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무송의 성공은 범에게 달렸다


중국의 고전 연극 무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역은 아마도 수호지(水滸誌) 극(劇)에서 범을 때려잡는 무송(武松) 역일 것이다. 맨손의 무송이 발톱을 세운 채 으르렁거리는 범과 엎치락뒤치락 싸우다가 약속된 시각, 무송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면 범이 쓰러지는 것이 극본의 줄거리다. 그러나 만약 무송 역을 맡은 주연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범 역할을 맡은 조연이 예정된 타이밍에 맞춰 쓰러져 주지 않고 계속 붙들고 싸움을 끌게 되면 극의 리듬은 깨지고 주연, 조연은 물론 연극의 흥행까지 다 망치게 된다.

그런 상황을 두고 도가(道家)에서는 ‘네가 운 좋게 무송의 역을 맡았더라도 결코 혼자 잘난 체 말라. 네가 비록 주인공이긴 하나 너의 성공은 하찮은 조연인 범에게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세상살이에서 각자 맡고 있는 배역은 언젠가는 서로 바뀔 날이 있어서 ‘오늘은 네가 무송의 역을 하고 있지만 내일은 범의 역을 맡게 될지 누가 아느냐’고 말한다.

연극과 마찬가지로 인생살이나 정치판에서도 언제든지 서로의 위치와 배역이 바뀔 수 있다는 겸허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겸허함과 현재 정해진 서로의 배역과 역할 분담을 존중할 때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상생이 나올 수 있다. 보수`좌파, 친이`친박, 북한과 남한, 여당과 야당, 약국과 편의점, 대학과 반값 등록금 등 대립된 갈등들은 상대 배역에 대한 존중과 조정보다는 내 배역 중심의 사고와 나만이 영원한 주역을 맡겠다는 자만과 남 탓에서 비롯되고 있다. 무송은 제때 쓰러져 주지 않는 범이 약속을 안 지켰으니 악(惡)이라며 타협과 조정을 거부한다. 범은 지난번 무송 역이 조연일 때 어깃장 놓던 게 싫어서 이번엔 내가 어깃장을 놓겠다고 맞서 극의 성공을 깨는 것과 같다.

요즘 우리의 다툼들이 바로 그렇다. 내 목표를 이루고 내가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해 내려면 상대 배역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한데도 그걸 인정할 줄 모른다. 극(劇)을 위해 각자가 맡은 배역 사이의 원칙과 약속을 지키고 서로의 배역이 맡은 역할을 존중할 줄 모르는 것이다. 내 배역만 중요하고 남의 배역은 나의 주역을 빛내주기 위한 액세서리쯤으로 여기고서는 화합과 상생이 나올 수 없다. 조정과 상생에는 반드시 일정한 양보와 희생이 요구된다. 잠시 무대에 올랐다가 죽어버리는 하찮은 범의 배역이라도 약속된 시간에 죽어주는 신뢰와 희생은 무송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극의 성공을 위해서다.

국민 보건에 기여해 온 6만 명 약사들의 약업권과 국민 편의를 챙겨야 한다는 정부라는 배역 사이의 마찰은 배역 간의 조정과 양보, 존중이 있었다면 정책 혼선과 마찰은 생겨나지 않았다. 반값 등록금 문제 역시 대학 측은 반발하고 정치권은 학생들의 촛불 앞에 주눅이 들어 어설픈 약속을 남발하면서 갈등만 키우고 있다. 거기다 4조~6조 원 가까운 납세 역할을 맡은 다수 배역(국민)들의 생각은 애당초부터 배제된 채 굴러가고 있다. 극이 쉽게 풀릴 리가 없다. 중수부 폐지론이 시비를 일으킨 것도 상대 배역은 무시하고 입법권자로서의 일방적 역할만 내세우다 빚어진 마찰이다. 너나없이 ‘너의 성공도 하찮은 조연에 달려 있음’을 지적한 도가의 깨침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자유민주와 경제 우위의 통일을 외쳐도 북한이라는 상대 배역의 어깃장 앞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민주통일이라는 극의 성공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4대강 사업도 아직은 주연을 자처하는 MB 정부가 이런저런 조연들의 마음을 다 다독인 건 아니다. 조연들이 기꺼이 제때 쓰러져 주고 죽어 주도록 미리 마음을 사야 하는데 내놓는 정책마다 그게 잘 안 된다. 사전 교감과 마음 얻기가 어려운 것은 서로 ‘내가 주연인데…’라는 의식 탓이다.

국정(國政)이라는 전체 극의 목표를 위해서는 반대당과 이해집단 등 조연들의 마음부터 잡고 희생을 이끌어 내야 한다. 내 욕심, 내 생각, 내 주장만 앞세우고 조연들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마구 무대를 휘저으면 극은 깨진다. 지금 우리는 너무 내 배역만 멋지게 보이려고 하느라 극이 깨지고 있는 걸 모르고 있다. 주연 뜻대로 하고 싶으면 먼저 조연들의 심정을 읽고 어루만져 마음부터 얻어라. 그걸 못하면 언젠가 다시 범에게 무송 역을 돌려줄 날이 온다.

매일신문(2011.6.13, 김정길 칼럼)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