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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분첩 / 김은주

부흐고비 2019. 11. 25. 21:37

분첩 / 김은주


분첩을 샀다. 까만 바탕에 자개가 촘촘히 박힌 분첩이다. 분첩 뚜껑을 장식하고 있는 조개껍질은 장미꽃으로 피어나 있다. 장미는 검은 뚜껑이 밤하늘이라도 된 냥 서로 줄기를 문 채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반짝이는 뚜껑을 열어 보니 케이스 가득 분이 담겨져 있다. 그 분을 살포시 누르고 있는 분 솔은 보랏빛 솜털이다. 젊은 사람 화장대에나 어울림직한 이 분첩을 나는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께 드릴 요량으로 샀다.

삼월이 생신인 어머니께 무엇이 갖고 싶으냐고 물으니 주저 없이 분첩이라고 하셨다. 화운데이션도 아니고 분첩이라는 말에 잠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대지가 온통 새싹을 틔우기 위해 꿈틀거리는 봄날,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노모의 목소리는 온통 나비 떼가 되어 내 귀에 날아들었다. 봄의ㅂ과 분첩의ㅂ은 묘한 조화를 이루는가 싶더니 나를 마구 흔들어댔다. 의심스러워 또 다시 묻는 내게 아이 같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분첩이라고 말씀하셨다. 바깥출입도 시원치 않는 어른이 무에 분첩이 필요 하실까? 하는 것은 우리 젊은것들의 오만한 생각이고 팔순의 끝자락에 서 계시는 어머니는 그것이 그리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기사 늙고 젊고를 떠나 여자가 느끼는 본능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고와지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나는 육신의 기(氣)가 다해 지면 그런 본능들도 제 빛깔을 잃는 줄 알았다. 하지만 생이 짧게 남아있으면 있을수록 들끓는 욕구들이 더욱 아이처럼 단순 명료해 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단지 내가 젊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어머니의 첩첩 물속 같은 마음을 잠시 잊고 있었나보다. 굴신조차 힘든 몸일지라도 타인에게 곱고 깨끗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으리라.

분첩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서쪽으로 완전히 기운 어머니의 남은 삶이 저 분이 닭아 지는 동안만이라도 온전해야 할 텐데? 생각하니 금방 코끝이 매워져 왔다. 갈수록 짧게 남은 세월이 극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니 하늘에 별 이라도 따다 드리고 싶은 심정으로 이 분첩을 산 것이다.

그런데 몇 해 전 어울리지 않게 죽음 앞에 오롯이 앉아 있는 분첩을 눈물 그렁거리는 눈으로 바라 본 적이 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린 친구의 염습실 시신대 위에서다. 불가해한 장막인 유리를 사이에 두고 삶과 죽음,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서 나는 분명 분첩을 봤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죽음의 풍경을 곱게 살 떠내던 염습사의 손에 분첩이 들려 있었다. 유리의 속성상 훤히 그 풍경을 볼 수는 있어도 갈수는 없는 그 공간에서 육체와 영혼의 이별은 엄숙하게 치러졌다.

흰 천을 벗기자 망자의 몸이 드러났다. 염습사는 알코올로 정성스레 그녀의 몸을 닦아 냈다. 수차례 반복 된 수술로 그녀의 몸은 무너진 성벽 같았다. 폐허 같은 그녀 머리에 물을 뿌려 단정히 빗어 주었다. 오른 쪽으로는 관이 준비 되어 있고 버선, 아랫도리, 윗도리 순으로 수의가 놓여있었다.

염습사는 수분을 잃고 푸르딩딩해 진 그녀 얼굴에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염습사의 얼굴이 얼마나 진지한지 마치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화장하는 듯했다. 굳어진 그녀의 입 꼬리를 당겨 올려 미소를 만들었다. 산자를 위한 위안이겠지만 그녀는 웃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망자의 입에 쌀을 넣더니 손톱과 발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담아 몸에 끼워 넣었다. 염습사의 노력 때문인지 비로소 그녀의 얼굴이 평안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즈음 염습사는 눈길로 유리 밖 가족들을 불러들여 마지막 인사를 하게 했다. 오열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머리까지 수의를 씌운 후 온몸을 꽁꽁 묶었다. 그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시신대 위 여러 약품들 사이에서 처음 분첩을 발견했을 때는 적지 않게 놀랐었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에게 화장이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한줌 재로 돌아갈 육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은 가당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염습실 풍경 속에 놓여 있던 분첩은 마치 그곳에 있지 말아야 할 물건이 그곳에 있는 듯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염하는 모습을 남김없이 다 지켜 본 후에야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겉돌기만 하던 분첩이 죽음과 어우러져 말랑한 반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반죽은 딱딱한 내 사고를 녹이는가 싶더니 죽음 안에서도 여인은 아름답게 피어나야 함을 새삼 가르쳐 주었다. 살아 퍼득거리는 것에만 아름다움이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다. 죽음 속에도 늙음 속에도 다 다른 빛깔의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화장대가 아닌 시신대위에서 분?! 맛?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여인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귀한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가꾸어주는 분첩 또한 소중한 물건임에 틀림이 없다. 세상을 밝히기도 하고 저승길을 환히 닦아 낼 수도 있기에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지금 나는 난만하게 핀 꽃들을 보며 담티 고개를 넘고 있다. 차창밖에 보이는 꽃빛도 좋지만은 묵은 가지에서 돋는 연초록 새순이 더 볼만하다. 꽃피는 젊음이야 그냥 두고 봐도 아름다울 터이고 오늘따라 묵은 가지에서 돋는 새싹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쇼핑백 깊숙이 들어앉은 분첩을 다시 한 번 꺼내 본다. 이 분첩이 어머니의 손에 가 꼭 화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저 고운 분첩하나 수중에 간직하므로서 어머니의 마음속에 울울창창 숲이 우거지고 그 푸른 정기를 다 받아 들여 지팡이 든 손에 물이 올랐으면 좋으련만.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이 한창인 이때에 팔순 노모의 아이 같은 아름다움이 분첩위에서 별이 되는 봄날, 검은 분첩을 들고 나는 지금 어머니에게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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