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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다는 것은?
1. 인간은 각자 타고난 자질이 있고 그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공부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화두는 교육이다. 학생인권조례, 등록금 문제, 대학수학능력시험, 교육 현장에서의 문제, 사교육 문제 등등 교육에 관한 문제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과연 우리나라는 교육열에 있어 세계 최고라는 것이 실감난다.
그러나 이 교육의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관심의 대부분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른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 예전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삶의 터전을 옮겼는데 지금은 자식의 공부를 위해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좋은 대학’이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닌데 이들 대학에 가기 위해 학부모와 학생들은 자신의 역량을 집중한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학부모의 관심은 교육에서 멀어진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대학 4년인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4년 다닐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12년을 투자하는데 비해 30년 아니 평생 종사할 직업을 찾기 위해 다니는 우리의 대학 생활 4년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각자가 자기의 적성에 맞는 학과를 찾아 타고난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배움의 목적이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이어야 한다.
조선 중기의 문인인 신최(申最)는 「원학(原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저 재(才)란 정해진 것이므로 박(薄)한 것은 후(厚)하게 할 수 없으며 짧은 것은 길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진보하여 나아간다는 말이니, 어리석은 자를 현명하게 하고 막힌 자를 통달하게 한다. 북산(北山)의 나무는 굵기가 같지 않으나 목수가 골라서 쓰며, 곤륜산(崑崙山)의 구슬은 아름답고 나쁨이 한결같지 않으나 옥 다듬는 사람이 취택하여 쓴다. 비록 들보나 기둥감 재목이 있더라도 도끼로 깎는 공을 들이지 않으면 탱자나무나 가시나무와 다를 게 없고, 비록 황종(璜琮) 같은 보배가 있더라도 갈고 다듬는 기교를 들이지 않는다면 기와조각이나 돌멩이와 다를 게 없다.[夫才者一定之目也, 薄者不可使之厚也, 短者不可使之長也. 學者進修之名也. 愚者可使之明也, 塞者可使之通也. 北山之木, 細大不同, 而匠氏擇焉, 西崑之璧, 美惡不一, 而玉工取焉. 雖有棟梁之材 不加斲削之功, 則與枳棘類矣, 雖有璜琮之珍, 不施琢磨之巧, 則與瓦礫混矣.]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타고 났다고 하더라도 교육을 통해 다듬지 않으면 재주를 완성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2. 선비들이 학문을 모르고 지낸 지가 오래되었다. 그들이 현달하지 못했을 때는 과거(科擧)와 이록(利祿)에만 뜻을 두고, 이미 현달하여서는 공명(功名)과 부귀(富貴)에만 마음을 쓰니, 어떻게 궁할 때는 그 몸을 착하게 하며, 현달하여서는 만민을 구제하는 학문을 바라겠는가?[士不知學久矣. 其未達也, 以科第利祿爲志, 及其已達也, 以功名富貴爲心, 尙何望獨善而兼濟之學乎?]
지금 우리의 현실도 이와 같지는 않은지 반성할 일이다.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아직 배워야 하는 시기에 자신의 적성에 맞는 학문 영역을 찾기보다 사회적 평판과 연봉이 높은 영역을 더 중시한다. 대부분의 인식이 공부의 목적을 ‘좋은 직장’에 두고 있는 듯하다. 어찌 보면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을 배움의 최종 목적에 두어야 하는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물질적인 측면이 정신적인 측면보다 더 강조되어 왔다. 물질을 잘 이용하지 못해 생활이 낙후되었던 조선 후기 이후, 이용ㆍ후생을 강조하는 실학의 한 유파가 나타났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덕ㆍ이용ㆍ후생 중에서 이용과 후생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학문 성향을 생각해 보면 정덕은 이미 기본 요소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이때에는 물질을 잘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물질문명의 개선에 대한 욕구는 매우 당연하다.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아직도 이용ㆍ후생에 강조점이 두어져야 하는가? 어찌 보면 더욱 더 발전시켜야 할 물질문명이지만 이제는 ‘정덕’을 앞세워도 되지 않을까?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더 인간에 대한 배려를 중시하고 인간을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학문의 중심이 옮겨가야 할 것이다.
3. 우리의 교육현실이 학생들을 강제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이 문화의 전달이라는 기능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교육에는 이미 ‘강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인들 억압을 받으며 공부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공부해야 그 효과가 극대화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조상들도 벌써 그 방법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얼마 전 선생님이 학생에게 맞았다는 기사가 났다. 세세한 내막이야 어쨌건 이것이 현재 학교의 현실이 된 것이다. 교육을 지상 목표처럼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교육 여건을 조금 더 냉철하게 바라보게 한다. 선생님이 학생을 제대로 지도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 경우에 따라 학생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일이 발생한다면 학생들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는가? 교권이 무너진, 선생님이 없는 학교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선생님의 잘못을 지적하는 기사를 접한다. 선생님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일도 아닌데 무슨 특종이라도 잡은 양 기사화된다. 이런 기사가 나갈 때마다 선생님들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클 것인지 생각하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때만 되면 한 번씩 교단의 비리를 보도하는 행태 역시 지양되어야 한다. 일부로 인해 열심히 노력하는 대다수의 선생님들의 사기를 꺾는 일은 되도록 자제하고 이 땅의 선생님들이 신바람 나서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재(才)는 반드시 학문을 해야만 성취되며, 학문은 반드시 스승을 통해야만 밝아지며, 학문의 근본은 스승을 존경하는 데 달려 있다.[才必由學而成, 學必由師而明, 學之本, 在於尊師.]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고 학생은 스승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교육의 질은 선생님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교육의 성패는 선생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글쓴이 : 이군선(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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