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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 없는 배씨 아저씨 / 김미향
2016 호국보훈문예대전 공모전 최우수상


한국전쟁의 아픔이 잠들어 있는 장사리 바다는 아침노을로 치자색이다. 동녘 하늘은 그 날을 다시 불러오듯 핏빛으로 타오르고 갈매기들은 한 서린 바다와 뭍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참혹했던 전쟁의 폭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다는 말이 없고 파도 소리만이 적요한 침묵을 깨뜨린다.

저 멀리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물처럼 앉아 있다. 장사상륙작전 때 물속에 가라앉은 작전용 수송함인 문산호는 얼마 전 실물 크기와 같은 모형으로 현장에 돌아왔다. 한국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듯, 한 점의 푸른 멍 자국으로 다가온다.

아저씨는 술만 마시면 아버지를 찾아와 주정을 부렸다. 한쪽 눈이 없어 애꾸눈이 배씨라고 불렸던 그는 목소리도 걸걸하고 키도 컸다. 삽짝에서 형님하고 아버지를 부르면 집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목소리만으로도 공포를 주는 무시무시한 아저씨 앞에 어린 나는 나서지도 못했다. 오로지 문고리만 꽉 움켜잡은 채 두 귀를 곤두세울 뿐이었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뚫어진 문구멍으로 아저씨와 아버지를 엿보았다. 그는 억울한 듯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형님은 나쁜 놈이라요. 암- 나쁜 놈이고말고. 죽은 몸뚱이도 찾지 못한 사람이 천지인데, 형님은 인물 잘 나, 필체 좋아, 전쟁 통에서도 살아남았으니 참 복도 많은 양반이지.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내 같은 놈이 총알받이 한 덕에 형님은 살아온 줄이나 아쇼.”핏발 선 눈심지로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난리 통에 초상난 집이 어디 한두 집인교? 유골이 되어 돌아온 사람도 수두룩한데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형님은 참말로 감지덕지해야 합니데이.”입에 거품을 물고 삿대질을 해댔다.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술만 따라 주었다.

취기가 온 몸으로 퍼졌을까. 혀 꼬부랑 소리도 잦아들었다. 일어서는 아저씨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입이 아프도록 풀어내던 아저씨의 응어리도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피우다 만 꽁초에 불을 붙여 골목을 나섰다. “그 아저씨는 왜 맨날 아부지한테만 큰 소리 치노?”내가 못마땅해 입을 삐죽거리면 아버지는 괜찮다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뒤에 감춰진 슬픔을 어린 나도 읽을 수 있었다.

얼굴에 곰보 자국까지 있어 나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던 아저씨는 아버지와 함께 6·25 참전 용사였다. ‘적군을 사살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총이 주어지고 어린 학생들까지 군용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갔다. 싸움이라곤 몰랐던 마을 젊은이들을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아버지는 운이 좋게도 미군부대 행정병에 배치되었다. 전우들과 친구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갈 때 아버지는 전시 상황을 기록하며 포화 소리에 묻혀 하루하루를 보냈다.

전쟁이 막을 내리고 배씨 아저씨는 파편에 맞아 애꾸눈이 되어 돌아왔다. 이웃 동네에서조차 ‘애꾸’로 통했고 박박 얽은 얼굴이라 ‘빡조’로도 불렸다. 사람들은 그의 가족까지 업신여겼다. 한쪽 눈을 잃은 아저씨는 점점 술에 의지하며 살았다.

그런 아저씨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옥선이는 늘 혼자 놀았다. 소꿉놀이를 하거나 공기놀이를 할 때도 그랬다. 옥선이와 어울리면 아저씨처럼 눈이 없어지거나 얼금뱅이가 될까봐 겁이 났다. 옥선이가 한 발짝 다가오면 우리는 두어 발짝 물러났다. 그럴 때면 잘 웃던 옥선이도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았다. 저만치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외톨이였다. 그러다 땅거미가 지면 혼자 놀기를 끝내고 사랫길을 따라 집으로 갔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고 한국전쟁을 알아갈 때쯤 아저씨는 먼 길을 떠나셨다. 보리쌀을 꾸어 이듬해에 갚기도 하고 이 집 저 집에 품을 팔며 생계를 꾸려갔던 아저씨. 국가 유공자 예우도 받지 못한 전쟁의 후유증은 평생 아저씨를 괴롭혔고 가족들의 생활마저도 힘겹게 했다. 아저씨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끝났다. 아버지는 그 날 밤새도록 손에서 술을 놓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식구들은 마을을 떠났고 그렇게 내 기억 속에서도 잊혀갔다.

십여 년 전 한국전쟁의 아픔이 수장되어 있는 장사리 앞바다에서 한 척의 배가 발견되었다. 많은 유골이 쏟아져 나온 배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케 한, LST문산호였다.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하도록 장사리에 상륙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라’는 비밀 명령을 받았지만 출발 몇 시간 만에 풍랑을 만나 칠백 여명의 학도병과 같이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잊혔던 그 문산호가 텔레비전 화면 가득 메우며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시울이 떨렸다. “내가 미군부대에서 문산호 소식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데이.” 느닷없이 터진 전쟁을 겪어야 했던 젊은 날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총성이 멎은 지 이미 오래건만 아버지 가슴속의 대포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때의 참혹했던 상흔이 아직껏 남아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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