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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 박팔양
친구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길가의 한 포기 조그만 풀을/ 보신 일이 있으실 것이외다/ 짓밟히며, 짓밟히면서도/ 푸른 하늘로 작은 손을 내저으며/ 기어이 기어이 살아보겠다는/ 길가의 한 포기 조그만 풀을/ 목숨은 하늘이 주신 것이외다/ 누가 감히 이를 어찌하리까?/ 푸른 하늘에는 새떼가 날으고/ 고요한 바다에 고기떼 뛰놀 때/ 그대와 나는 목숨을 위하여/ 땅 위에 딩굴고 또 딩굴 것이외다//
침묵 / 박팔양
나는 그대의 종달새 같은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보다고 더 그대의 말없음을 사랑한다/ 말은 마침내 한계의 조그만 아름다운 장난감/ 나는 장난감에 싫증난 커가는 아이다/ 말보다도 그대의 노래를 나는 더 사랑한다/ 진실로 그윽하고도 황홀한 그대의 노래여!/ 붉은 노을 서편 하늘에 비끼는 여름 황혼에/ 그대의 부르는 노래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하느뇨/ 노래에도 싫증날 때 그대는 들창 가에 기대어 침묵한다/ 아아 얼마나 진실하고도 화려한 침묵인고/ 나는 말없이 서 있는 아름다운 그대의 창 너머로/ 여름 황혼의 붉은 노을을 꿈과 같이 바라본다//
선구자 / 박팔양
나아가는 곳에 광명이 있나니/ 젊은 그대여 나아가자!/ 오직 앞으로 앞으로 또 앞으로/ 가시덤불을 뚫고// 비록 모든 사람이 주저할지라도/ 젊은 그대여 나아가자!/ 용기는 젊은이만의 자랑스런 보배/ 어찌 욕되게 뒤로 숨어들랴// 진실로 나아가는 곳에 광명이 있나니/ 비록 나아가다가 거꾸러질지라도/ 명예로운 그대, 젊은 선구자여/ 물러섬 없이 오직 나아가자!//
* 중앙, 1936년 2월
너무도 슬픈 사실 -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 / 박팔양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녈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로 아침 비비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그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 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다/ 화려한 꽃들이 하나도 피기도 전에/ 찬 바람 오고가는 산허리에 쓸쓸하게 피어 있는/ 봄의 선구자 연분홍의 진달래꽃을 보셨으리다.//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그는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외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그 엷은 꽃잎은/ 선구자의 불행한 수난이외다// 어찌하야 이 나라에 태어난 이 가난한 시인이/ 이같이도 그 꽃을 붙들고 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선구자들 수난의 모양이/ 너무도 많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까닭이외다//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그러나 진달래꽃은 오라는 봄의 모양을 그 머리속에 그리면서/ 찬 바람 오고 가는 산허리에서 오히려 웃으며 말할 것이외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 고 ―//
