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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무화과 / 김미향

부흐고비 2019. 10. 27. 20:29

무화과 / 김미향

2016.2월 수필과비평 신인상 


깡마른 몸집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큰길을 내다보던 마른 체구의 아버지처럼 나무는 목을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고샅길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잎을 내려놓은 늙은 나무는 바다를 훑고 다가오는 샛바람에도 끄떡없다. 짱짱한 그 모습을 보며 오래전, 마음에 두었던 형상 하나 꺼낸다.

아버지는 기어이 가지치기를 하고 말았다. 무성하던 잎들과 오동보동하게 살이 오른 나뭇가지는 간데없고 휑한 몸통만이 바람과 맞서고 있다. 곁가지만 자르자고 채근했던 어린 나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원가지까지 잘려나간 모양새에 골목을 들어서던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소리는 급물살을 탔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이 지경이 되었으니 신경이 곤두설 만도 했다. 뒷등을 따라다니는 어머니의 성화에 아버지의 헛기침이 잦아졌다.

처음으로 한 가지치기가 마음에 걸렸을까. 아버지는 젖버듬한 나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대화보다 더 깊은 교감이 오가는 듯했다. 그 침묵을 깰세라 태양도 슬그머니 초승달을 앞세웠다. 아버지는 몽땅 빗자루로 잎사귀를 쓸어냈다. 쓸고 또 쓸어내는 것은 나뭇잎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어둠을 쓰레질하는 손길엔 봄을 불러내는 속내가 들어있는 듯했다. 서늘바람을 털어내는 철새들의 힘찬 날갯짓에 겨울은 어느새 문턱을 넘어섰다.

굳었던 흙이 몸을 풀었다. 잎들도 진초록으로 무성해졌다. 자연에 온몸을 맡기며 무화과나무는 부지런히 제 몸을 살찌웠다. 이윽고 가을이 되자 나무는 자신의 생을 모두 쏟아냈다. 옹골진 검붉은 열매에 아버지의 표정은 소년이 되었고 어머니는 살평상에 앉아 멋쩍게 웃었다. 아마 지난번의 날 세운 목소리가 못내 미안했으리라.

어린 시절, 찬 것을 과식해 배탈이 났었다. 체했을 거라 짐작한 어머니는 손가락을 따 주었다. 효과가 없었다. 낌새를 알아차린 아버지가 꿀을 섞은 무화과를 건네주었다. 약이라 생각하고 몇 번을 더 먹었다. 뱃속이 차츰 편안해졌다. 그 후로도 소화가 안 되거나 배탈이 났을 때 아버지는 거친 손으로 무화과 껍질을 벗겨 주었다.

그 아버지가 병실에 정물처럼 누워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이 구부러진 등처럼 물음표 된 지도 오래다. 주삿바늘로 인해 검자주색으로 부은 손등은 두어 달이 지나도 가라앉기는커녕 멍이 더 심해져 간다. 손을 잡는다. 눈도 맞춘다. 다 큰 딸이 아직도 배앓이를 하던 그 날의 아이로 보였을까. 이울어 가는 눈동자엔 여식의 걱정이 가득한 듯하다.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안으로 삭이는 가장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여도 살림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하루 일이 끝나면 술에 젖은 얼큰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며 골목을 들어서곤 했다. 구슬피 들려오는 가락은 노래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씌워진 가난을 털어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토해내지 못한 신세타령 같은 것이었다.

고생길을 지나 꽃길이 열리나 싶었다. 굴곡진 길 지나면 곧은길도 나오리라 믿었다. 한숨 돌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승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숨소리가 내 가슴에 먹먹히 얹힌다. 약주가 없으니 흥도 사라졌을까. 하루에도 열두 번이나 술술 잘도 넘던 아리랑 고개를 두고 지도에도 없는 저승길을 오르락내리락한다.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쳇바퀴 같았던 인생이 지겨웠던 것일까. 비바람이 매섭게 후려치던 날, 아버지는 맥없는 눈길을 거두었다.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는 일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 길을 홀연히 떠나셨다. 고단한 인생길을 달려왔으니 이제라도 땅의 품에서 편히 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람과는 달리 무화과나무는 제자리에서 세월을 맞는다. 모진 풍상을 견뎌내느라 열매는 피멍으로 에둘러 있다. 겉이 핏빛으로 타고 있을 때 속에서는 발그스름한 꽃이 촘촘히 피어난다. 쓰라림 없는 결실이 어디 있으랴. 열매를 얻기까지 햇빛만이 있었을까. 바람과 비와 태풍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무화과는 참 많은 속내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리라.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제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아버지의 속마음은 꽃을 품은 무화과 같다.

마당귀를 지키는 무화과나무의 옆구리를 쓰다듬는다. 코끝에 감도는 냄새가 땀에 젖은 아버지의 시지근한 살내 같기도 하고, 구수한 막걸리 냄새 같기도 하다. 무화과는 때맞추어 열리건만 아버지는 이제 곁에 없다. 당신의 얼굴이 떠오르는 늙은 나무 위로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노을이 진다. 설익은 놀이 무화과 빛이다. 그 빛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다독거린다. 이제 내게는 영원한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이름, 아버지. 아버지는 무화과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사붓이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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