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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판 신고식 문화, 신참례(新參禮)


요즈음에도 대학가에서의 과도한 신입생 환영회나, 군대의 신고식 문화의 폐단이 종종 언론에 오르내리곤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신고식 문화, 즉 신참례(新參禮)가 있었다. 조선 건국 초부터 꾸준히 유래되어 왔고, 어느 시기에서나 신참례가 과하여 사회문제가 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조선중기의 대학자였던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특히 신참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과거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九度) 장원공(壯元公)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고 모범적인 생활태도를 보였던 인물이었던 만큼 신참례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선배들의 생리가 누구보다 싫었을 것이다. 이이는 갓을 부수고, 옷을 찢으며 흙탕물에 구르게 하는 등의 신참례 폐단을 지적한 후에, 신참례의 연원에 대해 ‘고려 말년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고, 과거에 뽑힌 사람이 모두 귀한 집 자제로 입에 젖내 나는 것들이 많아, 그때 사람들이 분홍방(粉紅榜:아직 얼굴이 앳되게 보여 화장을 한 사람들이 붙은 방)이라 지목하고 분격하여 침욕(侵辱)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여 신참례가 고려후기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차지하자 이들의 버릇을 고쳐주고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것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원래의 신참례는 부정한 권력으로 관직에 오른 함량미달의 인물들에게 국가의 관직은 함부로 차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기 위해 시도되었지만, 이이가 살아간 시대에 이미 신참례는 원래의 좋은 취지는 잊혀진 채 그저 하급자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사회문제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의 상황을 담은 『태조실록』(태조 1년 11월 25일)에 도평의사사에서 감찰, 삼관(三館:예문관, 성균관, 교서관), 내시, 다방(茶房) 등의 관직에서 신참에게 번잡한 의식을 하는 폐단을 없앨 것을 청한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신참례가 조선초기에도 상당히 유행했음을 알 수 있으며, 15세기에 성현(成俔)이 편찬한 『용재총화』 중에서도 신참례에 관한 몇 건의 기록이 있다. 아래에서 그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삼관(三館)에 들어가는 자를 먼저 급제한 사람이 괴롭혔는데, 이것은 선후의 차례를 보이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인데, 그 중에서도 예문관(藝文館)이 더욱 심하였다.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拜職)하여 연석을 베푸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50일을 지나서 연석 베푸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며, 그 중간에 연석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매양 연석에는 성찬(盛饌)을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키는데 혹은 그 집에서 하고, 혹은 다른 곳에서 하되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춘추관과 그 외의 여러 겸관(兼官)을 청하여 으레 연석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중에 이르러서 모든 손이 흩어져 가면 다시 선생을 맞아 연석을 베푸는데, 유밀과(油蜜果)를 써서 더욱 성찬을 극진하게 차린다.

상관장(上官長)은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모든 선생과 더불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두 기생을 끼고 앉으니, 이를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한다. 아래로부터 위로 각각 차례로 잔에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
(이상 국역『용재총화』 권4)

 


평생도(平生圖) 중 유가(遊街) _ 고려대학교박물관

 

나. 삼관(三館) 풍속에는 남행원(南行員:조상의 덕으로 하던 벼슬아치)이 그 두목을 상관장(上官長)으로 삼아 공경해서 받들었고, 새로 급제하여 분속된 자는 신래(新來)라 하여 욕을 주어 괴롭혔으며, 또 술과 음식을 요구하되 대중이 없었으니, 이는 교만한 것을 꺾으려 함이었다. 처음으로 출사(出仕)하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예(禮)를 끝내면 신면(新免)이라 하여 신면을 하여야만 비로소 구관(舊官)과 더불어 연좌(連坐)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말관(末官)이 왼손으로 여자를 잡고 오른손으로 큰 종을 잡아 먼저 상관장을 세 번 부르고, 또 작은 소리로 세 번 불러서, 상관장이 조금 응하여 아관(亞官)을 부르면, 아관이 또한 큰 소리로 부른다. 하관(下官)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있었으나, 상관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없었다. 지위가 높은 대신이라도 상관장의 위에는 앉지 못하고, 세 관원 사이에 끼어 앉아서 부르되, 정일품에는 오대자(五大字), 종일품에는 사대자(四大字), 이품에는 삼대자(三大字), 삼품 당상관에는 이대자(二大字), 당하관은 다만 대선생(大先生)이라 부르고, 사품 이하는 다만 선생이라 부르되, 각각 성(姓)을 들어 이를 칭하였고, 부르고 난 뒤에는 또 신래자를 세 번 부르고, 또 흑신래자(黑新來者)를 세 번 부르는데, 흑(黑)은 여색(女色)이다.

신래자는 사모(紗帽)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은 뒷짐을 하며 머리를 숙여 선생 앞에 나아가서 두 손으로 사모를 받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였는데, 이것을 예수(禮數)라 하였다. 직명(職名)을 외우되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순함(順銜)이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역함(逆銜)이며, 또 기뻐하는 모양을 짓게 하여 희색(喜色)이라 하고, 성내는 모양을 짓게 하여 패색(悖色)이라 하였으며, 그 별명(別名)을 말하여 모양을 흉내 내게 함을 ‘3천 3백’이라 하였으니 욕을 보이는 방식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방(榜)을 내걸고 경하(慶賀)하는 날에는 반드시 삼관(三館)을 맞이한 뒤에 연석(筵席)을 베풀고 예를 행하였는데, 만약 신은(新恩)이 불공하여 삼관에게 죄를 지으면, 삼관은 가지 아니하고 신은도 또한 유가(遊街:급제자가 풍악을 앞세우고 웃어른이나 친척들을 찾아보는 것)하지 못하였다. 삼관이 처음 문에 이르러 한 사람이 북을 치면서 ‘가관호작(佳官好爵)’이라고 부르면, 아전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이에 응하고 손으로 신은을 떠받쳐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이를 경하(慶賀)라 하였고, 또 부모와 친척에게 경하하는 것을 생광(生光)이라 하였으며, 또 최후에 여인(女人)을 받들어 경하하는 것을 유모(乳母)라 하였다.

또 신은(新恩)은 방(榜)이 나는 대로 의정부ㆍ예조ㆍ승정원ㆍ사헌부ㆍ사간원ㆍ성균관ㆍ예문관ㆍ교서관ㆍ홍문관ㆍ승문원 등 여러 관사의 선배를 배알하고, 포물(布物)을 많이 걷어 이것으로 연회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데, 봄에는 교서관이 먼저 행하되 홍도음(紅桃飮)이라 하고, 초여름에는 예문관이 행하되 장미음(薔薇飮)이라 하였으며, 여름에는 성균관이 행하되, 이를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을유년 여름에는 예문관이 삼관(三館)을 모아 삼청동(三淸洞)에서 술을 마셨는데, 학유(學諭) 김근(金根)이 몹시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다가 검상(檢詳) 이극기(李克基)를 길에서 만났는데, “교우(交友)는 어디서 오는 길이길래 이렇게 취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장미(薔薇)를 먹고 온다.”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냉소(冷笑)하였다.
(이상 국역『용재총화』 권2)

신참례의 폐단을 막아보고자 조선시대의 헌법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에는 ‘신래를 침학(侵虐:심하게 괴롭히고 학대함)하는 자는 장(杖) 60에 처한다.’는 규정을 명문화했지만 암암리에 관습화되어 나간 신참례의 습속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선후기에 널리 유행한 고전소설 『배비장전』의 중심 소재가 신참례인 것에서도 신참례의 풍습이 관인 사회 저변에 강하게 정착되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글쓴이 :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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