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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 /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에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 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라도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 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집 / 이용악
밤마다 꿈이 많아서/ 나는 겁이 많아서/ 어깨가 처지는 것일까// 끝까지 끝까지 웃는 낯으로/ 아이들은 층층계를 내려가버렸나 본데/ 벗 없을 땐/ 집 한 칸 있었으면 덜이나 곤하겠는데// 타지 않는 저녁 하늘을/ 가벼운 병처럼 스쳐 흐르는 시장기/ 어쩌면 몹시두 아름다워라/ 앞이건 뒤건 내 가차이 모올래 오시이소// 눈감고 모란을 보는 것이요/ 눈감고/ 모란을 보는 것이요//
령(嶺) / 이용악
너는 나를 밋고/ 나도 너를 미드나/ 嶺은 높다 구름보다도 嶺은 높다// 바람은 병든 암사슴의 숨결인 양 풀이 죽고/ 太陽이 보이느냐/ 이제 숩속은 치떨리는 神話를 불으려니/ 왼몸에 쏘다지는 찬 땀/ 마음은 空虛와의 지경을 맴돈다// 너의 입술이 파르르으 떨고/ 어어둑한 바위 틈을 물러설 때마다/ 너의 눈동자는 사로잡힌다/ 짐승보담 무서운 그 무서운 무서운/ 도끼를 멘 초부(樵夫)의 幻影에// 일연감색으로 물든 西天을 보도 못하고/ 날은 저물고 어둠이 치밀어 든다./ 女人아/ 너의 노래를 불러다오/ 찌르레기 소리 너의 전부를 점령하기 전에/ 그러케 明朗하던 너의 노래를 불러다오// 나는 너를밋고/ 너도 나를 미드다/ 嶺은 높다 구름보다도 嶺은 높다//
풀버렛소리 가득차잇섯다 / 이용악
우리집도 안이고/ 일갓집도 안인 집/ 고향은 더욱 안인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업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차 잇섯다// 노령(露領)을 단이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듸 남겨두는 말도 업섯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이즈섯다/ 목침을 반듯이 벤채// 다시 ㅅ드시잔는 두 눈에/ 피지못한 ㅅ굼의 ㅅ곳봉오리가 ㅅ갈안ㅅ고/ 어름짱에 누우신듯 손발은 식어갈ㅅ분/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첫다/ 때 느즌 의원(醫員)이 아모말 업시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빗 미명은 고요히/ 낫츨 덥헛다// 우리는 머리맛헤 엎듸여/ 잇는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엇고/ 아버지의 침상(寢床)업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차 잇섯다//
오랑캐꽃 / 이용악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 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두메산골 1 / 이용악
들창을 열면 물구지떡 내음새 내달았다/ 쌍바라지 열어 제치면/ 썩달나무 썩는 냄새 유달리 향그러웠다// 뒷산에도 봋나무/ 앞산도 군데군데 봋나무// 주인장은 매사냥을 다니다가/ 바위틈에서 죽었다는 주막집에서/ 오래오래 옛말처럼 살고 싶었다//
두메산골 2 / 이용악
아이도 어른도/ 버섯을 만지며 히히 웃는다/ 독한 버섯인 양 히히 웃는다// 돌아 돌아 물골 따라가면 강에 이른대/ 영 넘어 여러 영 넘어가면 읍이 보인대// 맷돌방아 그늘도 토담 그늘도/ 희부옇게 엷어지는데/ 어디서 꽃가루 날아오는 듯 눈부시는 산머리// 온 길 갈 길 죄다 잊어버리고/ 까맣게 쓰러지고 싶다//
두메산골 3 / 이용악
참나무 불이 이글이글한/ 오지화로에 감자 두어 개 묻어놓고/ 멀어진 서울을 그리는 것은/ 도포 걸친 어느 조상이 귀양 와서/ 일삼던 버릇일까/ 돌아갈 때엔 당나귀 타고 싶던/ 여러 영에/ 눈은 내리는데 눈은 내리는데//
두메산골 4 / 이용악
소곰토리 지웃거리며 돌아오는가/ 열두 고개 타박타박 당나귀는 돌아오는가/ 방울 소리 방울 소리 말방울 소리 방울 소리//
비늘 하나 / 이용악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니요/ 꽃향기 그윽이 풍기거나/ 따뜻한 뺨에 볼을 부비는 것이 아니요/ 안개 속 다만 반짝이는 비늘 하나/ 모든 사람이 밟고 지나간 비늘 하나//
달 있는 제사 / 이용악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아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불 / 이용악
모든 것이 잠잠히 끝난/ 다음에도/ 당신의 벗이라야 할 것이// 솟아오르는 빛과 빛과 몸을 부비면/ 한결같이 일어설 푸른 비늘과 같은/ 아름다움/ 가슴마다 피어// 싸움이요/ 우리 당신의 이름을 빌어/ 미움을 물리치는 것이요//
꽃가루 속에 / 이용악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 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직이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슬픈 사람들끼리 / 이용악
다시 만나면 알아 못 볼/ 사람들끼리/ 비웃이 타는 데서/ 타래곱과 도루메기와/ 피 터진 닭의 볏 찌르르 타는/ 아스라한 연기 속에서/ 목이랑 껴안고/ 웃음으로 웃음으로 헤어져야/ 마음 편쿠나/ 슬픈 사람들끼리//
강가 / 이용악
