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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걸레 / 박시윤

부흐고비 2019. 11. 24. 21:48

걸레 / 박시윤


봄 같이 따스한 날이다. 꽁꽁 얼었던 수도가 녹고 잔뜩 움츠렸던 몸이 기지개를 켠다. 할머니가 아침 일찍 방문을 열어젖히신다. 모처럼 맞는 휴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나 대청소를 하자는 말씀에 못 이기는 척 걸레부터 집어 든다. 손부인 내게 걸레가 쥐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걸레를 물에 텀벙 던져 넣는다. 비틀린 채 바싹 건조된 걸레는 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움츠린 몸을 푼다. 푸른 추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원래의 제 모습으로 풀어지는 걸레다. 뽀얀 빛깔과 가녀린 고름이 제법 앙증맞다. 쳐다보는 내내 물처럼 맑은 미소가 걸레 위로 떨어진다. 하늘하늘 잘도 풀어져 느낌마저 보드랍다. 욕조 속에서 여린 몸을 드러내고서 첨벙첨벙 조심스레 물길 질을 하는 아이의 모습 같다. 잔잔한 미소가 얼굴에 번질 즈음, 순간 기억 한 자락에 멈칫한다. 잊지 말았어야 할 것을 잊고 있은 듯 한동안 멍하다.

배냇저고리다. ‘일생에 처음으로 입는 옷’이라는 큰 의미를 붙여놓고 애지중지했다. 아이가 커 감에서도 함부로 버릴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손끝으로 더듬고 기억 끝으로 되뇌며 수백 번을 들춰 보았다. 아이가자라면 가보처럼 대물림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나보다도 더 살갑게 아이를 감싸고 잠을 재우던 배냇저고리가 지금 왜, ‘걸레’라는 허접한 모습으로 눈앞에 있단 말인가. 분명 가지런히 개어 아이 옷장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의문이 앞선다. 해진 자국이며 빛깔로 보아 아직은 영락없는 ‘옷’이다. 걸레를 들고 굳은 표정으로 할머니 앞에 간다. 애써 태연한척 할머니께 여쭙는데 숨기려던 언짢은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 모양이다. 작아서 못 입는 걸 걸레로 쓰는데 뭐가 이상하냐며 오히려 할머니는 내가 이상한 모양이다. 아이의 체취가 스민 옷이라는 별난 명목 하에 평생 모아둬 봤자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일 것이고, 걸레로라도 쓰고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신다. 빛깔 곱고, 깨끗한 겉옷들은 재활용센터에 이미 가져다주었고, 내의류처럼 질 좋은 몇 벌은 행주나 걸레로 쓰고자 남겨 두었다며 오히려 자랑이시다.

팔순의 할머니 말씀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볼멘 얼굴로 청소를 한다. 행주도 아니고 왜 하필 걸레인지 찜찜함은 사뭇 떠나질 않는다.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 넓은 집은 아니지만 자그마한 배냇저고리로 걸레질을 하기엔 벅차다. 걸레를 따라 나의 몸도 바닥을 기고 있다. 걸레를 바닥에 던지며 한숨을 쉬기도 하고, 한껏 펼쳐 보기도 한다. 촘촘한 박음질이며, 네 개의 고름이 깨끗한 걸로 보아 여전히 옷이다. 수건도 아니고 애당초 내 허락도 없이 배냇저고리를 걸레로 쓰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마음이 언짢아 몇 번이고 던지고, 주워들고를 반복한다.

책장 칸칸이, 바닥 구석구석을 온몸으로 더듬거리는 걸레다. 가족의 수만큼 닦아내야 할 먼지도 많다. 지난 한 해는 시어머님의 교통사고며 남편의 급작스런 수술,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잇따른 입원으로 나의 몸은 열 개라도 부족했다. 여름이 가고 모든 가족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무렵, 씩씩하고 꿋꿋하게 버텨내던 내 몸에 체증처럼 쉽게 내려가지 않는 고단함이 깔리기 시작했다.

불 꺼진 방이 좋았다. 빛이 싫었고, 그저 몸을 뉘고 넋 놓은 채 처져 있었을 뿐이었다. 먹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걸레질조차도 할 수 없었다. 구석구석에 먼지들이 내려앉고, 바닥에 잔 때가 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물가물 몽환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방문을 열어젖힌 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아픈 허리와 무릎도 마다하고 손부인 나를 위해 미음을 끓이셨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늙은이라도 때 거르고 누워있는 손부며느리의 입에 아직 풀칠해 줄 기력은 남아있다.”고 하시는 할머니의 위로에 이상스레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입이 까슬 했지만 밥만 눌러 끓인 미음은 참기름장과 함께 잘도 넘어갔다. 누구보다 기운을 차려야한다고 속곳 깊숙이 넣어둔 쌈짓돈까지 꺼내 쥐어주셨다. 그리고는 그 쪼글쪼글하고 마디 굵은 거친 손으로 가족들을 위해 걸레를 잡으셨다.

