헛되지 않음이니/ 역사가 스스로 구을리고 또/ 떨어뜨리는 과실이라/ 새삼스러이/ 혈서(血書)를 써서 무삼하리오/ 산을 떠나 불기둥 되어/ 일어선 우람한/ 성채(城砦)는 바위라 그는 곧/ 인민공화국주권(人民共和國主權)이니// 요마(妖魔) 물러섬을 이름이오/ 방위(方位)/ 바로잡힘을 고(告)함이라/ 내 다시/ 경건하게 이르거니와/ 팽배한 세계의 조수(潮水)여/ 쓸리고 또 밀리는/ 민주주의(民主主義)의 흐름이어/ 네 바람 속에/ 깃들인 나래같이/ 활개 펴게 하여/ 천년 늙은/ 어깨를 가벼이 하라//
설정식(薛貞植, 1912년~1953년) 시인
함경남도 단천 출생. 1929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퇴학당하였다. 그 뒤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와 1933년 연희전문학교 별과에 다니기도 하였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상업학교에 편입, 졸업하고 귀국하여 1936년부터 이듬해까지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다가 1937년 미국으로 유학, 마운트유니언대학(영문학 전공)·컬럼비아대학 등을 다녔다. 1940년 귀국하여 광산·농장·과수원 등을 경영하였다. 1932년 《동광》에 발표한 〈거리에서 들려주는 노래〉로 문단에 입문했다. 광복 후 시집으로 《종(鐘)》(1947), 《포도》(1947), 《제신(諸神)의 분노》(1948), 장편소설로 《청춘》(1946)을 출간했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번역했다.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 미군정청에서 근무했다. 1946년 9월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 등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여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문화훈련국에서 활동하였다. 1951년 휴전회담 통역을 담당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남로당의 박헌영, 이강국, 리승엽, 임화 등을 숙청할 때 사형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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