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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모든 것을 지리지에 담다 :『동국여지승람』 서문
1481년(성종 12) 성종은 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서거정(徐居正) 등이 완성한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받아들였다. 세종대에 편찬한 「지리지」와 명나라의 『일통지(一統誌)』를 바탕으로, 세조대부터 양성지(梁誠之)가 작업에 착수하여 1477년에 완성한「팔도지리지」에다 문사(文士)들의 시문(詩文)을 첨가하여 50권으로 완성한 것이다. 이로써 『동국여지승람』은 법전인 『경국대전』, 역사서인 『동국통감』과 더불어 성종대의 대표적인 편찬 사업의 성과로 자리를 잡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우리나라 각 도의 연혁과 관원을 개괄하고, 성씨ㆍ형승ㆍ산천ㆍ토산ㆍ성곽ㆍ봉수ㆍ누정ㆍ학교ㆍ역원ㆍ창고ㆍ불우(佛宇)ㆍ사묘ㆍ능묘ㆍ고적ㆍ인물ㆍ효자ㆍ열녀 등의 조목 아래 해당 내용을 나열식으로 기술하였다. 누정ㆍ불우ㆍ고적ㆍ제영에는 역대 명가(名家)의 시와 기문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또한 각 도(道)의 첫머리에 도별 지도를 수록하여 지역에 대한 공간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서문의 기록을 통해 당시인들의 국토와 지리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토지에 관한 책이 있은 지가 옛날부터입니다. 황제(黃帝)는 들을 구획하여 나누었고, 당우(唐虞) 때에는 12주로 나누었으며, 하 나라 때에는〈우공(禹貢)〉이 있었고, 주나라 때에는 직방(職方)이 있었으며, 진한(秦漢) 이후로는 각각 지(誌)와 도(圖)가 있었습니다. 송나라 가희(嘉熙) 연간에 건안(建安)의 축목(祝穆)이 《방여승람(方輿勝覽)》을 편찬하여 사물의 중요한 것을 널리 채택하여 구절마다 각 주(州) 밑에 나누어 넣었으니, 그 문장이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송(南宋) 시대에 천지가 분열되어 남쪽과 북쪽을 다 차지하지 못한 탄식이 있었습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명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문자와 궤도(軌道)가 통일되자, 《일통지(一統誌)》를 지어서 온 천하를 포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아, 훌륭합니다.[輿地有書 古矣 黃帝畫分野 唐虞分十二州 夏有禹貢 周有職方 秦漢以降 各有誌有圖 宋嘉熙中 建安祝穆 撰方輿勝覽 博採事要 逐節分入諸州之下 其文雅有足可尙 然趙宋渡江 天地分裂 不能無南北不盡之歎欽 惟皇明馭宇 文軌攸同 作一統誌 四海萬國 莫不包括 猗歟盛哉]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는데 모두 평양(平壤)에 도읍하였고, 한 나라 때에는 사군(四郡)과 이부(二府)를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오이처럼 나뉘어져 마한(馬韓)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고할 만한 도적(圖籍)이 없고, 그 뒤로는 신라ㆍ고구려ㆍ백제 세 나라가 솥발처럼 나뉘어졌습니다. 신라의 땅은 동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으며, 고구려는 동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며, 서북으로는 요하(遼河)를 넘었습니다. 백제는 서남으로는 바다, 동으로는 지리산, 북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삼국이 강토가 비등하여 서로 위가 되지 못하다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니 강토가 더욱 넓어졌으나, 그 말기에 이르러 영역이 날로 줄어들어 궁예(弓裔)는 철원에 웅거하여 후고려(後高麗)라 칭하고, 견훤(甄萱)은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니, 강토가 갈기갈기 찢어져 통일되지 못하였습니다.[念我東方 自檀君肇國 箕子受封 皆都平壤 漢置四郡二府 自是三韓瓜分 馬韓統五十四國 辰卞韓各統十二國 然無圖籍可考 厥後新羅高句麗百濟 三國鼎峙 新羅之地 東南至海 西至智異山 北至漢水 高句麗東至海 南至漢 西北踰遼河 百濟西南至海 東至智異 北至漢 然三國地醜 莫能相尙 新羅滅麗濟 幅員益廣 及其衰 境壤日蹙 弓裔據鐵原 稱後高麗 甄萱據完山 稱後百濟 土地幅裂 莫能統屬]
