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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선택이다


대체로 높은 직위의 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강호의 아취가 없고
화려한 일이 있는 사람은 한적하게 지내는 자태가 없게 마련이다.
어느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한 가지를 잃게 되고
작은 것에 뜻을 두면 큰 것을 놓치게 되는 법이다.


大抵享軒冕之榮者, 無江湖之趣, 대저향헌면지영자, 무강호지취,
有繁華之事者, 無蕭散之態, 유번화지사자, 무소산지태,
得於此而失於彼, 志乎小而遺乎大也. 득어차이실어피, 지호소이유호대야.
- 성현(成俔) <읍취당기(挹翠堂記)> 《허백당집(虛白堂集)》


[해설]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은 조선 성종(成宗) 시대의 문신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 예술을 지향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예지를 시사해주는 글을 남긴 분이다. 특히 《장자(莊子)》, 《두시(杜詩)》, 《고문진보(古文眞寶)》, 《문선(文選)》, 《예기(禮記)》 등에 나오는 문자를 자신의 글에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어 글이 풍부하고 사고가 유연한 것이 특징이다. 이분은 음악에 조예가 깊고 박학과 지식의 축적, 문화적 향유 등에 관심을 많이 두었는데, 그런 저자의 특장이 글에 자연스럽게 녹아 나고 있다.

이 글은 1489년(성종20) 음력 8월 17일에, 8세 연하의 조카 성세명(成世明)의 초청을 받아 읍취당에서 노닌 뒤에 지은 기문에 나오는 말이다. 읍취당은 원래 허백당의 백씨(伯氏)인 성임(成任)이 한강 가에 지은 정자이다. 허백당은 이 글에서 읍취당 주변의 12경승에 대하여 서술한 다음, 인생에 있어 일과 휴식이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데, 특히 일에만 급급하지 말고 강호와 산림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12경승의 묘사 부분은 필치가 자못 세련되어 글을 음미해보는 맛이 깊다.

허백당은 또 병으로 고향 전주(全州)에 칩거하고 있는 벗, 독수당(獨秀堂) 최숙문(崔淑文)을 위해 기문도 지어주었는데, 그 글의 말미에 동중서(董仲舒)의 ‘치각설(齒角說)’을 인용하여 세상일에 매몰되어 있는 허백당 자신보다 향리로 물러나 있는 벗이 더 풍요롭고 소중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최숙문은 자가 주경(周卿)으로, 허백당과는 30년 심우(心友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자 아들 성세창(成世昌)의 소싯적 스승이기도 하다. 최숙문은 향리에서 학문에 몰두하고 행의를 닦아 전주의 예산 서원(禮山書院)에 종향(從享)되었고 허백당은 몰후에 사화(士禍)의 여파를 입기도 하였으니, 저자의 말도 그냥 한 번 해본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한 무제 때의 걸출한 유학자 동중서는 3년 동안이나 강석(講席)의 휘장을 내리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공부했다는 일화를 남긴 분이다. ‘치각설’은 바로 이 사람의 전기를 기록한 《한서》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동물에게 재능을 나누어 줄 때, 큰 것을 주고 나서 또 작은 것까지 아울러 주지는 않았듯이, 사람도 나라의 녹을 먹는 자는 작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서민과 다투지 말고 절제해야 한다는 의론인데, 이는 요즈음에 더 절실하게 와 닿기도 한다.

하늘은 역시 고루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강한 이빨을 준 동물에게는 뿔을 주지 않고 날개를 달아준 새에게는 두 다리만을 주었으니, 그 큰 것을 받은 동물은 다시 작은 것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夫天亦有所分予, 予之齒者去其角,傅其翼者兩其足,是所受大者, 不得取小也.]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동중서의 말은 부귀한 자의 절제를 역설한 것이고 허백당은 인생에 있어 보다 현명한 선택을 강조한 것이라 맥락상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양립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다 얻을 수는 없는 것이 세상사는 이치임을 간파하고 적극적인 절제를 말하고 있는 점은 똑같다. 확실히 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 같다. 그렇다면 보다 중요한 것을 잘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 적극적 절제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고 충만하게 해 주지 않겠는가? 현명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백발은 멀리 있지 않다. 어, 어, 어, 하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홍안의 친구가 완연한 중년 신사이고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에 서리가 앉아 있다. 이것이 인생이다.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잘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글쓴이 :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





♪영화 여인의 향기(1993, Scent of a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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