아들이 나오는 올 겨울엔 걸어서라두/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 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 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쵠지/ 끄슬은 돌 두어 개 시름겨웁다//
구슬 / 이용악
마디마디 구릿빛 아무렇던/ 열 손가락/ 자랑도 부끄러움도 아닐 바에// 지혜의 강에 단 한 개의 구슬을 바쳐/ 밤이기에 더욱 빛나야 할 물 밑// 온갖 바다에로 새 힘 흐르고 흐르고// 몇 천 년 뒤/ 내 닮지 않은 어느 아이의 피에 남을지라도/ 그것은 헛되잖은 이김이라// 꽃향기 숨 가쁘게 날아드는 밤에사/ 정녕 맘 놓고 늙언들 보자요//
다리 위에서 / 이용악
바람이 거센 밤이면/ 몇 번이고 꺼지는 네모난 장명등을/ 궤짝 밟고 서서 몇 번이고 새로 밝힐 때/ 누나는/ 별 많은 밤이 되려 무섭다고 했다// 국숫집 찾아 가는 다리 위에서/ 문득 그리워지는/ 누나도 나도 어려선 국숫집 아이// 단오도 설도 아닌 풀벌레 우는 가을철/ 단 하루/ 아버지의 제삿날만 일을 쉬고/ 어른처럼 곡을 했다//
벽을 향하면 / 이용악
어느 벽에도 이름 모를 꽃/ 향그러이 피어 있는 함 속 같은 방이래서/ 기꺼울 듯 어지러웁다// 등불을 가리고 검은 그림자와 함께/ 차차로 멀어지는 벽을 향하면/ 날라리 불며/ 날라리 불며 모여드는 옛적 사람들// 검푸른 풀섶을 헤치고 온다/ 배암이 알 까는 그윽한 냄새에 불그스레/ 취한 얼굴들이 해와 같다//
무자리와 꽃 / 이용악
가슴은 뫼 풀 우거진 벌판을 묻고/ 가슴은 어느 초라한 자리에 묻힐지라도/ 만날 것을/ 아득한 다음날 새로이 만나야 할 것을// 마음 그늘진 두덩에 엎디어/ 함께 살아온 너/ 어디로 가나// 불타는 꿈으로 하여 자랑이던/ 이 길을 네게 나누자/ 흐린 생각을 밟고 너만 어디로 가나// 눈을 감으면 너를 따라/ 자욱 자욱 꽃을 디딘다/ 휘휘로운 마음에 꽃잎이 흩날린다//
버드나무 / 이용악
누나랑 누이랑/ 뽕 오디 따러 다니던 길가엔/ 이쁜 아가씨 목을 맨 버드나무// 백년 기다리는 구렁이 숨었다는 버드나무엔/ 하루살이도 호랑나비도 들어만 가면/ 다시 나올 성싶잖은/ 검은 구멍이 입 벌리고 있었건만// 북으로 가는 남도치들이/ 산길을 바라보고선 그만 맥을 버리고/ 코올콜 낮잠 자던 버드나무 그늘// 사시사철 하얗게 보이는/ 머언 봉우리 구름을 부르고/ 마을선/ 평화로운 듯 밤마다 등불을 밝혔다//
해가 솟으면 / 이용악
잠잠히 흘러내리는/ 개울을 따라/ 마음 섧도록 추잡한 거리로 가리/ 날이 갈수록 새로이 닫히는/ 무거운 문을 밀어제치고// 조그마한 자랑을 만날지라도/ 함부로 푸른 하늘을 대할지라도/ 내사/ 모자를 벗어 반갑게 흔들어 주리라// 숱한 꽃씨가 가슴에서 튀어나는 깊은 밤이면/ 손뼉 소리 아스랗게 들려오는 손뼉 소리// 멀어진 모오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호올로 거리로 가리// 욕된 나날이 정녕 숨 가쁜/ 곱새는 등곱새는/ 엎디어 이마를 적실 샘물도 없어//
노래 끝나면 / 이용악
손뼉 칩시다 정을 다하여/ 우리 손뼉 칩시다// 노새나 나귀를 타고/ 방울소리며 갈꽃을 새소리며 달무리를/ 즐기려 가는 것은 아니올시다// 청기와 푸른 등을 밟고 서서/ 웃음 지으십시오/ 아이들은 한결같이 손을 저으며/ 멀어지는 나의 뒷모양 물결치는 어깨를/ 눈부시게 바라보라요// 누구나 한번은 자랑하고 싶은/ 모든 사람의 고향과/ 나의 길은 황홀한 꿈속에 요요히 빛나는 것// 손뼉 칩시다 정을 다하여/ 우리 손뼉 칩시다//
열두 개의 층층계 / 이용악
열두 개의 층층계를 올라와/ 옛으로 다시 새 날로 통하는 열두 개의/ 층층계를 양볼 붉히고 올라와/ 누구의 입김이 함부로 이마를 스칩니까/ 약이요 네 벽에 층층이 쌓여 있는 것/ 어느 쪽을 무너트려도 나의 책들은 아니올시다/ 약상자뿐이요 오래 묵은 약병들이요// 청춘을 드리리다 물러가시렵니까/ 내 숨 쉬는 곳곳에 숨어서 부르는 이/ 모두 다 멀리로 떠나보내고/ 어둠과 어둠이 마주쳐 찬란히 빛나는 곳/ 땅을 향해/ 흔들리는 열두 개의 층층계를/ 영영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죽음 / 이용악
별과 별들 사이를/ 해와 달 사이 찬란한 허공을 오래도록 헤매다가/ 끝끝내/ 한번은 만나야 할 황홀한 꿈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높은 덕이요 똑바른 사랑이요/ 오히려 당신은 영원한 생명// 나라에 큰 난 있어 사나이들은 당신을 향할지라도/ 두려울 법 없고/ 충성한 백성만을 위하여 당신은/ 항상 새 누리를 꾸미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이르지 못한 바닷가 같은 데서/ 아무도 살지 않은 풀 우거진 벌판 같은 데서/ 말하자면/ 헤아릴 수 없는 옛적 같은 데서/ 빛을 거느린 당신//
등을 동그리고 / 이용악
한 방 건너 관 덮는 모다귀소리 바삐 그친다/ 목 메인 울음 땅에 땅에 슬피 내린다// 흰 그림자 바람벽을 거닐어/ 니어니어 사라지는 흰 그림자 등을 묻어 무거운데/ 아무 은혜도 받들지 못한 여러 밤이 오늘 밤도/ 유리창은 어두워// 무너진 하늘을 헤치며 별빛 흘러가고/ 마음의 도랑을/ 시들은 풀잎이 저어가고/ 나의 병실엔 초라한 돌문이 높으게 솟으라선다// 어느 나라이고 새야/ 외로운 새야 벙어리야 나를 기다려 길이 울라/ 너의 사람은 눈을 가리고 미웁다//
벌판을 가는 것 / 이용악
몇 천 년 지난 뒤 깨어났음이뇨/ 나의 밑 다시 나의 밑 잠자는 혼을 밟고/ 새로이 어깨를 일으키는 것/ 나요/ 불길이요// 쌓여 쌓여서 훈훈히 썩은 나뭇잎들을 헤치며/ 저리 환하게 열린 곳을 뜻함은/ 세월이 끝나던 날/ 오히려 높디높았을 나의 하늘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 거니는 자욱마다 새로운 풀 폭 하도 푸르러/ 뒤돌아 누구의 이름을 부르료// 이제 벌판을 가는 것/ 바람도 비도 눈보라도 지나가버린 벌판을/ 이렇게 많은 단 하나에의 길을 가는 것/ 나요/ 끝나지 않는 세월이요//
항구에서 / 이용악
