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직지 / 김미향
제4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어둠의 끝자락에 햇살이 눈부시게 고개를 든다. 호젓한 길 위에서 만나는 세월의 흔적들이 역사를 말하기라도 하듯 걸음걸음 밟힌다. 야트막하게 흐르는 개울을 따라 걷노라니 길가의 평범한 물조차 나를 정화시키는 것 같다. 삼국三國의 정기가 어린 직지사, 천육백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직지사直指寺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능여대사가 절을 중건할 당시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측지하여 지은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군데군데 자리한 늙은 나무들이 운치를 더하고 활개 치듯 창공으로 펼쳐진 가지는 위엄마저 느끼게 한다. 기품 있는 자태로 천 년이 넘도록 한 자리를 지켜온 고찰은 눈요깃거리가 지천이다. 고개를 돌리니 곳곳에 많은 보물이 요새처럼 숨어 있다.
받들어 모시는 만큼 마음도 하늘에 닿는다는 믿음을 지녔을까. 대웅전 법당 안에서 쉴 새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몸을 굽히는 노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새벽녘부터 하늘을 향한 두 손은 누구를 위한 몸짓인가. 위에서 내려다보지만 겸손해 보이는 석가여래가 빙긋이 웃고 있다. 입가의 미소는 노파에게 괜찮다고 말을 건넨다. 근심을 내려놓으라 한다.
절대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로를 얻었는지, 아니면 여래의 귀띔을 받았는지 예불을 마치고 나오는 어르신의 얼굴이 환해 보인다. 삶의 번뇌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올린 기도는 큰 불상만큼이나 믿음도 크고 깊어졌으리라. 참 신기하게도 이곳은 저저마다의 사연에 답을 내놓는 것 같다. 제 품을 찾는 이에게만 보여주는 부처의 슬기로운 셈법이 아닌가 한다.
걸음을 옮긴다. 선이 고운 돌담을 따라 걷고 또 걸어간다. 시간의 두께가 켜켜이 쌓여 있는 담 모롱이를 돌아가니 저만치에서 어머니가 손을 흔든다. 새파랗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할미꽃이 되어 나를 맞는다.
어머니는 하루를 이틀처럼 살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신 분이다. 지난 세월을 써 내려가자면 책 열 권으로도 부족한데, 정작 당신은 아들딸이 삶의 훈장이라며 휘어진 엄지를 치켜세운다. 한때는 섬섬옥수였을 그 손에 옹이처럼 굳어 있는 왕마디가 딸의 마음을 섧게 만든다. 나의 잣대로 어머니가 견뎌온 긴긴 시간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여식은 날로 좋은 시절을 맞고 어머니는 나날이 세월을 먹어간다.
어디선가 쪼르륵대며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어머니의 손맛이 자작하게 졸여지는 것처럼 귓전에 와 닿는다. 맛이 덜해도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만드는 솜씨야말로 오랜 세월의 내공이 녹아 있는 어머니만의 고유한 기술이 아니겠는가. 한물간 생선의 살을 발라 입에 넣어 줄 때면 제비 새끼처럼 받아먹기만 하고 어쩌다 흘린 밥알은 어머니의 차지가 된다. 수십 년을 봐 온 익숙한 풍경 안에는 이리 치대고 저리 부대끼며 살아야 했던 지난날의 애환이 배어 있는 듯하다. 가진 것 전부 다 내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어머니를 통해 나는 마음의 눈을 키우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간다.
햇살이 얼굴을 간질인다. 몇 걸음 더 나아가니 경주 옥돌로 만들어진 천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이 코앞에 있다. 보이지 않는 빗장을 열고 들어선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 모습이 제각기 달라 모든 여래상을 한 곳에 모아둔 것 같다. 공기마저 엄숙하게 가라앉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움켜잡는다. 제풀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비뚤어진 손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위축이 되어 사춘기를 보낸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통통배 위에서 놀다가 입항하는 배를 미처 보지 못해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다치고 말았다. 상처를 입었으나 불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괜히 혼자서만 끙끙 앓아왔었다. 돌이켜 보니 이성보다는 감성에 충실했던 시절이고 곧고 긴 손가락에 대한 갈망이었음을 지금에야 자각하게 된다. 얌전히 있으면서 내 삶을 응원했을 그것이 지금은 고맙고 귀엽기 그지없다.
가만히 손을 들여다본다. 손가락은 한 손에서 뻗어 나왔지만 그 자리는 따로따로이듯이 각각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서로의 협동이 답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제 위치에서 주어진 몫을 다해줘도 퍽 다행한 일이리라. 두 손이 한 손처럼 움직여야 하는데 어느 한 손가락이 쉬면 다른 손가락이 곱절로 일을 해야 하므로 힘들 때마다 함께 하자는 손가락들의 소통하는 모습이 엿보이는 듯하다.
