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습득 코너

창에 붙인 글 / 박윤원

부흐고비 2009. 5. 18. 08:42

 

창에 붙인 글


집에는 반드시 창이 있다. 창은 따스한 햇살을 받고 서늘한 바람을 들이니, 사람이 출입하도록 만든 것만은 아니다. 창이 많으면 겨울에 탁 트여 춥고 창이 적으면 여름에 꽉 막혀 답답하다. 탁 트인 곳은 막을 수 있지만 꽉 막힌 곳은 통하게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창은 많은 것이 좋다. 서실은 더욱 그러하니, 책을 볼 때 밝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방은 동서남북에 모두 창이 있다. 환하고 상쾌하며 시원스럽게 사방으로 통한다. 나는 그 사이에 앉아 책을 읊조린다. 산빛은 창에 닿고 샘물 소리는 문으로 들어온다. 이름 모를 새가 와서 엿보기도 하고, 향기로운 꽃잎이 날아 들어오기도 한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꽉 막혀 답답한 고통이 없는 것은 모두 창의 덕택인지라 나는 매우 즐거워한다.

그리하여 사방의 창에다 각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선생의 말을 뽑아 글을 썼다. 동창에 쓴 “한가로와 무슨 일이든 여유롭지 않음이 없으니, 자다가 일어나면 동창에 붉은 해가 떠오른다.(閒來無事不從容, 睡起東窓出日紅)”는 글은 정자의 시다.1 남창에 쓴 “어제는 흙담이 면전에 서 있고, 오늘 아침에는 대나무 창이 해를 향해 열렸네.(昨日土墻當面立, 今朝竹牖向陽開)”라는 글은 주자의 시다.2 서창에 쓴 “묵정밭에는 호마를 심고, 초가를 솔그늘에 지었다. 진중하고 무심한 사람은, 쓸쓸한 집에서 밝은 달을 희롱하네.(畬田種胡麻, 結草寄松樾, 珍重無心人, 寒棲弄明月)”라는 글은 주자가 서료(西寮)에 붙인 시인데,3 ‘요(寮)’가 바로 창이다. 북창에 쓴 “북창에서 신음하니, 기운이 답답하여 풀리지 않네. 내 책을 내가 읽으니, 병이 낫는 듯하구나(呻吟北窓, 氣欝不舒. 我讀我書, 如病得蘇)”라는 글 역시 주자의 말씀이다.


늘 여기에 눈을 두고 있노라니 감정을 유발하고 흥취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좌우명을 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하여 다시 총괄해서 벽에다 이렇게 썼다. “환한 창가 궤안에 기대어, 맑은 낮에는 화로에 향을 피우고, 책을 펴고 엄숙하게 나의 천군(天君)4을 마주한다.(明牕棐几, 清晝爐薰, 開卷肅然, 事我天君)” 이것은 진서산(眞西山)의〈심경찬(心經贊)〉에 나오는 말이다.5

박윤원(朴胤源, 1734-1799)6,〈네 벽의 창에 쓴 글(四窓記)〉《근재집(近齋集)》

 

지상편도(池上篇圖)_강세황(개인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풍속화 도록) 

  1. 정이(程頤)의〈가을날 우연히 읊조리다(秋日偶成)〉라는 작품인데 원문에는 1구와 2구가 바뀌어 있어 바로 잡았다. [본문으로]
  2. 주희(朱熹)의〈범석부의 경복승개창시에 차운하다(次范碩夫題景福僧開窓韻)〉의 기구와 승구다. [본문으로]
  3. 주희의〈서료(西寮)〉전문이다. 전구의 ‘무심인(無心人)’이 ‘무심자(無心子)’로 되어 있으나《회암집(晦菴集)》에 의거하여 고쳤다. [본문으로]
  4. 여기서 천군(天君)이란 마음을 다스리는 학자의 맑은 뜻. 명(明)의 학자 여곤(呂坤)은 “천욕(天欲)이 있고 인욕(人欲)이 있으니, 음풍농월하면서 꽃을 찾고 버들을 따르는 일은 천욕이다. 천욕은 없어서는 아니 되니, 없으면 적막하다. 인욕은 있어서는 아니 되니, 있으면 더러워진다.” 하였다. [본문으로]
  5. 진덕수(眞德秀)의〈심경찬(心經贊)〉의 마지막 부분이다. [본문으로]
  6. 박윤원은 김원행(金元行)의 제자로 평생 성리학을 연구하였던 학자다. 그는 노년에 삼청동(三淸洞)의 교하정(皎霞亭)을 매입하여 그곳에서 한가하게 살았다. 조선시대의 가옥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창을 많이 내지 않았지만, 박윤원은 탁 트인 조망을 위하여 사방에 창을 내어 운치 있는 삶을 살았다. [본문으로]

'습득 코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모를 자신의 핵심역량으로  (0) 2009.05.20
3초의 승부사가 된 황호철  (0) 2009.05.19
바른 스승을 구하는 법 / 성해응  (0) 2009.05.15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 예정  (0) 2009.05.14
마음의 뿌리   (0) 2009.05.1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