영원과 같은 그러한 것이 아득히 바라뵈는 그러한 꿈길을 끝끝내 돌아온 나의 청춘이요 바쁘게 떠나가는 검은 기선과 몰려서 우짖는 갈매기의 떼// 구름 아래 뭉쳐선 흩어지는 먹구름 아래 당신네들과 나의 어깨에도 하늘은 골고루 머물러 얼마나 멋이었습니까// 꽃이랑 꺾어 가슴을 치레하고 우리 휘파람이나 간간히 불어 보자요 훨훨 옷깃을 날리며 머리칼을 날리며 서로 헤어진 멀고먼 바닷가에서 우리 한번은 웃음지어 보자요// 그러나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 항상 생각는 것은 친구의 얼굴들이 아니었습니다 갈바리의 산이요 우레소리와 함께 둘로 갈라지는 갈바리의 산// 희망과 같은 그러한 것이 가슴에 싹트는 그러한 밤이면 무슨 짐승처럼 우는 뱃고동을 들으며 바다로 보이지 않는 바다로 휘정휘정 내려가는 것이요//
다시 항구에 와서 / 이용악
모든 기폭이 잠잠히 내려앉은/ 이 항구에/ 그래도 남은 것은 사람이올시다// 한마디의 말도 배운 적 없는 듯한 많은 사람 속으로/ 어질게 생긴 이마며 수수한 입술이며/ 그저 좋아서/ 나도 한마디의 말없이 우줄우줄 걸어나가면/ 저리 산 밑에서 들려오는 돌 깨는 소리// 시바우라 같은 데서 혹은 메구로 같은 데서/ 함께 일하고 함께 잠자며/ 퍽도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로만 여겨집니다// 서로 모르게/ 어둠을 타 구름처럼 흩어졌다가/ 똑같이 고향이 그리워서/ 돌아온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이 너무 푸르러/ 갈매기는 죽지에 흰 목을 묻고/ 어느 옴쑥한 바위틈 같은 데 숨어버렸나 본데/ 차라리 누구의 아들도 아닌 나는 어찌하여/ 검붉은 흙이 자꾸만 씹고 싶습니까//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이용악
삽살개 짖는 소리/ 눈포래에 얼어붙는 섣달 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자옥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 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어머닌/ 서투른 마우재말도 들려 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박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어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거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텁다// 등대와 나와/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들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 오도 못할 우라지오//
뒷길로 가자 / 이용악
우러러 받들 수 없는 하늘/ 검은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온몸을 굽이치는/ 병든 흐름도 캄캄히 저물어 가는데// 예서 아는 이를 만나면 숨어버리지/ 숨어서 휘정휘정 뒷길을 걸을라치면/ 지나간 모든 날이 따라오리라// 썩은 나무다리 걸쳐 있는 개울까지/ 개울 건너 또 개울 건너/ 빠알간 숯불에 비웃이 타는 선술집까지// 푸르른 새벽인들 내게 없었을라구/ 나를 에워싸고/ 외치며 쓰러지는 수없이 많은 나의 얼굴은/ 파리한 이마는 입술은 잊어버리고자/ 나의 해바라기는/ 무거운 머리를 어느 가슴에 떨어트리랴// 이제 검은 하늘과 함께/ 줄기줄기 차가운 비 쏟아져 내릴 것을/ 네거리는 싫어 네거리는 싫어/ 히 히 몰래 웃으며 뒷길로 가자//
밤이면 밤마다 / 이용악
가슴을 밟고 미칠 듯이 걸어오는 이/ 음침한 골목길을 따라오는 이// 바라지 않는 무거운 손이 어깨에 놓여질 것만 같습니다/ 붉은 보재기로 나의 눈을 가리우고 당신은/ 눈 먼 사나이의 마지막을/ 흑 흑 느끼면서 즐길 것만 같습니다// 메레토스여 검은 피를 받은 이/ 밤이면 밤마다/ 내 초조로이 돌아가는 좁은 길이올시다// 술잔을 빨면 모든 영혼을 가벼이 물리칠 수 있었으나/ 나중에 내 돌아가는 곳은/ 허깨비의 집이올시다 캄캄한 방이올시다/ 거기 당신이 제우스와 함께 가두어 뒀습니다/ 당신이 엿보고 싶은 가지가지 나의 죄를// 그러나 어서 물러가십시오/ 푸른 정녕코 푸르른 하늘이 나를 섬기는 날/ 당신을 찾아/ 여러 강물을 건너가겠습니다/ 자랑도 눈물도 없이 건너가겠습니다//
길 / 이용악
여덟 구멍 피리며 앉으랑 꽃병/ 동그란 밥상이며 상을 덮은 흰 보자기/ 아내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이 고냥 고대로/ 한때의 빛을 머금어 차라리 휘휘로운데/ 새벽마다 뉘우치며 깨는 것이 때론 외로워/ 술도 아닌 차도 아닌/ 뜨거운 백탕을 훌훌 마시며 차마 어질게 살아 보리// 아내가 우리의 첫 애길 보듬고/ 먼 길 돌아오면/ 내사 고운 꿈 따라 횃불 밝힐까/ 이 조그마한 방에 푸르른 난초랑 옮겨놓고/ 나라에 지극히 복된 기별이 있어 찬란한 밤마다/ 숱한 별 우러러 어찌야 즐거운 백성이 아니리// 꽃잎 헤칠수록 깊어만 지는 거울/ 호올로 차지하기엔 너무나 큰 거울을/ 언제나 똑바로 앞으로만 대하는 것은/ 나의 웃음 속에/ 우리 애기의 길이 틔어 있기에//
전라도 가시내 /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 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아/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가 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싹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 아닌 봄을 불러 줄게/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나라에 슬픔 있을 때 / 이용악
