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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에 /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성탄제(聖誕祭)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부부/ 김종길
어두운 부뚜막이나/ 낡은 탁자 위 같은 데서/ 어쩌다 비쳐드는 저녁 햇살이라도 받아야/ 잠시 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쌍의 빈 그릇// 놋쇠든, 사기이든, 오지이든/ 오십년이 넘도록 하루같이 함께 붙어다니느라/ 비록 때묻고 이 빠졌을 망정/ 늘 함께 있어야만 제격인/ 사발과 대접// 적잖은 자식 낳아 길러/ 짝지워 다 내어보내고/ 이제는 둘만 남아/ 이렇게 이따금 서로의 성근 흰 머리칼/ 눈가의 잔주름 눈여겨 바라보며// 깨어지더라도 함께 깨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부질없이 서로 웃으며 되새겨보면/ 창밖엔 저무는 날의 남은 햇빛/ 그 햇빛에 희뜩이는 때아닌 이슬방울//
고갯길 / 김종길
시골 옛집 앞을 지나,/ 뒷산 등성이를// 오늘은 상여(喪輿)로 넘으시는 아버지./ 낯익은 고갯길엔/ 마른풀 희게 우거졌고// 이른 봄 찬 날씨에,/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아버지,/ 생전(生前)에 이 고갯길을 몇 번이나/ 숨차시게, 숨차시게 넘으셨던가요?//
가랑잎 / 김종길
자식들 모두/ 짝지워 떠나보내고,/ 가러기떼처럼 떠나보내고,//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 구름 엷게 비낀/ 늦가을 해질 무렵.// 빈 뜰에/ 쌓이는 가랑잎을/ 늙은 아내와 함께 줍는다.//
백운대(白雲臺) / 김종길
건너편 인수봉(仁壽峰) 암벽(岩壁) 정면(正面)을/ 사람들은 밧줄로 올라가고 있었다.// 백운대(白雲臺) 정상(頂上) 바위 모서리에 걸터앉아/ 흡사 영화(映畵)의 한 장면(場面)처럼/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태로운 바위 모서리의 감촉(感觸)은/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으나// 수유리(水踰里) 종점(終點)에서 돌아다본 백운대(白雲臺)는/ 이미 저녁 하늘에 솟은/ 초연(超然)한 산봉우리,// 오르기 전의 그 모습으로/ 반쯤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새벽 뜰에서 / 김종길
밤 사이 꽃들이 궁거워/ 잠이 깨자마자 내려선 뜨락,// 아직은 좀 싸늘한 맑은 바람 속에/ 언제나 그렇듯 낯익으면서도 낯선 손님처럼/ 새벽이 나보다 먼저 내 뜰에 와서 서성거린다.// 선잠을 깬 백목련(白木蓮) 꽃송이들이/ 부시시 눈을 뜨며 하품을 한다.// 목단(牧丹) 꽃망울들은/ 그 현란한 너털웃음을 단단히 숨긴 채,/ 아직도 한참은 더 자야 할 모양이다.// 기지개를 펴는 라일락 가지 끝마다/ 숨가쁘게 향그러운 입김을 내뿜는/ 쌀알만한 흰 꽃알갱이들.// 모두 다 입맞추고 볼 비비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귀여운 것들.// 이렇게 봄철 새벽 뜰에는/ 또 한 무리의 애타는 식구들이/ 바깥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을.//
춘니(春泥) / 김종길
여자대학(女子大學)은 크림빛 건물(建物)이었다./ 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릇한 보리밭―/ 어디서 연식(軟式) 정구(庭球)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 위에선,/ 신입생(新入生)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겨울비 / 김종길
겨울비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을 맞대는/ 옛 동기생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동기생들의 반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지금 십여 명이 서울에 살고 있지만/ 한두 사람은 연락이 닿지 않고/ 한두 사람은 병석에 갇혀 있어/ 모처럼 모인다 해도 반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러나 가장 허물없는 사이가 그들이다/ 지금은 백발에 주름 잡힌 얼굴들이지만/ 모이면 모두 육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 버릇없는 중학생이 되어 즐겁기만 하다// 망년회란 한 해를 잊자는 것인가/ 아니면 나이를 잊자는 것인가/ 아니면 그 두 가지를 다 잊자는 건가/ 겨울비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늙은 동기생들을 만나러 집을 나선다//
솔개 / 김종길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소 / 김종길
네 커다란 검은 눈에는/ 슬픈 하늘이 비치고// 그 하늘 속에 내가 있고나.//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 때로 지그시 눈을 감는 버릇을,/ 너와 더불어/ 오래 익히었고나.//
김종길(1926~2017)은 시인이며 영문학자이고 번역가다. 본명은 치규(致逵),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와 혜화전문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문(問)’이 입선하여 등단했다. 1958년부터 1992년까지 고려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시인협회장과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2017년 91세의 나이에 숙환으로 영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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