엎드려 걸레질을 하는 할머니의 눈이 젖고 있었다. 할머니도 닦아내야 할 먼지가 있나 보다. 할머니는 가슴에 묻고 계신 사연을 마치 남의 말 하듯 들려주신다. 잠자던 돌배기 아들을 가슴에 묻으셨다. 어려운 세간에 젖 한번 배불리 물리지 못했다. 그날따라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유달리 곤히 자고 있었다. 한 푼이라도 벌겠다는 욕심으로 양말 보따리를 이고 동네를 다니며 다리품을 팔았다. 반나절쯤 지났을까 돌아온 방엔 인기척이 없고 여전히 아이는 곤히 자고 있었다. 물고 자던 엄지손가락도 그대로였다. 젖이나 물리자고 안아든 돌배기가 그렇게 싸늘하고 무거울 수가 없었다.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 내의를 장만해 입히고 배냇저고리 한 벌 같이 보내주었다 한다. 창틀에 끼인 먼지처럼 평생을 닦아도 쉬이 벗겨내지 못할 상처란 걸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벌 써 반년이 넘었다. 나는 다시 일어났고, 가족들은 생기를 찾았다. 대야 속에서 몇 차례 물을 뒤집어 쓴 걸레가 깊숙이 숨겨둔 먼지며 머리카락들을 끄집어낸다. 뽀얗던 배냇저고리가 까무잡잡하게 제법 걸레의 티를 내며 빨래판 위에 질펀히 몸을 눕힌다. 칠 테면 치라는 자세다. 아직도 토해내야 할 미련이 남았나 보다. 비누칠을 하고 하얀 거품이 빠질 때까지 있는 힘껏 치대고 또 치댄다. 아무리 용을 쓰고 한들 본디 빛깔을 찾을까마는, 한 줌의 미련처럼 백옥의 빛깔을 기대하는 건 어쩌면 걸레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내어놓으라는 내 미련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배냇저고리의 삶은 그대로 행복이었다. 걸레로서의 삶은 또 그대로의 행복이다. 배냇저고리가 걸레가 되었다고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걸레’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방과 마루, 책장의 먼지를 말끔히 닦으며 제2의 삶을 연다. 시간이 흘러 걸레도 해지고 색이 바래겠지. 세대에 동떨어진 뒷방 늙은이 즈음으로 여기고 있을 때 내가 터득하지 못한 삶의 먼지들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어루만져 주겠지.

아무것이나 걸레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오래 사용하여 물을 잘 먹어야 한다. 보드라우면서도 묻혀온 때를 잘 토해내는 질긴 면 종류의 옷일수록 일등품의 걸레가 된다. 세월이 흘러 나도 모르게 터득한 걸레의 비법을 무의식중에 대물림하는 것은 아닐까.

귀할수록 천하게 돌리라는 말이 있다. 아까워 말고, 귀히 여기지도 말며, 이쁘고 좋아도 표내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저 아무렇게나 쓰되, 귀히 여기는 마음만은 깊숙이 간직할 일이다. 그리 하면 천함 속에서 귀한 빛이 저절로 배어 나오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다.

걸레가 지나는 곳마다 윤기가 반지르르하다. 온몸으로 기고, 구르던 아이의 모습 뒤에 가족들의 함박웃음이 쏟아졌던 것처럼 장인정신으로 걸레가 지나간 뒷자락엔 따스한 햇살들이 내려앉는다. 온 집 안에 걸레가 열어놓은 볕들이 춤을 춘다.

폭폭 삶아낸 걸레가 마르고 있다. 온몸이 비틀린 채 눅눅하게 말라가던 화장실 구석이 아니다. 옥상 건조대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햇볕을 한껏 받으며 바람에 장단을 맞춘다. ‘옷’과 ‘걸레’의 경계를 벗어나 배냇저고리의 가녀린 옷고름과 군데군데 스며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훈장처럼 품고 가장 걸레다운 모습으로 말라가리라. 걸레에도 푸른 동공이 꿈틀대고 있음을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는 아이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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