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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대머리의 변 / 권근

부흐고비 2008. 8. 20. 17:52

대머리의 변


경주에 사는 김진양 군은 어느 날 터를 사서 거기에 작은 집 한 채를 짓고는 띠로 지붕을 이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호를 동두(童頭), 즉 ‘대머리’라 지었다. 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부터 머리숱이 매우 적은데다가 얼굴은 늘 개기름으로 번들거리네. 나는 또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술이 생기면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는 성미인데, 어쩌다 취하기라도 하면 곧잘 갓을 벗어던지고 맨머리 바람으로 다니기를 좋아하지, 이런 나를 보고 사람들이 모두 ‘대머리, 대머리’하고 놀리기에, 이편에서도 아예 그것을 호로 삼아 버린 것이네.

대개 호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긴 모습을 따라 짓는 것인데, 내가 대머리이니 남들이 나더러 대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다만 남들이 부르는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네. 옛날 공자는 나면서부터 이마가 웅덩이처럼 우그러들고 사방이 높았기 때문에 그 생김새를 따라 이름을 언덕 구(丘)자로 하고 자(字)를 중니(仲尼)라고 지었다고 들었네. 다시 말해서 제 생긴 대로 거기에 맞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이지. 곱사등이가 낙타라 불리는 것이 바로 그 예라 하겠네. 옛 성현들 중에는 이처럼 자신의 모습을 따라 호를 삼은 분들이 많았다고 들었네. 그러니 나라고 마다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대머리 중에는 거지가 없다’는 속담도 있으니, 대머리가 복을 불러온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또 오래 산 사람은 반드시 머리가 벗겨져 대머리가 되는 것이니, 뒤집어 말하면 내가 대머리라는 사실은 곧 오래 살 것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내가 만일 걸식하지 않고 오래 살다가 편안히 죽는다면 그것은 나의 대머리 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네. 사람 치고 부귀와 장수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늘이 생물을 창조한 것을 보면, 날카로운 이빨을 준 자에게는 굳센 뿔을 주지 않았고, 날개를 준 자에게는 네 다리를 주지 않았네. 인간의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세상에서 부귀와 장수를 겸한 사람은 많지 않은 법 한 때 잘 살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네. 그러니 굳이 부귀를 바라 무엇 하겠는가? 다행이 나에게 초가가 있어 내 몸을 보호하기에 족하고 거친 음식이지만 나의 굶주림을 달래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 이렇게 하여 나의 타고난 수명을 다 할 생각이라네. 사람들이 나더러 대머리라 하고 내가 또한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생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네.”

내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나도 동감이네. 내 얼굴이 검어서 사람들이 나더러 ‘작은 까마귀(小鳥)라고 부르기에 나도 또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네. 하지만 대머리니 까마귀니 하는 것은 다 외모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 뿐, 내면적인 인격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네. 그러니 내적인 것에 대한 이름은 그가 쌓은 인격 수양의 정도에 의해 결장될 것일세. 세상에는 얼굴은 아름답지만 성질이 고약한 사람도 있는 법, 어찌 용모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김군은 넓은 학문과 민첩한 재능을 타고나서 조정에 벼슬한 지가 오래되어 대간의 요직을 역임하고 시종직에 오랫동안 있었다. 그는 빛나는 명성을 크게 떨쳐 사람들이 크게 기대하였지만 마음이 매우 겸손하여 부귀를 탐하지 않고 평생을 초가삼간에서 마칠 생각인 것 같으니 쌓은 수양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다. 이른바, “비난할 바가 없다”는 말이 바로 이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라 하겠다.

임자년 가을, 8월12일에 소오자(小烏子)가쓴다.

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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