많은 부처에게 웃음을 남기며 돌아선다. 거센 바람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공영하는 내면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젖버듬히 서 있는 큰 나무가 시야를 사로잡는다. 발바투 다가선다. 꺾이는 대신 굽이쳐 자라는 길을 택한 고목의 의지에 몸이 자연스레 낮아진다. 얼마를 살아야 이런 모습이 될까.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무는 내게 큰 스승이 된다. 살다 보면 복병을 만나 어려움을 면치 못할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저 나무를 떠올리며 손으로, 마음으로, 눈으로 타협하는 지혜를 배우리라. 타인을 향해 뒷손가락질하기보다는 이곳에서 알게 된 손의 쓰임새를 기억하련다. 직지사를 창건했던 위대한 손처럼, 비뚜름한 내 손도 무언가 해낼 수 있을까.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 연필을 잡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어슷하게 자라난 손이 서투른 문장을 다듬어가고 있지만, 타는 목마름은 온몸을 펌프질해 대며 애먼 심장을 쥐락펴락한다. 나와의 인연으로 글귀는 숨죽여 울고 어설픈 단어들의 담금질만 계속된다. 몸살을 앓으며 뿌리를 내릴 긴 여정의 끝에는 어제와 다른 나를 꿈꾼다면 욕심일까. 너무 성급해 달걀에서 닭 울음을 구하는 건 아닌지 모른다.
한 번 더 고요한 절터를 둘러본다. 앉음앉음이 수수께끼 같다. 사바세계와 극락세계를 연결 짓느라 윤회의 굴레 속에서 지었다 허물고 끼워 맞추기를 얼마나 되풀이 했을까. 톱으로 나무를 썰어 끌로 쪼고 장도리로 찍다가 정 힘이 들면 손바닥에 침을 퉤 뱉었으리라. 무심코 내뱉는 침은 힘을 돋우어 주는 삶의 추임새요, 고단함의 하소연이 아니었겠는가. 고된 노동과 정신적 고통을 나무 깎듯이 깎아 내며 완성한 도량에는 숨은 공로자인 이름 모를 민초들의 정신과 땀이 녹아 있는 듯하다.
절 하나를 짓기 위해 손에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이 박이고 예리한 연장에 몸도 마음도 수없이 찍히고 베였을 터이다. 그 손의 대가는 지금까지도 신과 인간을 이어주고 소망과 응답을 얻게 하는 소통의 다리가 되고 있다. 사찰이 간직한 깊은 시간의 무게를 헤아려본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렇듯 부족한 면을 짜 맞추고 알아맞히며 풀어가는 미로와 같은 삶은 아닐는지 모른다.
한줄기 바람이 경전을 읽고 지나간다. 잠시라도 문명의 짐을 내려놓고 싶을 때, 이 넉넉한 품으로 찾아들어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아도 좋으리라.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암자와 암자를 지나는 바람이 가슴을 씻어주고 푸른 숨을 내쉬는 숲과 솔향기가 지친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그뿐이랴. 가리지 않고 중생을 굽어보는 붓다가 있으니 예서는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지 않겠는가. 진흙 속에서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는 연꽃처럼 사람들도 법당에서 괴로움을 아뢰고 영혼의 위안을 얻어가길 바라며 가름길을 따라 걸음을 떼어 놓는다.
천육백여 년의 세월을 버텨낸 옛 절은 풍상에 낡고 닳아도 흐르는 듯 유연함은 그대로인 듯하다. 섬세한 무늬와 품위 있는 모양,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게 놀랍기만 하다. 힘들이지 않고 그 시대의 자화상 같은 작품을 얻으니 얼마나 좋은지. 오롯이 두 발로 찾아와야만 볼 수 있는 선조들의 값진 선물이다.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존재 자체로도 귀한 이 작품을 지키고 사랑하는 일에 더 욕심을 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은 암자를 중생처럼 끼고 앉은 대웅전은 시간을 기록하며 오늘도 그렇게 살아 있는 역사가 되어 흘러간다.
오랜 불교의 숨결 위로 붉은 가사袈裟 같은 햇살이 흩뿌려진다. 장삼 자락 같은 산자락을 휘감은 사찰이 황악산의 너른 품에서 그 빛을 받으며 깨어난다. 나는 그곳에다 설익은 나를 내려놓고 구붓한 일주문을 빠져나온다.
연초록 바람이 숲을 어루만지며 산을 넘어간다. 불교 경전이 적혀 있는 화엄경이 바람을 타고 곳곳으로 가 모든 중생들의 악업을 씻어 주리라 믿는다. 이미 천 년이 훌쩍 지난 일이지만 가까이에서 삼국의 숨결을 느끼고자 찾은 직지사는 석가모니의 삶과 참 닮아 있는 것 같았다.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