* 학생, 1930년 4월
태양을 등진 거리에서 / 박팔양
나는 오늘도/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의 단벌 '루바시카'를 입고/ 황혼의 거리 위로 걸어간다./ 굵은 줄로 매인 나의 허리띠가/ 퍽도 우악스러워 보이는지/ '불독' 독일종 강아지가/ 나를 보고 쫓아오며 짖는다./ '짖어다오! 짖어다오!'/ 내 가슴의 피가 너 짖는 소리에/ 조금이라도 더 뛰놀 것이다.// 나는 또 걷는다/ 다 떨어진 병정구두를 끌고/ 태양을 등진 이 거리 위를/ 휘파람을 불며 걸어간다./ 내가 쓸쓸한 가을 하늘을 치어다보고 /말없이 휘파람만 불고 가는 것은/ 이 도성의 황혼이/ 몹시도 적적한 까닭이라.// 그리하되 몇 시간 후에/ 우리가 친구들로 더불어 모여 앉아/ 기나 긴 가을밤을 우리 일의 토론으로 밝힐 것을 생각하매/ 나의 가슴은 젊은 피로 인하여 두근거린다./ '나는 젊은 사나이다!'/ 하고 주먹이 쥐어진다.// 凋落의 가을이 오동나무 잎에/ 쓸쓸한 바람을 불어보낸다./ '오오! 옛 도시 서울의 寂寥한 저녁거리여!'/ 그러나 이는/ 감상적 시인의 글투!/ 우리는 센티멘털하게 울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그렇기는 하나 역시 우리 눈에도/ 시멘트로 깔린 인도 위에/ 소리 없이 지는 버드나무 낙엽이 보인다./ 울기 잘하는 우리 친구가 보았던들/ 그는 부르짖었으리라,// '오오! 낯모르는 사람 발 밑에 짓밟힌/ 이 거리의 낙엽이여!' 하고―/ 그러나 지금은 이 고장 시인들이 넋이 빠져/ 붓대를 던지고 앉았으니/ 울 사람도 없다. 노래할 사람도 없다./ '아아, 나는 모른다.'/ 이 땅이 피로한 잠에 깊이 잠겨 있음이라// 나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한다./ 그저 걸어가자/ 설움과 희망이 뒤범벅된/ 알지 못하게 뻐근한 이 가슴을 안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숭례문― 가을의 숭례문이여,/ 그대는 무엇을 묵묵히 생각만 하고 있느뇨?//
밤차 / 박팔양
추방되는 백성의 고달픈 백(魄)을 실고/ 밤차는 헐레벌덕어리며 달어난다/ 도망군이 짐싸가지고 솔밭길을 빠지듯/ 야반(夜半) 국경의 들길을 달리는 이 괴물이여!// 차창밖 하늘은 내 답답한 마음을 닮었느냐/ 숨맥힐 듯 가슴 터질 듯 몹시도 캄캄하고나/ 유랑(流浪)의 짐 우에 고개 비스듬히 눕히고 생각한다/ 오오 고향의 아름답든 꿈이 어디로 갔느냐// 비닭이*집 비닭이장같이 오붓하든 내 동리/ 그것은 지금 무엇이 되었는가/ 차바퀴 소리 해조(諧調)*마치 들리는 중에/ 희미하게 벌려지는 괴로운 꿈자리여!// 북방 고원의 밤바람이 차창을 흔든다/ (사람들은 모다 피곤히 잠들었는데)/ 이 적막한 방문자여! 문 두드리지 마라/ 의지할 곳 없는 우리의 마음은 지금 울고 있다// 그러나 기관차는 야음(夜音)을 뚫고 나가면서/ ‘돌진! 돌진! 돌진!’ 소리를 질른다/ 아아 털끝만치라도 의롭게 할 일 있느냐/ 아까울 것 없는 이 한 목숨 바칠 데가 있느냐// 피로한 백성의 몸 우에/ 무겁게 나려 덥힌 이 지리한 밤아/ 언제나 새이랴나 언제나 걷히랴나/ 아아 언제나 이 괴로움에서 깨워 일으키랴느냐//
* 조선지광, 1927년 9월
* 비닭이: 비둘기, 해조(諧調): 아름다운 가락.
