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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다는 것, 옛사람과의 뜻 깊은 만남
요즘만큼 우리 고전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때도 드물다. 예전에는 감히 생각하기 어려웠던 기기묘묘한 테마의 고전 독서물이 쏟아져 나오고, 전국 곳곳에서 인문고전 강좌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삶이 날로 각박해지는 현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물론 대학에서 치르는 논술시험이라든가 입학사정관제도의 도입이 우리 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일시적 현상일 수도 있고, 국민소득 20,000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자국의 정신적 뿌리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된 여유가 가져다 준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건 고전이 일상에 지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면, 그래서 보다 인간다운 미래를 꿈꾸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있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고전이 재미있는 독서물이라거나 우리의 흥미를 불러 일으켜 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루고 있는 주제, 주제를 풀어가는 방식,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문체 등을 지금의 문학과 비교해 보면 낯설고, 어렵고,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 그러니 재미와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돌이켜 보면 그 유명하다는 세계적 고전인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조차 학창시절의 내게는, 깊은 감동은커녕 별반 재미없는 읽을거리였었다. 그럼에도 그때 나는 그런 나를 남들이 알아차릴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그리고 그런 내 자신의 교양 부족을 속으로 얼마나 깊이 자책했었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이제 그 부끄러운 유년의 기억을 고백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좀 두꺼워진 까닭인가?
그것만은 아니리라. 고전이든 전통문화든 마냥 ‘재미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뭔가 알고 읽어야 ‘재미가 있게 되는’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읽었던 『햄릿』의 번역본이 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오역(誤譯)과 비문(非文)투성이였던 그 난해한 고전을, 서양의 문학적 전통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셰익스피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의무처럼’ 읽고 이해하려 덤벼들었으니 재미는 말할 것도 없고 감동도 별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고전이란 우리에게 친숙한 현실을 다루고 있는 요즘의 작품들과 달리 그것이 산출된 시대적ㆍ작가적 맥락을 알고 읽어야 의미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조금씩 읽는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고전을 제대로 읽고 감상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이 산출된 당대적 맥락에 유념하면서, 그곳에 담긴 옛사람의 진정(眞情)을 꼼꼼하게 음미해보는 방식 말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경이로운 체험이기도 한 셈이다. 많은 사례 가운데 한 가지만 함께 감상해보기로 하자. 조선 최고의 문장가 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연암 박지원을 꼽을 것이다. 8촌 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를 다녀와서 쓴 『열하일기』는 그야말로 박지원의 종횡무진하는 사유와 번뜩이는 안목을 만끽할 수 있는 명문장으로 큰 인기를 끌기도 했었다. 박지원의 특장은 아무래도 이런 산문 분야이겠지만, 시에도 뛰어난 대 문장가였다. 그 가운데 돌아가신 형을 그리며 쓴 다음 시는 지금 읽어보아도 가슴이 짠해진다.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 我兄顔髮曾誰似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나면 우리 형님 쳐다봤지. / 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 今日思兄何處見
두건 쓰고 옷 입고 나가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 自將巾袂映溪行
정조 11년(1787), 58세로 죽은 형 박희원을 생각하며 지은 <연암에서 돌아가신 형을 그리다[燕巖憶先兄]>라는 작품이다. 아버지의 얼굴 모습과 수염을 꼭 닮아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형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1ㆍ2구. 하지만 그 형님마저 이젠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주던 형님이 가버리고 없는 것이다. 연암 골짜기로 몸을 피해있던 박지원은, 그런 형님이 문득 그리워졌다. 이제 형님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아볼 것인가? 형님과 자신이 닮았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서 의관을 정제하고 시냇가로 나가 흐르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형님의 자취를 찾아본다는 3ㆍ4구.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형과 아우로 이어지는 끈끈한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혈육이라고 하는 것이 뭐기에, 그리도 생김새조차 쏙 빼닮고 나오는 것인지. 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형제는 그토록 닮았고, 그래서 누구보다 정겨운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형을 잃은 슬픔을 애잔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박지원의 슬픔을 200년이 넘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 여기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고전이 주는 경이로운 체험이다. 고전을 옳게 이해하려면 이처럼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당대인의 마음에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고전의 의미가 되살아나고, 그것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흥부전」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18~9세기로 되돌아가 읽어야 하며, 『금오신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15세기로 되돌아가 읽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흥부전」과 같은 판소리계 소설을 읽을 때는 민중의 마음으로 읽어야 하고, 『금오신화』와 같은 한문소설을 읽을 때는 소외된 지식인의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당대 민중이 「흥부전」에서 말하고 싶은 것과 김시습이 『금오신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왜 그리도 사랑받는 고전이 되었는가도.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이 현재를 치열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어떤 삶의 지혜를 속삭이고 있는지도 듣게 될 것이다. 낡은 고전이 새로운 고전으로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고전을 읽으면서, 거기에 담긴 옛사람의 진정(眞情)을 느껴보려는 마음가짐을 별로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저 유명한 고전이라니까 의무감에서 읽고, 요즘의 눈으로 멋대로 재단하기 일쑤인 것이다. 하지만 고전을 고전답게 감상하는 법은 ‘지금/우리’와 ‘과거/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보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어
고인을 못 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할꼬?
그러하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옛사람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보는 것이고, 옛사람이 품었던 마음을 다시금 느껴 보려는 뜻 깊은 여정이다. 그러고 보니,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서문에 인용하여 일약 국민적 명언(名言)이 되었던 구절이 생각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조선시대 문장가였던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물론 유한준은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된다.”고 말했었다. 그런데도 유홍준은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순서를 뒤바꿔 기억하고 있다가 그만 잘못 인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착각에서 오히려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은 본디 하나라는 사실 말이다.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더 잘 알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알면 알수록 사랑이 깊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면 알수록 사랑이 식어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고전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알면 알수록 애정이 깊어지는 것은 진짜 고전이지만, 알면 알수록 애정이 식어가는 것은 가짜 고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글쓴이 : 정출헌(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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