자유의 적 꼬레이어를 물리치고저/ 끝끝내 호올로 일어선 다뷔데는 소년이었다/ 손아귀에 감기는 단 한 개의 돌멩이와/ 팔맷줄 둘러메고/ 원수를 향해 사나운 짐승처럼 내달린/ 다뷔데는 이스라엘의 소년이었다// 나라에 또다시 슬픔이 있어/ 떨리는 손등에 볼따구니에 이마에/ 싸락눈 함부로 휘날리고 바람 매짜고/ 피가 흘러/ 숨은 골목 어디선가 성낸 사람들/ 동포끼리 옳잖은 피가 흘러/ 저마다의 가슴에 또다시 쏟아져내리는/ 어둠을 헤치며/ 생각는 것은 다만 다뷔데// 이미 아무것도 갖지 못한 우리/ 일제히 시장한 허리를 졸라맨 여러 가지의/ 띠를 풀어 탄탄히 돌을 감자/ 나아가자 원수를 향해 우리 나아가자/ 단 하나씩의 돌멩일지라도 틀림없는/ 꼬레이어의 이마에 던지자//
노한 눈들 / 이용악
불빛 노을 함빡 갈앉은 눈이라 노한 노한 눈들이라.// 죄다 바숴진 창으로 추위가 다가서는데 몇번째인가 어찌 하여 우리는 또 밀려나가야 하는 우리의 회관에서.// 더러는 어디루 갔나 다시 황막한 벌판을 안고 숨어서 쳐다보는 푸르른 하늘이며 밤마다 별마다에 가슴 맥히어 차라리 울지도 못할 옳은 사람들 정녕 어디서 움트는 조국을 그리는 것일까.// 폭풍이어 일어서는 것 폭풍이어 폭풍이어 불길처럼 일어서는 것.// 구보랑 회남이랑 홍구랑 영석이랑 우리 그대들과 함께 정들인 낡은 걸상이며 책상을 둘러메고 지나간 데모에 휘날리던 깃발까지도 소중히 감아들고 지금 저무는 서울 거리에 갈 곳 없이 나서련다.// 내사 아마 퍽도 약한 시인이길래 부끄러이 낯을 돌리고 그저 울음이 복받치는 것일까.// 불빛 노을 함빡 갈앉은 눈이라 노한 노한 눈들이라.//
북쪽 / 이용악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그리움 /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세/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너는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 이용악
「겨울이 다 갔다고 생각자/ 저 들창에/ 봄빛 다사로이 헤어들게」// 너는 불 꺼진 토기화로를 끼고 앉아/ 나는 네 잔등에 이마를 대고 앉아/ 우리는 봄이 올 것을 믿었지/ 식아/ 너는 때로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봄이 오기 전 할미집으로 돌아가던/ 너는 병든 얼굴에 힘써 웃음을 새겼으나/ 고동이 울고 바퀴 돌고 쥐었던 손을 놓고/ 서로 머리숙인 채 눈과/ 눈이 마주칠 복된 틈은 다시 없었다// 일년이 지나 또 겨울이 왔다/ 너는 내 곁에 있지 않다/ 너는 세상 누구의 곁에도 있지 않다// 너의 눈도 귀도 밤나무 그늘에 길이 잠들고/ 애꿎은 기억의 실마리가 풀리기에/ 오늘도 등신처럼 턱을 받들고 앉아/ 나는 저 들창만 바라본다// 「봄이 아주 왔다고 생각자/ 너도나도/ 푸른 하늘 아래로 뛰어나가게」// 너는 어미 없이 자란 청년/ 나는 애비 없이 자란 가난한 사내/ 우리는 봄이 올 것을 믿었지/ 식아/ 너는 때로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국경 / 이용악
새하얀 눈송이를 낳은 뒤 하늘은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다 얼어 죽은 산(山)토끼처럼 지붕 지붕은 말이 없고 모진 바람이 굴뚝을 싸고 돈다 강 건너 소문이 그 사람보다도 기다려지는 오늘 폭탄을 품은 젊은 사상이 피에로의 비가에 숨어 와서 유령처럼 나타날 것 같고 눈 위에 크다아란 발자욱을 또렷이 남겨 줄 것 같다 오늘//
등잔 밑 / 이용악
모두 벼슬 없는 이웃이래서/ 은쟁반 아닌/ 아무렇게나 생긴 그릇이 되려/ 머루며 다래까지도 나눠 먹기에 정다운 것인데/ 서울 살다 온 사나인 그저 앞이 흐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함께/ 모올래 울고 싶은 등잔 밑 차마 흐리어// 막차 갈 때마다 / 이용악
어쩌자고 자꾸만 그리워지는/ 당신네들을 깨끗이 잊어버리고자/ 북에서도 북쪽/ 그렇습니다 머나먼 곳으로 와 버린 것인데/ 산굽이 돌아 돌아 막차 갈 때마다/ 먼지와 함께 들이켜기엔/ 너무나 너무나 차거운 유리잔//
등불이 보고 싶다 / 이용악
하늘이 금시 무너질 양 천둥이 울고/ 번갯불에 비치는 검은 봉우리 검은 봉우리// 미끄러운 바위를 안고 돌아 몇 굽이 돌아봐도/ 다시 산 사이 험한 골짜기 자욱마다 위태롭다// 옹골찬 믿음의 불수레 굴러 조마스런 마음을 막아 보렴/ 앞선 사람 뒤떨어진 벗 모두 입 다물어 잠잠// 등불이 보고 싶다/ 등불이 보고 싶다// 귀밑 짓는 두멧사람아/ 멀리서래두 너의 강아지를 짖겨다오//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 이용악
해당화 정답게 핀 바닷가/ 너의 무덤 작은 무덤 앞에 머리 숙이고/ 숙아/ 쉽사리 돌아서지 못하는 마음에/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네 애비 흘러간 뒤/ 소식 없던 나날이 무거웠다/ 너를 두고 네 어미 도망한 밤/ 흐린 하늘은 죄로운 꿈을 머금었고/ 숙아/ 너를 보듬고 새우던 새벽/ 매운 바람이 어설궂게 회오리쳤다// 성 위 돌배꽃/ 피고 지고 다시 필 적마다/ 될 성싶이 크더니만/ 숙아/ 장마 개인 이튿날이면 개울에 띄운다고/ 돛 단 쪽배를 만들어 달라더니만// 네 슬픔을 깨닫기도 전에 흙으로 갔다/ 별이 뒤를 따르지 않아 슬프고나/ 그러나 숙아/ 항구에서 피 말라 간다는/ 어미 소식을 모르고 갔음이 좋다/ 아편에 부어 온 애비 얼굴을/ 보지 않고 갔음이 다행타// 해당화 고운 꽃을 꺾어/ 너의 무덤 작은 무덤 앞에 놓고/ 숙아/ 살포시 웃는 너의 얼굴을/ 꽃 속에서 찾아 보려는 마음에/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고독 / 이용악
땀내 나는/ 고달픈 사색 그 복판에/ 소낙비 맞은 허수애비가 그리어졌다/ 모초리 수염을 꺼리는 허수애비여/ 주잔ㅈ은 너의 귀에/ 풀피리 소리마저 멀어졌나 봐//
구슬 / 이용악
마디마디 구리빛 아무렇던/ 열 손가락/ 자랑도 부끄러움도 아닐 바에// 지혜의 강에 단 한 개의 구슬을 바쳐/ 밤이기에 더욱 빛나야 할 물 밑// 온갖 바다에로 새 힘 흐르고 흐르고// 몇천년 뒤/ 내/ 닮지 않은 어느 아이의 피에 남을지라도/ 그것은 헛되잖은 이김이라// 꽃향기 숨가쁘게 날아드는 밤이사/ 정녕 맘놓고 늙언들 보자요//
그래도 남으로만 달린다 / 이용악
