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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아들에게 / 유언호

부흐고비 2009. 2. 2. 18:54

 

아들에게1


올해 내가 육십일 세이니 어느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해보면 옛날 어릴 적에는 이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을 보면 바싹 마르고 검버섯이 핀 늙은이로 알았건마는 세월이 흘러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지만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팔팔한 소년의 마음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에 나온 이래로 서른 해 동안 세파에 부침(浮沈)하고 고락(苦樂)을 겪은 일들이 번개같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아련히 몽롱하게 꾸는 봄날의 꿈보다도 못하다. 남들 눈으로 보면 나이가 육십을 넘겼고 지위가 정승에 올랐으므로, 나이에도 벼슬에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 겪어 온 일들을 점검해 보노라니, 엉성하고 거칠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구나. 평생토록 궁색하고 비천하게 지내다 생을 마친 자들과 견주어보아, 낫고 못하며 좋고 나쁘고를 구분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지금처럼 섬에 갇힌 몸으로 곤경과 괴로운 처지를 당하지 않고서 일백 세까지 살면서 편안하고 영화로운 복록을 누린다고 쳐보자. 그렇다고 강물처럼 흘러가고 저녁볕처럼 가라앉는 시간이 또 얼마나 되겠느냐? 신숙주(申叔舟) 어른이 임종을 앞두고 “인생이란 모름지기 이처럼 그치고 마는 것을…….”이라며 탄식했다고 전한다. 그 분의 말에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잘못을 후회하고 죽음을 앞두고서 선량해지는 마음이 엿보인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몸에 아무 일이 없고, 마음에 아무 걱정이 없이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을 온전하게 마치는 것은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는 복력(福力)이다. 다만 굶주림과 추위에 밀려서 과거를 치르고 벼슬에 오르기 위해 바쁘게 다니지 않을 수 없다. 형편상 그렇게 사는 것이므로 한 사람 한 사람 그 잘못을 꾸짖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제 선친께서 남겨주신 논밭과 집이 있어서 죽거리를 장만하고 비바람을 막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분을 편안히 지키려 들지 않고 다른 것을 찾아서 바삐 돌아다니다가 명예를 실추하고 자신에게 재앙을 끼치는 처지에 이른다면, 이야말로 이로움과 해로움,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전혀 분간할 줄 모르는 짓이다.

 

내가 지어야 할 농사를 내가 지어서 내 삶을 보살피고, 내가 가진 책을 내가 읽

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며 내

인생을 마치려 한다.2

 

이것이 바로 옛 시에서 말한 ‘만약 70년을 산다면 백사십 세를 산 셈이라’는 격이니 어찌 넉넉하고 편안치 않으랴? 나도 그런 삶을 살지 못 하고서 네게 깊이 바라는 연유는 방공(龐公)이 자손에게 편안함을 물려주려 한 고심과 다르지 않다.3

                                                                                                         유언호초상화4

 

유언호(兪彦鎬, 1730~1796),〈여아서(與兒書)〉,《연석(燕石)》

  1. 유언호가 1790년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아들에게 부친 편지이다. 우의정으로 있던 그는 1789년 ‘조덕린(趙德隣)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에 유배되어 3년을 보냈다. 유배지에 위리안치된 채 환갑을 맞으니 무한한 감회가 일어 아들에게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분노를 삭이거나 표출하기보다는 지나온 인생을 서글피 되돌아보는 내용이다. [본문으로]
  2. 吾耕吾稼, 以養吾生; 吾讀吾書, 以從吾好; 吾適吾意, 以終吾世. ‘내[吾]’가 전체 문장을 압도한다. [본문으로]
  3. 방공은 후한(後漢)의 은사이다. 관직이란 몸을 망칠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지만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은 자손에게 편안함을 물려준다고 했다. [본문으로]
  4. 58세때 모습으로 1787년 이명기가 그렸다. 보물 제1504호, 규장각한국학연구원소장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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