... 우리 전하가 즉위하신 10년 무술년 봄 1월에 신 양성지(梁誠之)가 《팔도지지(八道地誌)》를 바치고, 신 등이 《동문선(東文選)》을 바쳤더니, 전하께서는 드디어 선성부원군 신 노사신, 우찬성 신 강희맹, 지중추부사 신 성임, 남원군(南原君) 신 양성지, 대사성 신 정효항(鄭孝恒), 참의 신 김자정, 승문원 판교 신 이숙함(李淑瑊), 좌통례(左通禮) 신 박숭질(朴崇質), 행 호군 신 박미(朴楣) 및 신 거정 등에게 명하여 시(詩)와 문(文)을 《지지(地誌)》에 넣게 하셨습니다. 신등이 공손히 엄하신 명을 받자와 사신(詞臣)을 가려서 거느리고 분과를 나누어 이루기를 구하여 위로는 관각(館閣)의 도서(圖書)로부터 아래로는 개인이 보관한 초고(草藁)까지 열람하지 않음이 없이 일체 나누어 넣었습니다.[... 我殿下卽位之十年 戊戌春正月 臣梁誠之進八道地誌 臣等進東文選 上遂命 宣城府院君臣盧思愼 右贊成臣姜希孟 知中樞府事臣成任,南原君臣梁誠之 大司成臣鄭孝恒 參議臣金自貞 承文院判校臣李淑瑊 左通禮臣朴崇質 行護軍臣朴楣 曁臣居正等 以詩文添入地誌 臣等恭承嚴命 簡率詞臣 分科責成 上自館閣圖書 下至私藏草藁 無不披閱 一切分入]
신증동국여지승람 중 팔도총도
연혁(沿革)을 먼저 쓴 것은 한 고을의 흥폐를 먼저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풍속과 형승을 다음에 쓴 것은 풍속은 한 고을을 유지시키는 바이며, 형승은 사경(四境)을 공대(控帶)하는 바이므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경위(經緯)로 삼고, 높은 성과 큰 보루를 금포(襟抱)로 삼았습니다. 묘사(廟社)를 맨 먼저 기재한 것은 조종(祖宗)을 높이며 신기(神祇)를 존경해서이고, 다음에 궁실(宮室)을 쓴 것은 상하의 구분을 엄하게 하고, 위엄과 무거움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오부(五部)를 정해서 방리(坊里)를 구분하며, 여러 관청을 설치하여 모든 사무를 보는데, 능침(陵寢)은 조종의 길이 편안한 곳이며, 사(祠)와 단(壇)은 또 국가의 폐하지 못할 전례입니다. 학교를 일으키는 것은 일국의 인재를 교육하려는 것이고, 정문(旌門)을 세우는 것은 삼강(三綱)의 근본을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사찰(寺刹)은 역대로 거기에서 복을 빌었고, 사묘(祠墓)는 선현(先賢)을 사모하여 추숭(追崇)한 것입니다. 토산은 공부(貢賦)가 나오는 바이고, 창고는 공부를 저장하는 곳입니다. 누대(樓臺)는 때에 따라 놀며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것이고, 원우(院宇)는 여행객을 접대하고 도적을 금하는 것입니다. 관방(關防)을 웅장하게 한 것은 도적을 방비하기 위해서이고, 참(站)과 역(驛)을 벌여 놓은 것은 사명(使命)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인물(人物)은 과거의 어진 이를 기록한 것이고, 명환(名宦)은 장래에 잘하기를 권한 것입니다. 또 제영(題詠)을 마지막에 둔 것은 물상(物像)을 읊조리며 왕화(王化)를 노래하여 칭송함은 실로 시(詩)와 문(文)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先之以沿革者 以一邑興廢 不可不先知也 繼之以風俗形勝者 風俗所以維持一縣 形勝所以控帶四境也 以名山大川 爲之經緯 以高城大砦 爲之襟抱 先書廟社 所以尊祖宗 敬神祇也 次書宮室 所以嚴上下 示威重也 定五部而辨坊里 設諸司而治庶務 陵寢乃祖宗永安之地 祠壇又國家不刋之典 興學以育一國之才 旌門以表三綱之本 寺刹歷代以之祝釐 祠墓前賢以之追崇 土産者貢賦之所自出 倉庫者貢賦之所以貯 樓臺所以時遊觀而待使臣也 院宇所以接行旅而禁盜賊也 壯關防以待暴客 列站驛以傳使命 人物記已往之賢 名宦勸將來之善 又終之以題詠 所以吟詠物像 歌頌王化 實不外乎詩與文也]
신증동국여지승람 중 강원도 평해군 부분