한결 해말쑥한 네 이마에/ 촌스런 시름이 피어오르고/ 그래도/ 우리를 실은/ 차는 남으로 남으로만 달린다// 촌과 나루와 거리를/ 벌판을 숲을 몇이나 지나왔음이냐/ 눈에 묻힌 이 고개엔/ 까마귀도 없나 보다// 보리밭 없고/ 흐르는 뗏노래라곤/ 더욱 못 들을 곳을 향해/ 암팡스럽게 길 떠난/ 너도 물새 나도 물새/ 나의 사람아 너는 울고 싶고나// 말없이 쳐다보는 눈이/ 흐린 수정알처럼 외롭고/ 때로 입을 열어 시름에 젖는/ 너의 목소리 어선 없는 듯 가늘다// 너는 차라리 밤을 부름이 좋다/ 창을 열고/ 거센 바람을 받아들임이 좋다/ 머릿속에서 참새 재잘거리는 듯/ 나는 고달프다 고달프다// 너를 키운 두메산골에선/ 가라지의 소문이 뒤를 엮을 텐데/ 그래도/ 우리를 실은/ 차는 남으로 남으로만 달린다//
금붕어 / 이용악
유리 항아리 동글한 품에/ 견디질 못해 삼삼 맴돌아도/ 날마다 저녁마다 너의 푸른 소원은 저물어간다/ 숨결이 도롬도롬 방울져 공허로웁다// 하얗게 미치고야 말 바탕이 진정 슬프다/ 바로 눈앞에서 오랑캐꽃은 피어도/ 꽃수염 간지럽게 하늘거려도// 반츨한 돌기둥이 안개에 감기듯/ 아물아물 사라질 때면/ 요사스런 웃음이 배암처럼 기어들 것만 같애/ 싸늘한 마음에 너는 오시러운 피를 흘린다//
길손의 봄 / 이용악
석단(石段)을 올라와/ 잔디에 조심스레 앉아/ 뾰족뾰족 올라온 새싹을 뜯어 씹으면서/ 조곰치도 아까운 줄 모르는 주림/ 지난 밤/ 휘파람은 돌배꽃 피는 동리(洞里)가 그리워/ 북으로 북으로 갔다//
꽃가루 속에 / 이용악
배추꽃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 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나를 만나거든 / 이용악
땀 마른 얼굴에/ 소금이 싸락싸락 돋힌 나를/ 공사장 가까운 숲속에서 만나거든/ 내 손을 쥐지 말라/ 만약 내 손을 쥐더라도/ 옛처럼 네 손처럼 부드럽지 못한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아 다오// 주름 잡힌 이마에/ 석고처럼 창백한 불만이 그윽한 나를/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 먹었느냐고 묻지 말라/ 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고/ 꿈 같은 이야기는 이야기의 한 마디도/ 나의 침묵에 침입하지 말아 다오// 폐인인 양 시들어져/ 턱을 고이고 앉은 나를/ 어둑한 폐가(廢家)의 회랑에서 만나거든/ 울지 말라/ 웃지도 말라/ 너는 평범한 표정을 힘써 지켜야겠고/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아 다오//
눈 내리는 거리에서 / 이용악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오히려 빛나는 밤을 헤치고/ 내가 거니는 길은 어느 곳에 이를지라도/ 뱃머리에 부딪쳐 둘로 갈라지는 파도 소리요/ 나의 귓속을 지켜 길이 사라지지 않는 것/ 만세요 만세소리요// 단 한 번 정의의 나래를 펴기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참아 왔습니까// 이젠 오랜 치욕과 사슬은 끊어지고/ 잠들었던 우리의 바다가 등을 일으켜/ 동양의 창문에 참다운 새벽이 동트는 것이요/ 승리요/ 적을 향해 다만 앞을 향해/ 아세아의 아들들이 뭉쳐서 나아가는 곳/ 승리의 길이 있을 뿐이오// 머리 위 어깨 위 내려 내려서 쌓이는/ 하아얀 눈을 차라리 털지도 않고/ 호올로 받들기엔 너무나 무거운 감격을 나누기 위하여/ 누구의 손일지라도/ 나는 정을 다하여 굳게 쥐고 싶습니다//
도망하는 밤 / 이용악
바닷바람이 묘지를 지나/ 무너지다 남은 성(城) 굽이를 돌아 마을을 지나/ 바닷바람이 어둠을 헤치고 달린다/ 밤/ 등잔불들은 졸음 졸음 눈을 감았다// 동무야/ 무엇을 뒤돌아보는가/ 너의 터전에 비둘기의 단란(團欒)이 질식한 지 오래다/ 가슴을 치면서 부르짖어 보라/ 너의 고함은 기울어진 울타리를 멀리 돌아/ 다시 너의 귓속에서 신음할 뿐/ 그 다음/ 너는 식욕의 항의에 거꾸러지고야 만다// 기름기 없는 살림을 보지만 말아도/ 토실토실 살이 찔 것 같다/ 뼉다구만 남은 마을……/ 여기서 생활은 가장 평범한 인습이었다// 가자,/ 시원히 떠나가자// 흘러가는 젊음을 따라/ 바람처럼 떠나자// 뚝장군의 전설을 가진 조고마한 늪/ 늪을 지켜 숨줄이 마른 썩달나무에서/ 이제/ 늙은 올빼미 흉몽(凶夢)스런 울음을 꾀이려니/ 마을이 떨다/ 이 밤이 떨다/ 어서 지팽이를 옮겨 놓아라//
밤 / 이용악
어디서 고양이래두 울어 준다면/ 밤/ 온갖 별이 눈감은 이 외롬에서/ 삼가 머리를 들고/ 나는 마암을 불러 나의 샘터로 돌아가지 않겠나// 나를 반듯이 눕힌 널판을 허비다도/ 배와 두 다리에/ 징글스럽게 감긴 누더기를 쥐어뜯다도/ 밤/ 뛰어 뛰어 높은 재를 넘은 어린 사슴처럼/ 오솝소리 맥을 버리고/ 가벼이 볼을 만지는 야윈 손// 손도 얼굴도 끔찍히 축했으리라만/ 놀라지 말라/ 밤/ 곁에 잠든/ 수염이 길어 흉한 사내는/ 가을과 겨울 그리고 풀빛 기름진 봄을/ 이 굴에서 짐승처럼 살아 왔단다// 생각이 자꾸자꾸만 말라 들어간다/ 밤/ 들리지 않는 소리에/ 오히려 나의 귀는 벽과 천정이 두렵다//
동면하는 곤충의 노래 / 이용악
산과 들이/ 늙은 풍경에서 앙상한 계절을 시름할 때/ 나는 흙을 뒤지고 들어왔다/ 차군 달빛을 피해/ 둥글소의 앞발을 피해/ 나는 깊이 땅 속으로 들어왔다// 멀어진 태양은/ 아직 꺼머첩첩한 의혹의 길을 더듬고/ 지금 태풍이 미쳐 날뛴다/ 얼어빠진 혼백들이 지온(地溫)을 불러 곡성이 높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체온에 실망한 적이 없다// 온갖 어둠과의 접촉에서도/ 생명은 빛을 더불어 사색이 너그럽고/ 갖은 학대를 체험한 나는/ 날카로운 무기를 장만하리라/ 풀풀의 물색으로 평화의 의장(衣裝)도 꾸민다// 얼음 풀린/ 냇가에 버들이 휘늘어지고/ 어린 종다리 파아란 항공(航空)을 시험할 때면/ 나는 봄볕 짜듯한 땅 우에 나서리라/ 죽은 듯 눈감은 명상―/ 나의 동면(冬眠)은 위대한 약동의 전제다//
두더지 / 이용악
