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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내부에 있다
일본 속담에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이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오다 노부나가를 죽음으로 내몬 혼노지 사건에서 비롯된 말이다. 반란을 일으킨 부하 장수 아케치 미츠히데는 ‘적은 혼노지(本能寺)에 있다’를 외치며 노부나가를 공격, 불타는 혼노지에서 노부나가를 자결하게 만들었다. 배경과 배후를 두고 다양한 설이 회자되는 것과 무관하게 이후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말은 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10여 년 전만 해도 웬만한 사람 열에 여덟아홉은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열에 여덟아홉은 자신을 서민이라 칭한다. 중산층과 서민이 쉽게 구별되는 개념이 아닌데도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버리고 서민이라는 말을 쓴다. 이는 현실에 대한 만족감이나 장래에 대한 희망이 그만큼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하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대신 장래에 대한 불안을 마음속에 키우고 있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만 남게 된 양극화 사회에서 모든 해답은 돈에 달린 듯 보인다. 대한민국 최대의 화두가 된 복지 논쟁도 누가 어떻게 돈을 대느냐를 두고 찬반을 다툰다. 초등학생 무상급식에서부터 시작돼 반값 등록금으로 번진 논쟁도 돈의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교육을 비롯한 복지 논쟁의 해답은 돈에 있지 않다. 포퓰리즘이냐 아니냐도 중요하지 않다. 해답은 바로 소통에 있다. 같은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힘겨워하고 아파하는 마음들을 서로 나눠 지려는 마음에 해답이 있다.
초중고교도 그렇지만 특히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서울로 유학이라도 보냈다면 고통은 더 크다. 등록금에 하숙비까지 감당하려면 웬만한 월급쟁이는 일 년 벌이를 모두 쏟아넣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식더러 공부하지 말라고 할 부모는 없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지만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아우성이 터진다. 국가 경제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줄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구별이 없다. 아이를 남보다 잘 키우겠다는 희망은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학생 시기는 일생을 좌우한다. 학생 시절이 엉망이면 이후 사회생활도 나아질 수 없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앞날도 당연히 밝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기적은 국민들의 교육열이 기여한 바 크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민교육헌장은 학생이면 누구나 외워야 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된 헌장은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고…’로 이어진다. 국민교육헌장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교과서에서 사라졌고 몇 년 전에는 국가 기념일에서도 삭제될 정도로 찬반양론이 있지만 어쨌든 국가 근대화에 있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만은 틀림없다.
이제 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부모가 잘살든 못살든 학생은 장래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주역들이다. 국가의 살림을 맡아 줄 예비 인재들이다. 당연히 그런 예비 인재들을 국가가 외면해선 안 된다. 부모들의 빈부 격차는 본인의 탓에 달렸다고 하더라도 새롭게 출발하는 아이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같은 선상에서 출발토록 보장해 줄 필요가 있다. 반값 등록금은 그런 시각에서 봐야 할 문제다. 교육 개혁은 대학입시제도의 변화에서 찾기 앞서 교육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인식 변화와 실천에서 출발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이 서민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오늘 사람들의 마음속에 커져가는 불만과 불안은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협한다. 양극화란 말은 쉽게 쓰이지만 폭발의 위험성은 크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여길 때 그가 가질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다. 쓰러진 사람은 손을 붙잡아 주지 않으면 일어서기 어렵다. 국민들이 힘들어 할 때 국가가 그들을 외면하고선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총칼의 위협보다 더 무서운 우리의 적은 단절과 양극화다. 소통하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쳐 해낼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교육 문제의 해답은 이제 소통에서 찾아야 한다. 50년 100년 이후가 아니라 영원토록 이어질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한 교육 복지 정책을 고작 선거에서의 유불리로 따져서야 될 일인가.
출처 : 매일신문(2011.6.16, 徐泳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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