경도(京都)의 첫머리에 총도(摠圖)를 기록하고, 각각 그 도(道)의 앞에 도(圖)를 붙여서 이 양경(兩京) 8도로 50권을 편찬하고 정서하여 바치나이다. 신등이 지금 세상에 살면서 역대의 사적을 모두 찾아야 하고, 서울에 거처하면서 사방의 먼 곳까지를 상고하자니, 이것은 들고 저것은 빠뜨리며 그릇된 것은 그대로 따르고 진실은 잃은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책을 펴서 그 일을 상고하고 도(圖)를 펼쳐 그 자취를 본다면 태산(泰山)에 오르거나 황하(黃河)의 근원을 끝까지 파고들 것 없이 8도의 지리가 마음과 눈에 환하여 문을 나가지 않고도 손바닥을 보듯이 분명히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한때의 선비들이 임금의 총명을 열어 넓히고 융성한 정치를 도울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장차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조종의 넓은 토지와 멀리까지 미친 왕화(王化)를 이어받아 길이 만세토록 지킬 것이 의심이 없습니다. 성화(成化) 기원 17년 창룡(蒼龍) 신축 4월 하순에 순성명량 좌리공신 숭정대부 달성군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서거정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서문을 씁니다.[錄摠圖於京都之首 各付圖於其道之先 以此兩京八道 撰成五十卷繕寫以進 臣等居今世 而窮歷代之迹 處都下而考四域之遠 焉能免擧此而遺彼 循訛而失實哉然披書以考其事 覽圖以觀其迹 則泰山不必登 河源不必窮 八道地理瞭然心目 曾不出戶而視如指掌矣然則豈徒一時士子 開廣聰明 仰贊盛治而哉 必將聖子神孫 承祖宗輿地之廣 聲敎之遠而永言持守於萬世也 無疑矣 成化紀元之十七年 蒼龍辛丑四月下浣 純誠明亮佐理功臣 崇政大夫達城君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臣徐居正拜手稽首謹序]
(이상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국여지승람 서문> 에서)
위의 『동국여지승람』 서문에는 중국의 『방여승람』과 『일통지』의 영향을 받아 지리지를 편찬한다는 것과, 단군 이래 우리 역사와 지리를 개관하고 있다. 이어 지리지에 포함해야 할 항목과 이유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지리지로써, 지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역사ㆍ행정ㆍ군사ㆍ사회ㆍ민속ㆍ예술ㆍ인물 등 지방 사회의 모든 방면에 걸친 종합 인문지리서의 성격을 지녔다.
『동국여지승람』은 완성 이후에도 꾸준한 교정, 증보 작업이 계속되었다. 1485년(성종 16) 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해 1차 교정이 이루어졌고, 1499년(연산군 5)에는 임사홍(任士洪)ㆍ성현(成俔) 등에 의해 2차 교열이 진행되었다. 1528년(중종 23)에는 새로운 보충작업에 착수하여, 보완된 곳에 '신증(新增)'의 두 글자를 첨가하였다. 그 결과 1530년(중종 25)에는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완성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체계적인 국토 인식은 조선후기의 지리지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영조는 『여지도서(輿地圖書)』, 정조는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를 간행하였고,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와 같은 사찬(私撰) 지리지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을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지리지에 꼭 넣고 싶어 했던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의 시대에 만들어진 지리지의 항목들과 조선시대 지리지의 항목들을 비교하면서 그 변천상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글쓴이 :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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