숨막히는 어둠에 벙어리 되어 떨어진/ 가난한 마음아// 일곱 색 무지개가 서도 사라져도/ 태양을 우러러 웃음을 갖지 않을 네건만// 때로 불타는 한 줄 빛으로서/ 네 맘은 아프고 이즈러짐이 또한 크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 이용악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고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두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우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 오늘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만추(晩秋) / 이용악
노오란 은행잎 하나/ 호리호리 돌아 호수에 떨어져/ 소리 없이 호면(湖面)을 미끄러진다/ 또 하나―// 조이삭을 줍던 / 요즈음 낙엽 모으기에 더욱더/ 해마알개졌고// 하늘/ 하늘을 쳐다보는 늙은이 뇌리에는/ 얼어 죽은 친지 그 그리운 모습이/ 또렷하게 피어오른다고/ 길다란 담뱃대의 뽕잎 연기를/ 하소에 돌린다// 돌개바람이 멀지 않아/ 어린것들이/ 털 고운 토끼 껍질을 벗겨/ 귀걸개를 준비할 때/ 기름진 밭고랑을 가져 못 본/ 부락민 사이엔/ 지난해처럼 또 또 그 전해처럼/ 소름 끼친 대화가 오도도오 떤다//
무자리와 꽃 / 이용악
가슴은 뫼풀 우거진 벌판을 묻고/ 가슴은 어느 초라한 자리에 묻힐지라도/ 만날 것을/ 아득한 다음날 새로이 만나야 할 것을// 마음 그늘진 두던에 엎디어/ 함께 살아온 너/ 어디루 가나// 불타는 꿈으로 하여 자랑이던/ 이 길을 네게 나누자/ 흐린 생각을 밟고 너만 어디루 가나// 눈을 감으면 너를 따라/ 자욱자욱 꽃을 디딘다/ 휘휘로운 마음에 꽃잎이 흩날린다//
병(病) / 이용악
말 아닌 말로/ 병실의 전설을 주받는/ 흰 벽과/ 하아얀/ 하얀/ 벽// 화병에 시들은 다알리아가/ 날개 부러진 두루미로밖에/ 그렇게밖에 안 뵈는 슬픔―/ 무너질 성싶은/ 가슴에 숨어드는/ 차군 입김을 막아 다오// 실끝처럼 여윈 사념은/ 회색 문지방에/ 알 길 없는 손톱 그림을 새겼고/ 그 속에 뚜욱 떨어진 황혼은 미치려나/ 폭풍이 헤어드는 내 눈앞에서/ 미치려는가 너는// 시퍼런 핏줄에/ 손가락을 얹어 보는 마음―/ 손끝에 다아ㅎ는 적은 움직임/ 오오 살아 있다/ 나는 확실히 살아 있다//
새벽 동해안 / 이용악
두셋씩 먼 바다에 떨어져/ 산호의 꿈 깨우러 간/ 새벽별// 크작게 파도치는/ 모랫벌엔/ 투명한 동화를 기억하는/ 함박조개 껍지들// 고도(孤島)의 일화예보(日和豫報)를 받은/ 갈매기 하나/ 활기로운 날개// 물결처럼 날리는 그물 밑에서/ 애비의 근로를 준비하는/ 어부의 아들 딸//
시골 사람의 노래 / 이용악
귀 맞춰 접은 방석을 베고/ 젖가슴 헤친 채로 젖가슴 헤친 채로/ 잠든 에미네며 딸년이랑/ 모두들 실상 이쁜데/ 요란스레 달리는 마지막 차엔/ 무엇을 실어 보내고/ 당황히 손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몇 마디의 서양말과 글 짓는 재주와/ 그러한 것은 자랑삼기에 욕되었도다// 흘러내리는 머리칼도/ 목덜미에 점점이 찍혀/ 되레 복스럽던 검은 기미도/ 언젠가 쫓기듯 숨어서/ 시골로 돌아온 시골 사람/ 이 녀석 속눈썹 츨츨히 길다란 우리 아들도/ 한 번은 갔다가/ 섭섭히 돌아와야 할 시골 사람// 불타는 술잔에 꽃향기 그윽한데/ 바람이 이는데/ 이제 바람이 이는데/ 어디루 가는 사람들이/ 서로 담뱃불 빌고 빌리며/ 나의 가슴을 건너는 것일까//
쌍두마차 / 이용악
나는 나의 조국을 모른다/ 내게는 정계비 세운 영토란 것이 없다/ ―그것을 소원하지 않는다// 나의 조국은 내가 태어난 시간이고/ 나의 영토는 나의 쌍두마차가 굴러갈/ 그 구원한 시간이다// 나의 쌍두마차가 지나는/ 우거진 풀 속에서/ 나는 푸르른 진리의 놀라운 진화를 본다/ 산협을 굽어보면서 꼬불꼬불 넘는 영(嶺)에서/ 줄줄이 뻗은 숨쉬는 사상을 만난다// 열기를 토하면서/ 나의 쌍두마차가 적도선(赤道線)을 돌파할 때/ 거기엔 억센 심장의 위엄이 있고/ 계절풍과 싸우면서 동토대(凍土帶)를 지나/ 북극으로 다시 남극으로 돌진할 때/ 거기선 확확 타오르는 삶의 힘을 발견한다// 나는 항상 나를 모험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천성을 슬퍼도 하지 않고/ 기약 없는 여로를/ 의심하지도 않는다// 명일의 새로운 지구(地區)가 나를 부르고/ 더욱 나는 그것을 믿길래/ 나의 쌍두마차는 쉴 새 없이 굴러간다/ 날마다 새로운 여정을 탐구한다//
아이야 돌다리 위로 가자 / 이용악
냇물이 맑으면 맑은 물 밑엔/ 조약돌도 들여다보이리라/ 아이야/ 나를 따라 돌다리 위로 가자// 멀구광주리의 풍속을 사랑하는 북쪽 나라/ 말 다른 우리 고향/ 달맞이 노래를 들려 주마// 다리를 건너/ 아이야/ 네 애비와 나의 일터 저 푸른 언덕을 넘어/ 풀냄새 깔앉은 대숲으로 들어가자// 꿩의 전설이 늙어 가는 옛 성 그 성 밖/ 우리 집 지붕엔/ 박이 시름처럼 큰단다// 구름이 희면 흰구름은/ 북으로 북으로도 가리라/ 아이야/ 사랑으로 너를 안았으니/ 댓잎사귀 사이사이로 먼 하늘을 내다보자// 봉사꽃 유달리 고운 북쪽 나라/ 우리는 어릴 적/ 해마다 잊지 않고 우물가에 피웠다// 하늘이 고이 물들었다/ 아이야/ 다시 돌다리를 건너 온 길을 돌아가자// 돌담 밑 오지 항아리/ 저녁별을 안고 망설일 즈음/ 우리 아운 나를 불러 불러 외롭단다//
앵무새 / 이용악
청포도 익은 알만 쪼아먹고 자랐느냐/ 네 목청이 제법 이그러지다// 거짓을 별처럼 사랑는 노란 주둥이 있기에/ 곱게 늙은 발톱이 한뉘 흙을 긁어보지 못한다// 네 헛된 꿈을 섬기어 무서운 낭에 떨어질 텐데/ 그래도 너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만 있다//
어둠에 젖어 / 이용악
마음은 피어/ 포기포기 어둠에 젖어// 이 밤/ 호을로 타는 촛불을 거느리고// 어느 벌판에로 가리/ 어른거리는 모습마다/ 검은 머리 향그러이 검은 머리/ 가슴을 덮고 숨고 마는데// 병들어 벗도 없는 고을에/ 눈은 내리고/ 멀리서 철길이 운다//
연못 / 이용악
