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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뱃삯과 뇌물 / 이규보

부흐고비 2008. 3. 7. 00:51

 

뱃삯과 뇌물


어느 날 남쪽 지방을 여행하였는데 도중에 큰 강물을 만났다. 그리하여 강나루에서 뱃삯을 주고 강물을 건너게 되었는데, 때마침 강물을 건너는 사람이 많아서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동시에 출발하였다. 두 척의 배는 크기도 똑같고, 노 젓는 사람의 수도 똑같고, 태운 사람의 수도 똑같았다.

두 척의 배가 마침내 닻줄을 풀고 노를 젓기 시작하였는데 조금있다 보니 곁에서 같이 출발했던 배는 날 듯이 강물을 건너가서 이미 저쪽 나루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내가 탄 배는 아직도 이쪽 나루 근처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묻지 함께 배를 탔던 사람들이 이르기를, “저 배를 탄 사람들은 술을 싣고 가다가 그 술로 노 젓는 사람을 먹이니 뱃사공이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기 때문이오.” 하였다. 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한탄하였다.

“아하! 이 조그마한 강물을 건너는 데도 뇌물을 먹이고 안 먹이는데 따라 빠르게 건너고 느리게 건너는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바다같이 험한 벼슬길을 다투어 건너는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니 내 주변에는 나를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고 뇌물을 줄만한 사람도 없는 까닭에 지금까지 조그만 벼슬자리 하나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였구나.”

그리고 나는 뒷날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계기를 삼기 위하여 이렇게 써 두기로 하였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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