인천항 / 박팔양
조선의 서편항구 제물포의 부두/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젖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모자 삐딱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나릴제// 축항「카페-」로부터는/ 술취한 불란서 수병의 노래/ 「오! 말세이유! 말쎄이유!」/ 멀리 두고 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 부두에 산같이 쌓인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요?/ 「우리는 경상도」「우리는 산동성」/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는 말이다// 월미도와 영종도 그 사이로/ 물결을 헤치며 나가는 배의/ 높디높은 「마스트」 위로 부는 바람/ 공동환의 깃발이 저렇게 퍼덕거린다// 오오 제물포! 제물포!/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 조선지광, 1928년 7월
향수 / 박팔양
양지바른 남향 대문에 기대어 서서나/ 자라던 고향을 생각하니/ 구름이 아득하여 천리러라./ 생각이 아득하여 천리러라.// 남쪽으로 나는 제비떼를 따라서/ 잊어버린 옛 고향길 찾아보네,/ 늙으신 부모 기다림에 지쳐서/ 마루 끝에 앉아 조을고 계시리라.//
하루의 과정 / 박팔양
동편 들창에 비치는 여명./ 하룻밤 안식에 만족한 기지개여ㅡ/ 칫솔을 입에 물고, 뜰에서 보내는 하늘,/ 묵묵한 중에 하루의 출발을 준비하노니.// 거리엔 지금이 러시 아워./ 붉은 볼에 행복을 미소하는 젊은 남녀의/ 오고가는 발자취 소리 여기저기서/ 아침의 아름다운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윽고 정오의 싸이렌이 울고 나서/ 해가 어느결엔지 서편 하늘로 기울어졌을 때‘/ 비즈니스에 상기된 샐러리맨들은/ 오후 네시의 권태를 오늘도 절실히 체험하며-// 전등이 어여쁜 소녀의 샛별 같은 눈처럼/ 영롱하게 시가의 야경을 장식하기 시작할 때’/ 하루의 고역에 넋을 잃은 검은 일꾼들은/ 맥없는 걸음걸이로 가난한 보금자리를 찾아간다.// 네온싸인! 그것은 한 개의 슬픈 풍경./ 일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수많은 룸펜이여/ 도시의 사람을 유혹하는 향락의 밤이 깊어갈 때‘/ 그대와 나의 헛되인 탄식을 어찌하려는가?// 그러나 안식의 밤이 고요히 고요히/ 하잘것없이 작고 외로운 그대와 나의 지붕 우에서/ 소리도 없이 새어갈 때 우리는 가난한 우리의/ 침상 속에서 또다시 「희망의 내일」을 꾸미고 있다.//
동지 / 박팔양
동지를 북쪽으로 떠나보낸 후/ 나는 그대가 그리워 울었노라/ 북두칠성 기울어진/ 겨울 새벽에/ 나의 베개는/ 몇 번이나 눈물에 젖었던고!// 북쪽 나라/ 피로 물들은 거리거리로/ 목숨과 함께 애쓰며 방황하는 그대의 모양이/ 생시에도 몇 번 꿈에도 몇 번/ 나의 머리를 왕래하였었노라// 어느 서리 많이 온/ 이른 겨울날 아침에/ 검은 까마귀 한 마리/ 북쪽으로 울고 가더니/ 며칠이 못 되어 그대의 몸이/ 얼음같이 찬 시체가 되어/ 그대가 항상 오고자 하던/ 이 나라의 이 벌판으로/ 오! 그대는 돌아왔도다!// 눈송이 날리는 북국의/ 피를 피로 바꾸는 마당에서/ 열정에 떠는 가슴을 안고/ 그대는 얼마나 수고하였던가// 동무여/ 나는 그대의 관 우에 놓을/ 아무 선물도 없노라/ 그러나 그대의 찬 입술에/ 「영원한 승리자여!」 하고/ 입맞추인 후/ 뜨거운 나의 「눈물」을 바치겠노라//
실제(失題) / 박팔양
