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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껌 / 박시윤

부흐고비 2019. 11. 24. 21:57

껌 / 박시윤
2012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참 오래토록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유년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를 잊고 살았을 것이다. 몇 백 원 하지 않는 가벼운 값어치만큼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기억에도 없는 껌은, 유통기한이 지나 먹을 수 없는 음식처럼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곤 했다.

직장에서 상담역을 맡은 후로 온 종일 수없는 말을 쏟아 놓는다. 사람들을 대하는 일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오후가 되면 소금 한줌을 삼킨 듯 온 입 안이 텁텁하고 입술은 부르튼다. 누구와 무슨 소리를 주고받았는지 기억에도 없다. 아이처럼 궁금증의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람을 대하고 나면 온몸에 진이 빠져 꼼짝달싹도 하기 싫어진다.

며칠 전 손바닥을 턱에 괴고 멍하니 있을 때, 동료가 웃으며 껌 하나를 올려주고 갔다. 매일 인상 쓰지 말고 단맛 한번 혀끝에 묻혀 보라고 했다. 그녀의 호의가 왜 이렇게도 언짢은 걸까. 씨익 웃으면서도 섣불리 껌에 손을 대지 못했다. 평소 그녀의 입 속에서 놀아나는 속살 뽀얀 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였다. 앞니까지 몰고 나와 자근자근 씹어대다가 혀끝을 길게 빼물고는 있는 힘껏 풍선을 불기도 하고, 때로는 큰 웃음으로 까악까악 마무리 하는 그녀의 껌 씹는 모습이 천박스러워 보였다.

면 소재지 삼거리에는 ‘청실홍실’이라는 다방이 있었다. 어머니의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아버지는 늘 그 다방에 계셨다. 아버지는 쓰디쓴 커피 한잔이 이유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홍 양이 이유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나와 친구들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방 앞을 기웃거렸던 이유도 홍 양 때문이었다. 시골 아낙들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녀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젊고 예뻤다. 다방의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현란한 웃음과 그녀의 입 속에 놀아나던 뽀얀 껌은 보기에도 도시스러웠다. 짝짝짝, 껌 씹는 소리는 시골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흙만 일구던 남성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그녀만의 야심찬 언어와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방 앞을 기웃거릴 때면 홍 양은 어김없이 껌을 나누어주었다. 남자들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먹을 것이 귀했던 시골 어린 아이들까지 달콤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싫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나누어주는 껌은 곧장 나의 혀끝을 파고들어 좀처럼 빠지지 않는 달고도 연한 향을 남겼다. 나는 알맹이를 잃은 껌 종이마저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책 속에 묻어 두었다.

홍 양의 인기몰이가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다방이 문을 연 지 1년 만에 누구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급기야 누구의 아이를 배었다는 이야기까지 입에 오르내렸다. 그녀 때문에 아낙들의 심기는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아낙들의 입 속에서 그녀는 날마다 잔인하게 씹히고 있었다. 부녀회의가 열린 뒤 씹다가 뱉어버린 껌처럼 그녀는 달랑 가방 두 개만 들고 마을을 떠났다. 눈이 내렸다. 거센 눈발은 아낙들의 혀끝에 어쩌면 달짝지근한 회오리를 몰고 왔는지도 모른다.

홍 양이 떠나고, 남은 건 책 속에 신줏단지 모시듯 모아둔 껌 종이가 전부였다. 단내가 그리운 날에는 껌 종이에 코를 갖다 대었고, 때로는 껌 종이에 인쇄된 시를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고, 도시의 화려한 빛이 반짝거렸다. 홍 양이 떠나고 단내를 잃은 나는 소금을 뒤집어쓴 배추처럼 풀이 죽곤 했다. 껌을 사달라고 어머니에게 조르면 껌은 술집 기생들이나 씹는 천박한 것이라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아마도 어머니에게 껌은, 홍 양을 볼모로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임이 분명했다.