밤이라면 별모래 골고루 숨쉴 하늘/ 생각은 노새를 타고/ 갈꽃을 헤치며 오막살이로 돌아가는 날// 두셋 잠자리/ 대일랑 말랑 물머리를 간질이고/ 연못 잔잔한 가슴엔 내만 아는/ 근심이 소스라쳐 붐비다// 깊이 물 밑에 자리잡은 푸른 하늘/ 얼굴은 어제보담 희고/ 어쩐지 어쩐지 못 미더운 날//
오늘도 이 길을 / 이용악
가로수의 수면(睡眠) 시간이/ 아직 고요한 어둠을 숨쉬고 있다// 지난 밤 단골방에서 그린/ 향기롭던/ 명일의 화판(花瓣)은 지금 이 길을 걸으며/ 한 걸음 한 발짝이 엄청 무거워짐을 느낀다// 오늘/ 씹어야 할 하루 종일이/ 씨네마의 기억처럼 들여다보이는/ 권태―// 산을 허물어/ 바위를 뜯어 길을 내고/ 길을 따라 집터를 닦는다/ 쓰러지는 동무……/ 피투성이 된 두개골을 건치에 싸서/ 눈물 없이 묻어야 한다/ 그리고 보오얀 황혼의 귀로/ 손바닥을 거울인 양 들여다보고/ 버릇처럼 장알을 헨다/ 누우런 이빨을 내민 채/ 말라빠진 짐승처럼 방바닥에 늘어진다// 어제와 같은 필림을 풀어/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이 길을 걸어가는/ 권태―// 짜작돌을 쓸어 넣은 듯 흐리터분한 머리에/ 새벽은 한없이 스산하고/ 가슴엔 무륵무륵 자라나는 불만//
오월에의 노래 / 이용악
이빨 자욱 하얗게 홈 간 빨뿌리와 담뱃재 소복한 왜접시와 인젠 불살라도 좋은 몇 권의 책이 놓여 있는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 성미 어진 나의 친구는 고오고리를 좋아하는 소설가 몹시도 시장하고 눈은 내리던 밤 서로 웃으며 고오고리의 나라를 이야기하면서 소시민 소시민이라고 써놓은 얼룩진 벽에 벗어버린 검은 모자와 귀걸이가 걸려 있는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 그리웠던 그리웠던 구름 속 푸른 하늘은 우리 것이라 그리웠던 그리웠던 메이데이의 노래는 우리 것이라// 어느 동무들이 희망과 초조와 떨리는 손으로 주워 모은 활자들이냐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신문지 위에 독한 약봉지와 한 자루 칼이 놓여 있는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
월계는 피어 / 이용악
숨가삐 쳐다보는 하늘에/ 먹구름 뭉게치는 그러한 때에도/ 너와 나와 너와 나와/ 마음 속 월계는 함빡 피어/ 꽃이팔 꽃이팔 캄캄한 강물을 저어간 꽃이팔//산성을 돌아/ 쌓이고 쌓인 슬픔을 돌아/ 너의 상여는 아득한 옛으로/ 돌아가는 화려한 날에// 다시는 쥐어 못 볼 손이었던가/ 휘정휘정 지나쳐 버린/ 어느 골목엔가 월계는 피어//
임금원(林檎園)의 오후 / 이용악
정열이 익어가는 임금원(林檎園)에는/ 너그러운 향기 그윽히 피어오르다// 하늘이 맑고 임금(林檎)의 표정/ 더욱 천진해지는 오후/ 길 가는 초동(樵童)의 수줍은 노래를/ 품에 맞아들이다// 나무와 나무에 방울진 정열의 사도/ 너희들이 곁에 있는 한―있기를 맹세하는 한/ 영혼의 영토에 비애가/ 침입해서는 안될 것을 믿다// 오―/ 임금(林檎)나무 회색 그늘 밑에/ `창백한 울분'의 매장지(埋葬地)를 가지고 싶어라//
장마 개인 날 / 이용악
하늘이 해오리의 꿈처럼 푸르러/ 한 점 구름이 오늘 바다에 떨어지련만/ 마음에 안개 자옥히 피어오른다/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아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제비 같은 소녀야 / 이용악
어디서 호개 짖는 소리/ 서리 한 갈밭처럼 어수선타/ 깊어 가는 대륙의 밤―// 손톱을 물어뜯다도 살그마니 눈을 감는/ 제비 같은 소녀야/ 소녀야/ 눈감은 양볼에 울정이 돋힌다/ 그럴 때마다 네 머리에 떠돌/ 비극의 군상(群像)을 알고 싶다// 지금 오가는 네 마음이/ 탁류에 휩쓸리는 강가를 헤매는가/ 비 새는 토막에 누더기를 쓰고 앉았나/ 쭝쿠레 앉았나// 감았던 두 눈을 떠/ 입술로 가져가는 유리잔/ 그 푸른 잔에 술이 들었음을 기억하는가/ 부풀어오를 손등을 어찌려나/ 윤깔나는 머리칼에/ 어릿거리는 애수// 호인(胡人)의 말몰이 고함/ 높낮아 지나는 말몰이 고함―/ 뼈 저린 채찍소리/ 젖가슴을 감아 치는가/ 너의 노래가 어부의 자장가처럼 애조롭다/ 너는 어느 흉작촌(凶作村)이 보낸 어린 희생자냐// 깊어 가는 대륙의 밤―/ 미구에 먼동은 트려니 햇살이 피려니/ 성가스런 향수를 버리자/ 제비 같은 소녀야/ 소녀야……//
천치(天痴)의 강(江)아 / 이용악
풀쪽을 수목(樹木)을 땅을/ 바윗덩이를 무르녹이는 열기가 쏟아져도/ 오직 너만 냉정한 듯 차게 흐르는/ 강아/ 천치(天痴)의 강(江)아// 국제 철교를 넘나드는 무장 열차(武裝列車)가/ 너의 흐름을 타고 하늘을 깰 듯 고동이 높을 때/ 언덕에 자리잡은 포대(砲臺)가 호령을 내려/ 너의 흐름에 선지피를 흘릴 때/ 너는 초조에/ 너는 공포에/ 너는 부질없는 전율밖에/ 가져 본 다른 동작이 없고/ 너의 꿈은 꿈을 이어 흐른다// 네가 흘러온/ 흘러온 산협(山峽)에 무슨 자랑이 있었더냐/ 흘러가는 바다에 무슨 영광이 있으랴/ 이 은혜롭지 못한 꿈의 향연을/ 전통을 이어 남기려는가// 강아/ 천치(天痴)의 강(江)아// 너를 건너/ 키 넘는 풀 속을 들쥐처럼 기어/ 색다른 국경을 넘고자 숨어 다니는 무리/ 맥풀린 백성의 사투리의 향려(鄕閭)를 아는가/ 더욱 돌아오는 실망을/ 묘표(墓標)를 걸머진 듯한 이 실망을 아느냐// 강안(江岸)에 무수한 해골이 딩굴어도/ 해마다 계절마다 더해도/ 오직 너의 꿈만 아름다운 듯 고집하는/ 강아/ 천치(天痴)의 강(江)아//
포도원 / 이용악
계절조(季節鳥)처럼 포로로오 날아온/ 옛 생각을 보듬고/ 오솔길을 지나/ 포도원으로 살금살금 걸어와……// 촉대(燭臺) 든 손에/ 올감기는/ 산뜻한 감촉!// 대이기만 했으면 톡 터질 듯/ 익은 포도알에/ 물든 환상이 너울너울 물결친다/ 공허로운 이 마음을 어쩌나// 한 줄 촉광(燭光) 올마저/ 어둠에 바치고 야암전히 서서/ 시집가는 섬색시처럼/ 모오든 약속을 잠깐 잊어버리자// 조롱조롱 밤을 지키는/ 별들의 언어는/ 오늘밤/ 한 조각의 비밀도 품지 않았다//
폭풍 / 이용악