나는 그대의 종달새 같은/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보다도 더 그대의/ 말 없음을 사랑한다/ 말은 마침내 한 개의 조그만/ 아름다운 장난감/ 나는 장난감에 싫증난 커가는 아이다// 말보다는 그대의 노래를/ 나는 더 사랑한다/ 진실로 그윽하고도 황홀한/ 그대의 노래여!/ 붉은 노을 서편 하늘에 빗기는/ 여름 황혼에 그대의 부르는 노래/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하느뇨// 노래에도 싫증날 때 그대는/ 들창 가에 기대어 침묵한다/ 아아 얼마나 진실하고도/ 화려한 침묵인고!/ 나는 말없이 서 있는 아름다운/ 그대의 창 너머로 여름 황혼의/ 붉은 노을을 꿈과 같이 동경한다//
남대문 / 박팔양
서울은 행복스러운 도성이외다./ 그는 그의 가슴에 남대문을 안엇스니/ 사랑하는 사람을 안은 젋은 사나이와 가티/ 즐거움과 든든함으로/ 그의 마음은 하나 가득할 것이외다// 내가 고생살이 10년을 하는 동안에/ 무엇을 바라고서 살엇사오리까마는/ 새벽 안개속에 묵묵히 서울을 지키고 있는/ 남대문 하나를 바라보고 살어왓사외다// 이 도성의 사람들이 또한 그러하외다/ 그들이 울분하여 터질듯한 가슴을 안꼬/ 거리에서 거리로, 비틀거리는 발길을 옴길 때/ 누가 그들을 위로하여 주엇사오리까/ 업사외다. 오직 남대문 하나이 잇을 뿐이외다// 내가 모든 행복으로부터 버림을 밧고/ 붉은 주먹을 쥐고 죽엄을 부르지즈며 뛰어 다닐 때/ 남대문은 그윽한 중에 나에게 말하엿사외다/ "참고 준비하라! 이제 약속한 날이 온다"고.// 친구께서도 만약 마음의 문을 열으신다면/ 남대문의 그윽한 말소리를 들어시리다/ "기다림에 지쳐 소망을 일허버린 백성들이여/ 감격한 중에 준비하라! 약속한 날이 가까웁다"는.// 내 고요히 눈을 감고 남대문을 볼 때에/ 그 곳에 제단 모우고 기도 들이는/ 가난하고 불행한 만흔 목숨을 보앗사외다/ "거인이 오소서 거인이 오소서/ 약속한 날이 어서 오소서"// 오늘도 나는 나의 사랑하는 복순이와 가티/ 이른 아침에 남대문을 겨틀 거닐엇사외다/ 우리 조상과 우리를 보고 또 우리 자손을 지킬/ 어버이가튼 자비와 예언자가튼 위엄을 가진/ 그의 아플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엿사외다.//
데모 / 박팔양
납덩어리같이 무겁고 괴로웁든 우리들의 마음이/ 오늘은 엇지하야 이같이 가볍고도 유쾌하냐/ 5월의 한울 ― 그 밑에서 부르는 우리들의 노래가/ 무슨 까닭에 참으로 무슨 까닭에/ 가슴 울렁거리도록 이같이 즐거웁게 들리느냐// 시가(市街)가 좁다고 먼지 휘날리며 달리든/ ×××× 자동차와 마차/ 그것이 오늘의 ×××× 무엇이란 말이냐/ 보아라 거리와 거리에 모혀슨 우리 ××××/ 평소에 묵묵히 일하든 친구들의 오늘을!// 가로(街路)에도 우리들의 데모/ 옥내(屋內)에는 경이(驚異)에 빗나는 저들 ×××/ 보혀주자 저 영리하고도 앞 못보는 백성들에게/ 미래를 춤추는 이 군중의 무도(舞蹈)를!// ×××××× 노래와 환호와 박수다/ 보조. 보조. 보조를 맞치라/ ………… ………… ……/ 5월의 향기로운 공기를 통하야/ 오오 울리라 우리들의 교향악을//
* 조선지광, 1928년 7월
저자에 가는 날 / 박팔양
친구여, 나는 안 가겠노라/ 첫새벽 저자에/ 같이 가자는 이 사람아/ 내 일찍이 속은 일 있어/ 다시는 저자에 가지 않으려노라// 해가 저물어/ 사람들이 그날의 저자에서 돌아올 때/ 그대는 무엇을 바꾸어오려는가/ 그대나 나는 아무것도 소유치 못하였거니/ 피곤한 다리와/ 가슴 아픈 허튼 주정과/ 그리고 잿빛 실망의 가슴밖에/ 그대의 가지고 돌아올 것이 무엇인가// 친구여 그래도 나더러/ 저자에 가자는가, 이 사람아/ 내 일찍이 속은 일 있어/ 다시는 저자에 가지 않으려노라//
승리의 봄 / 박팔양
