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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버지의 바다 / 김미향

부흐고비 2019. 10. 27. 20:48

아버지의 바다 / 김미향
제1회 포항바다문학제 우수상


이정표도 없는 바닷길, 번지도 없는 아득한 길을 아버지는 매일 찾아가 부표를 던지고 그물을 끌어올렸다. 보이지 않는 깊이에서 올라오는 그물을 보며 아버지는 한결같이 만선을 기대했을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그물을 놓고 당기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객지로 공부하러 떠난 언니 오빠를 대신해 나는 살림 밑천이 되어야 했다. 해거름에 바다에 나가 그물을 놓고, 이른 새벽에 거두어 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기 싫은 마음에 태풍이 몰아치기를 바란 적도 많았다. 험해진 손이 서러워 혼자 엎드려 운 날이 많았지만 수업료를 가져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참을 수 있었다.

어둠이 수평선 위로 사라질 즈음, 아버지를 따라 나도 작은 고깃배에 몸을 싣고 바다 위에서 하루를 맞이했다. 어디쯤에 그물을 풀어 놓았는지도 모를 넓은 바다는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바다의 출렁거림은 요람처럼 나를 재우려 들었다. “막둥아, 눈 뜨거라.” 아버지의 나직한 목소리에 놀라 다시 손발을 맞추었다. 그물을 올렸다. 제법 묵직했다. 펄펄 뛰는 생명력이 새벽의 활기를 불어넣어 줄 것 같았다. 바다가 통째로 올라올 거라는 기대감에 숨을 크게 들이쉬며 힘껏 잡아 당겼다.

아뿔싸! 바다 쓰레기가 그물을 점령해 버렸다. 이른 새벽에 나온 대가로 잔고기 몇 마리가 전부라니 바닷속을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엉켜 버린 그물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고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풍어를 바랐던 가슴에 작은 격랑이 일었다. 내어주는 만큼만 가져갈 수 있는 곳이 바다이기에 오늘 빈손으로 돌아가더라도 불평할 수만은 없었다. 그것이 바다에서 울고 웃는 어부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태양의 기운을 받은 바다가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고기떼가 그물에 가득히 걸려들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마음도 저 붉은 태양만큼이나 뜨거웠으리라. 아침 해를 등진 채, 노 젓는 아버지의 모습이 힘없어 보였다. 나는 뱃전에 앉아 떠오르는 해님에게, 바다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내일은 고기가 많이 잡히게 해달라고. 그래서 밀린 수업료를 가져갈 수 있게 해달라고.

어수선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엊저녁까지만 해도 잔잔하던 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칠게 날뛰었다. 날이 좋아 그물까지 놓았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 소식은 아버지에게 달갑지 않았다. 갯내를 품은 샛바람도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아버지가 집을 나서며 모기작모기작대는 나를 불렀다. 어이하여 오늘 같은 날도 바다를 고집하는 것일까. 하기야 파도가 두려웠다면 배에서 하는 일은 이어가지 못했을 터이다. 바닷사람으로 살다보니 뱃심도 다져지고 심장도 커졌나 보다.

그물과의 한판 전쟁이 시작되었다. 빈 그물만 올라오나 싶었다. 그때였다. 통통하게 물오른 녀석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손이 시린 것도 잊은 채 조심스럽게 그물을 벗겨 내었다. 비늘이 벗겨지거나 생채기가 나면 제값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소녀 선원의 등골에는 식은땀이 났다. 싱싱한 녀석들로 배안이 풍성해졌다. 파도와 싸우며 바다로 나오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 있기 때문이리라.

물이 좋을 때 내다팔아야 한다며 뱃머리를 돌리는 아버지의 팔뚝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았다. 노 젓는 소리도 힘차다. 다행히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태풍은 지나갔다. 씨알 좋은 고기에 힘들었던 시간은 간데없고 나는 그저 어부의 딸로 웃고 있었다. 그랬다. 바다 사람들에게 위험은 그저 두 눈 질끈 감고 넘어야 할 파도와 같았다. 간밤의 꿈자리가 사납다며 아버지를 한사코 말리던 어머니가 모래사장에 등대처럼 붙박여 있다. 나는 오늘의 수확이 좋은 값에 팔리기만을 바랄뿐이었다.

따뜻한 국물이 차가운 속을 데워주었다. 생선찌개가 냄비째 올려진 소박한 밥상이지만 수라상이 부럽지 않았다. 아버지는 막걸리 한 대접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 뒤엉킨 그물을 손질했다.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아버지에게 어부의 삶은 나면서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바다는 논밭이나 다름없었다. 밭농사나 바다농사나 고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돌보지 않아도 계절에 맞게 양식거리를 내놓는 바다농사는 좀 더 수월한 편이었다. 바다는 땅보다 거칠었지만 땅보다 풍성하게 내주었다. 때로는 바다 곳간이 더디게 열려 애를 태우기도 하지만 그 시간을 인내하는 것도 바다에서 배웠다. 지나친 욕심은 허락하지 않는 게 바다의 법칙이었다. 곳간이 꽉 차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빼 쓸 수 없다는 것 또한 바다의 세법이었다.

저녁 무렵에 아버지는 잘 매만져진 그물을 나무배에 싣고 또다시 바다로 향했다. "막둥아, 내일 학교에 갈 때 얼마 주꼬?” 그 말에 나는 얼른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낡은 노에 작은 손을 얹어 힘을 보탰다.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아버지에게서 짠내가 났다. 아버지는 잘 닦여진 길도 아니고 발자국도 없는 망망대해를 잘도 헤쳐 나갔다. 계절이 바뀌어도 아버지는 바닷길을 누빌 것이고, 바다는 제철에 맞는 고기로 만선의 꿈을 이루어줄 것이다.

매일매일 주인이 바뀌는 바다. 주인이 없는 것 같지만 임자가 있는 바다는 몇 평만 가져도 배가 불렀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내 몫을 건져갈 수 있도록 넉넉히 내어주는 바다. 바다는 언제나 차고도 넘쳐 살맛나는 세상을 일구어 주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기대어 살았고 시계 소리 대신 들고나는 파도소리에 삶의 박자를 맞추어야 했던 곳. 지금도 고향 앞바다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고마움의 대상이 되고 있을 것이다.

바다에 다시 섰다. 생명이 펄떡이는 동해는 여전히 눈이 부시다. 태양이 일어선다. 쉰을 바라보는 나의 새벽바다는 여전히 몸을 씻은 아침 해가 조용히 회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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