폭풍/ 폭풍(暴風)/ 거리 거리의 정돈미(整頓美)가 뒤집힌다/ 지붕이 독수리처럼 날아가고/ 벽은 교활한 미련(未練)을 안은 채 쓰러진다/ 대지에 거꾸러지는 대리석 기둥―/ 보이잖는 무수한 화석으로 장식된/ 도시의 넋이 폭발한다// 기만과 질투와 음모의 잔해를 끌안고/ 통곡하는 게 누구냐/ 지하로 지하로 피난하는 선량한 시민들아/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등신이 있느냐/ 숨통을 잃어버린 등신이 있느냐/ 폭풍/ 폭풍(暴風)//
푸른 한나절 / 이용악
양털모자 눌러쓰고 돌아오신 게 마지막 길/ 검은 기선은 다시 실어 주지 않았다/ 외할머니 큰아버지랑 계신 아라사를 못잊어/ 술을 기울이면 노 외로운 아버지였다// 영영 돌아가신 아버지의 외롬이/ 가슴에 옴츠리고 떠나지 않는 것은 나의 슬픔/ 몰풀 사이 사일 헤어가는 휘황한 꿈에도/ 나는 두터운 아이 몸소 귀뿌리를 돌린다// 잠시 담배연길 잊어버린/ 푸른 한나절// 거세인 파도 물머리마다 물머리 뒤에/ 아라사도 아버지도 보일 듯이 숨어 나를 부른다/ 울구퍼도 울지 못한 여러 해를 갈매기야/ 이 바다에 자유롭자//
하나씩의 별 / 이용악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 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 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 거리를/ 설움 많은 이민 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볼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 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흙 / 이용악
애비도 종할애비도 종 한뉘 허리 굽히고 드나들던 토막 기울어진 흙벽에 쭝그리고 기대앉은 저 아이는 발가숭이 발가숭이 아이의 살결은 흙인 듯 검붉다// 덩쿨 우거진 어느 골짜구니를 맑고 찬 새암물 돌 돌 가느다랗게 흐르는가 나비사 이미 날지 않고 오랜 나무 마디마디에 휘휘 감돌아 맺힌 고운 무늬 모양 버섯은 그늘에만 그늘마다 피어// 잠자듯 어슴프레히 저놈의 소가 항시 바라보는 것은 하늘이 높디 높다란 푸른 하늘이 아니라 번질러놓은 수레 바퀴가 아니라 흙이다 검붉은 흙이다//
이용악(李庸岳, 1914년~1971년) 시인
1914년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두만강 인근에서 밀수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이용악이 어린 시절에 마적의 습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이용악의 시 <다리 위에서> 나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등에서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엿볼 수 있다. 1928년 부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4학년 때 중퇴하였다. 그 직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히로시마의 코오분(興文) 중학 4학년에 편입하여 1933년에 졸업하였고, 곧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여 1년을 수료한 후, 1936년 조치대학 신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35년 월간지 <신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같은 해 김종한과 더불어 동인지 《이인》을 발간하고 계속하여 《신인문학》에 「애소귀언」, 「무숙자」 《신가정》에 「너는 왜 울고 있느냐」 <조선일보>에 「임금원의 오후」, 「벌레소리」, 「북국의 가을」, 「오정의 시」 이듬해 1936년에 <조선중앙일보>에 「다방」 《낭만》에 「오월」 등을 발표함으로써 탄탄한 기본기를 다진다. 이후 1937년과 1938년 연거푸 2권의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까지 발표함으로써 풍부한 작가적 역량을 과시한다. 1939년 조치대학을 졸업하고 <인문평론>의 기자로 근무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간당하자 1942년에 귀향한다. 광복 후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1946년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시 분과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중앙신문』 기자로 생활하였다. 이 시기에 시집 『오랑캐꽃』을 발간하였다. 조선문학가동맹 자체가 좌익적인 성향이 강한 단체였기 때문에 그는 곧 정부(당시는 미군정)에 찍히게 된다. 1949년 시집 『이용악집』을 발표하였으나, 정부로부터 불온삐라 유포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석방된다. 이후 남로당계의 임화, 오장환, 김남천 등과 만나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와 같은 시를 <조선인민일보>에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6.25 전쟁 도중 박태원 등과 함께 월북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남로당 계열이 대거 숙청당했고, 이용악도 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게 된다. 그나마 가벼운 처분을 받아 한동안 집필 금지를 당했다가, 이후에는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시들을 발표해야 했다. 1971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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