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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호민론(豪民論) / 허균

부흐고비 2008. 3. 11. 13:44

 

호민론(豪民論)


천하에 두려워할만한 자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불·범·표범보다도 더 두렵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자들은 백성들을 제멋대로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다. 도대체 어찌 그러한가.

무릇 이루어진 일이나 함께 기뻐하면서 늘 보이는 것이 얽매인 자, 시키는 대로 법을 받들고 윗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자는 항민(恒民:온순한 백성)이다. 이들 항민은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모질게 착취당하며 살이 발겨지고 뼈가 뒤틀리며, 집에 들어온 것과 논밭에서 난 것을 다 가져다 끝없는 요구에 바치면서도 걱정하고 탄식하되 중얼중얼 윗사람을 원망하거나 하는 자는 원민(怨民:원한을 품은 백성)이다. 이들 원민도 반드시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자기 모습을 푸줏간에 감추고 남모르게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엿보다가, 때를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풀어보려는 자가 호민(豪民:살림살이가 넉넉하고 세력 있는 백성)이다. 이들 호민이야말로 두려운 존재이다.

호민은 나라의 틈을 엿보다가 일이 이루어질 만한 때를 노려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밭이랑 위에서 한 차례 크게 소리를 외친다. 그러면 저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드는데, 함께 의논하지 않았어도 그들과 같은 소리를 외친다. 항민들도 또한 살 길을 찾아 어쩔 수 없이 호미자루와 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인다.

진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황건적 때문이다. 당나라 때에도 왕선지와 황소(黃巢)가 기회를 탔었는데, 끝내는 이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이 모두 백성을 모질게 착취해서 제 배만 불렸기 때문이니, 호민들이 그 틈을 탄 것이다.

하늘이 사목(司牧)을 세운 까닭은 백성을 기르려고 했기 때문이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위에 앉아서 방자하게 흘겨보며 골짜기 같은 욕심이나 채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즉 그러한 짓을 저지른 진·한 이래의 나라들이 화를 입은 것은 마땅한 일이었지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고려 때에는 백성들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에 한도가 있었고, 자연의 이익을 백성들과 함께 누렸다. 장사꾼에게는 그 길을 열어 주고 쟁이들에게도 혜택을 주었다. 또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때문에 나라에 쌓아 놓은 것이 있었다. 갑자기 큰 전쟁이나 국상이 있더라도 따로 백성들로부터 거두는 적은 없었다. 다만 말기에 와서는 삼공(三空: 흉년이 들면 사당에는 제사를 못 지내고, 서당에 항생이 없으며, 뜰에는 개가 없다.)을 염려하였다.

우리 조선은 그렇지 못하다. 얼마 안 되는 백성을 거느리고도 신을 섬기는 일이나 윗사람을 받드는 예절은 중국과 같다. 백성들이 세금을 다섯 몫쯤 내면 관청에 돌아가는 것은 겨우 한 몫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진다. 또한 나라에 쌓아 놓은 것이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한 해에도 두 번이라도 세금을 거둬들인다. 고을의 사또들은 이를 빙자하여 키로 물건을 가려내면서(이물질이 들어있는지 검사해 가면서) 가혹하게 거둬들이기에 끝이 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이 고려 때보다도 더 심하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은 태평스럽게 두려워할 줄 모르고,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다."라고 말한다. 불행히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르면, 근심과 원망에 가득 찬 민중들이 따라 가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하겠는가? 기주·양주의 육합의 반쯤은 발을 꼬고 앉아서(속수무책으로) 기다리게 될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이런 두려운 형상을 환히 알라서 느슨한 활시위를 바로잡고 어지러운 수레바퀴를 고친다면, 그래도 나라는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허 균(許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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