학창 시절을 건너오면서 만난 불량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껌을 씹고 있었다. 마치 트레이드마크인 듯 그들의 입 속엔 껌이 있었다. 등굣길에 껌을 씹었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부에 걸려 오리걸음을 했는가 하면, 수업시간에 껌을 오물거렸다는 이유로 교무실까지 끌려가 반성문을 써야 했다. 껌을 씹다가 잠이 든 다음 날은 머리카락 한 움큼을 고스란히 잘려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렇게 껌으로 인해 나 또한 편할 날이 없었다. 급기야 나는 다시는 껌을 씹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껌과의 별거는 오래토록 지속되었다. 학부형이 된 후 아이에게까지도 껌은 나쁜 음식이라고 세뇌시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원에서 늦은 귀가를 한 아이의 입이 오물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껌이라는 걸 알고 어디서 났느냐며 다그쳐 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할머니가 주더라며 울먹울먹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준 걸 넙죽 받아먹은 아이가 걱정스러워 더 크게 야단을 쳤다. 남은 껌은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나 아이는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입을 오물거렸고, 야단이 깊어질수록 아이의 입 속 그것의 동작은 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날로 노파가 궁금해졌다. 왜 매일 아이에게 껌을 주는 것인지, 아이는 왜 한 번도 노파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드는 것인지, 점점 나에게 의문의 부호를 던지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 부는 저녁 고깃집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만큼 바깥의 어둠도 깊어지고 있었다. 그때 고깃집 문이 드르륵 열렸다. 돋보기를 낀 남루한 차림의 노파가 들어왔다. 바쁜 와중에도 주인은 얼른 물 묻은 손을 닦고 노파를 난로가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괜찮다는 듯 손을 젓는 노파와 주인의 대화는 무언이었다. 그때 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노파에게로 가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노파는 환하게 웃더니 아이에게 너무도 익숙하게 껌 한 통을 건넨다.

“받지 마!”, “받아!” 나의 말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남편이 막아섰다. 남편도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지폐 몇 장을 꺼내 노파가 들고 있는 <불우이웃돕기>라 적힌 함에 넣었다. 노파는 남편에게도 껌 한 통을 건넸다. 남편과 아이, 노파의 웃음 속에 나는 이방인처럼 밀려나고 있었다. 노파가 고깃집을 나가자 남편은 불쾌해하는 내게 입을 열었다. 남편이 어릴 때에도 저 노파는 여전히 껌을 팔았다고 했다. 언젠가 남편의 방을 정리하다가 묵은 책 속에서 와르르 쏟아지던 껌 종이를 본 적이 있었다. 구김살 없던 껌 종이의 주인이 바로 저 노파라고 했다. 청각장애가 있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평생을 저렇게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껌을 판다고 했다. 노파에게 껌은 자신과 같이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손자의 부모가 되어 주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있는 징검다리라는 것이다.

왜 하필 껌일까? 껌 팔아 무슨 돈이 될까? 노파는 거리의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도 미안함이 앞섰던 것일까? 맨손으로 구걸하기가 미안해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껌을 택했던 것일까? 껌 한 통에 기분이 멍 해졌다. 껌은 노파에게 질기고도 질긴 생계의 수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해져 왔다.

껌 뒤에 있을, 노파가 책임져야 했던 가족들이 떠올랐다. 들을 수 없기에, 말할 수도 없는 그들은 분명 우리와 다르지만 껌은 그들의 입 속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단내를 뿜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껌은 장애를 가지고도 거리낌 없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한 달콤한 인생의 연습이었을 것도 같다.

아이에게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던 나였다. 그러면서도 정작 눈앞에 둔 이웃조차도 돌아보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평생을 이 길을 오가며 껌을 팔았을 노파를 보며 문득, 왜 나는 한 번도 노파의 껌을 받아본 적이 없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결혼하여 10년 동안 이 길을 다니며, 어쩌면 나도 저 노파와 마주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노파가 내미는 껌을 외면하고 무의식 속에 앞만 보고 걸었을지도 모른다.

푼돈에 불과한 껌이 늘 냉정하기만 했던 가슴 한 자락을 따스하게 덥혀주고 있었다. 멀어지는 노파의 등에 내 시선이 찐득하게 달라붙는다. 껌에서 달짝지근한 사람의 냄새가 묻어난다. 감히 신(神)이라 해도 오늘 우리 가족에게 노파가 던진 끈끈한 메시지는 떼어놓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아이에게 껌을 허락했고, 지금껏 세상에 세뇌 당했던 내 속의 껌을 휴지 속에 고이 묻어 버렸다.

간혹 삶의 진이 빠져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있다. 무엇인가 달큼한 것들이 그리워진다. 그럴 때는 쓴 입 안을 달래줄 껌 하나쯤 곁에 두어도 괜찮겠다 싶다.

며칠 전 동료가 건넨 껌이 문득 반가운 오후다. 껌 하나를 빼물었다. 그 옛날 홍 양이 그랬듯 나도 힘차게 껌을 씹어본다. 홍 양도 말할 수 없는 가슴속 언어를 껌으로 대신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주머니 속에 있다가 입 속 기분이 우울해지는 날 껌 하나 가볍게 꺼내 하루의 응어리진 삶을 뱉어 보는 건 어떨까.

거실 가운데 아이 둘이 마주앉아 껌 풍선을 불고 있다. 풍선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세상을 향한 아이들만의 달콤한 언어가 까르르 쏟아진다. 세상을 이야기하는 아이의 입에서 우주가 가만가만 언어를 숙성시키는 냄새가 난다. 평생 은은한 향의 말들이 아이들의 입 속에서 봄날 꽃물 터지듯 피어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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