친구여! 그대는 아직도 기억하리라./ '겨울의 포위'가 온 세상을 완전히 정복하였을 때/ 모든 생령이 숨을 죽이고 그 포위 밑에 전율할 때/ 그대는 절망의 심연에서 소리쳐 통곡하였다./ 하늘을 우러러 절멸되려는 목숨들을 붙들고 한없이 통곡하였었다.// 그리고 친구는 또 기억하리라/ 그 무서운 열풍과 설한에 쫓기어/ 연약한 목숨들은 바위 틈 땅 밑으로 숨어들고/ 온 세상은 오직 폭한과 같이 날뛰는 눈보라 속에/ 숨 죽이고 완전이 사멸한 것 같이 않았던가?// 그러나 자연의 힘은 마침내 어느 틈엔지/ 천만 년이나 지속할 것 같던 겨울의 포위를 쫓고/ 우리도 모를 사이에 산과 언덕에 드을에,/ 생명의 소생을 재촉하는 다정한 봄바람을 보내어/ ”일어나라 일어나라! 봄이 왔다!“ 깨워 일어킨다.// 아아 크나큰 자연의 힘이여!/ 그것은 마침내 모든 생명을 붙들어 일으키고야 말았다/ 그 열풍! 그 설한이 지금 어느 구석에 가 있느뇨?/ 그 포위! 그 자행이 지금 어디 가서 숨어 있느뇨?/ 모든 생령은 이제 오래인 침복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봄은 마침내 우리를 찾아오고야 말았다./ 봄은 마침내 우리에게 돌아오고야 말았다./ 자연은 마침내 우리들의 승리를 선언하고야 말았다./ 오오 봄. 봄. 소생의 봄. 갱생의 봄./ 산과 언덕과 드을에 꽃피고 새소리 들리니/ 봄은 이제 완전히 승리자의 봄이다.//
신(神)의 주(酒) / 박팔양
昭格洞(소격동) 박승만(朴勝萬)// 취(醉)하지안코는 못살세상(世上)이어든/ 사람아! 무엇에취(醉)할가 근심하여라/ 붉은술이잇스나 깨임을엇지하며/ 아름다운님이잇스나 사랑이길지못함을엇지하랴/ 아々! 사람아! 무엇에취(醉)할까근심하여라/ 세상(世上)술은 괴롭고취(醉)하지아니하니/ 사람아! 신(神)의궁전(宮殿)에붉은술을마시라/ 그리고깨이지안는 즐거움에취(醉))하여/ 너의적은입을 마음껏버리어 불보다 더뜨거운 너의노래를부르라// 세상(世上)님은정(情)업고쌀々하니/ 사람아! 신(神)의궁전(宮殿)에 아름다운님을안으라/ 그리고끗업는즐거움에 취(醉)하여/ 너의간열핀팔다리를 기운(氣運)껏놀니어/ 끗々내 쉬임업는 너의춤을추라//
* 동아일보 1923년 5월 25일자 5면, 현상 당선 신시(懸賞當選新詩)
봄비 / 박팔양
창(窓)밧 봄비에 버들이젓고/ 시름겨운졂믄이 턱을고이고 잇서라// 재빗 하날이 집우에 무겁고/ 먼산 놉흔봉(峯)이 안개속에 자도다/ 참새떼 첨하끗헤 소리업시 모히고/ 시들한 봄비만 끗침업시 나려라//
* 동아일보 1923년 5월 25일자 5면, 현상 당선 신시(懸賞當選新詩)
박팔양(朴八陽, 1905년~1988년) 시인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였다. 필명은 김려수(金麗水), 여수산인(麗水山人)이며, 여수(麗水, 如水)는 아호이기도 하다. 어릴 때 경성부로 이주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정지용과 함께 요람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신의 주(神의 酒)〉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여수시초(麗水詩抄)》와 《박팔양 시집》을 냈다. 광복 당시 《만선일보》 기자로 만주에서 귀국하던 중 북한에 그대로 머물러 월북 작가가 되었다. 로동신문의 전신인 《정로》 초대 편집국장과 《로동신문》 부주필, 김일성종합대학 강좌장 등을 지냈다. 한국 전쟁 시기에는 종군 작가로 참전해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으며, 《황해의 노래》, 《눈보라 만리》, 《민족의 영예》, 《이름없는 한 풀잎의 노래》(유고작) 등 장편 서사시를 발표했다.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공화국영웅 조옥희를 다룬 작품 《황해의 노래》는 창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8년 월북 작가들이 해금되면서 대한민국에서도 재평가가 시작되어, 시선집 《태양을 등진 거리》가 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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