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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낮술 환영 / 최화경

부흐고비 2019. 11. 29. 07:01

낮술 환영 / 최화경


지독한 감기로 삼월 한 달을 다 보낸 듯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번 감기는 너무 독해서 쉬 낫질 않는다고. 좀 우스운 게 해마다 이번 감기가 제일 무섭다고 얘기한다. 어쨌든 감기는 무서운 것보다 귀찮은 존재다. 냄새를 못 맡으니 맛도 모르겠고 썩 입맛 당기는 음식도 없었다. 냄새를 맡으려는 의지 때문이었는지 때때로 강렬한 맛의 음식이 생각나는 정도였다. 병원에서 나와 허청허청 걷는 어깨 위로 햇빛이 청결하게 부서졌다. 부신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려는데 붉은 색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낮술 환영 칭따오’

중국 음식점인 것 같았다. 순간 풍미가 좋은 자장면이라도 먹으면서 독한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막힌 코가 뻥 뚫릴 것 같았다. 나는 술을 못 마신다. 평생 취해 보지도 못하고 수주 한잔에 어지럼증만 느끼다 갈 것 같은 생각을 하면 취한 기분은 어떨지 아쉽기도 하다. 술은 낮술이 최고라는데 나도 낮술이라는 걸 한번 마셔볼까. 감기가 고약하긴 한가 보다. 정신까지 혼미해지는가? 혼자서 낮술이라니…….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걸음을 빨리 해 그곳을 지나쳤다. 낮술 환영, 낮술 환영, 이 강렬한 유혹은 아마도 환영이란 말 때문인 것 같았다. 어이없게도 난 다시 돌아와 칭따오의 문을 힘겹게 밀고 있었다.

실내는 어둑했다.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술을 마시는 사람도 없었다. 남자 몇 명이 모여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직원들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물 잔을 가져온 남자가 친절하게 뭘 먹을 건가 물었다. 난 망설이다 자장면을 시켰다. 술 소리가 입술에서 뱅뱅 돌았지만 결국 술 주문을 못 하고 말았다. 낮술 환영에 이끌려 들어온 곳이건만 술은 못 사리 상황이었다. 멋쩍고 아쉬워서 실내를 찬찬히 둘러봤다. 쿡 웃음이 나왔다. 낮술 환영이란 격한(?) 간판의 이미지와는 달리 시각마다 도트 무늬의 식탁보가 깔려 있었다. 물방울무늬보다 더 재미있는 건 분홍, 노랑, 연둣빛의 귀여운 색깔들이었다. 독한 술이나 시켜 놓고 강렬한 냄새의 자장면이나 먹을 생각으로 들어온 곳은 우습게도 핑크 레이디나 페퍼민트 같은 칵테일이 어울릴 것 같은 식당이었다. 색색의 식탁을 봄꽃인양 바라보고 있는데 자장면이 나왔다.

파격의 멋을 아는 선배가 한 분 있다. 어느 날, 선배가 젊은 날 술 마시던 추억을 얘기했다. 비 오는 날 술집 방에 틀어박혀 웃통을 벗고 핑크 플로이드 노래를 들으며 하루 종일 술을 마시던 얘기를 듣다 보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꽃잎이 하롱하롱 떨어지는 벚나무 아래로 소반을 들고 나가 술을 마신 얘기, 차를 달려 풍광이 좋은 대로 가서 보닛을 탁자 삼아 와인을 마시던 얘기, 낮부터 술과 음악에 취해 세상을 이해하고 삶을 관조했던 선배가 참 근사했다. 아마도 내 낮술의 환상은 여기서부터였을 것이다.

낮술은 돈 주고 피한다. 낮술에 취하면 부모도 몰라본다.

누군가 말한다. 술은 낮술이 최고여서 혼자만 마시려고 항상 부정적으로 얘기한다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낮부터 취해 있으니 하루 종일 행복할 거라고.

아무튼 낮술은 찬반이 엇갈리는 음주인 건 분명한 것 같다.

세상은 연일 찌개 냄비 끓듯 부글거린다. 보글보글 자작하게 끓여야 제 맛인 찌개가 성나서 넘칠 듯 끓고 있으니 깊은 맛은 없을 듯하다. 맛이 없다는 건 재미도 없을 터이다. 불꽃을 줄이는 심정으로 애정 있게 바라봐야 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 문제다. 노오란 봄빛을 섞어 마시고 싶은 내 낮술의 열망은 하루 종일 취해서, 감기는 물론 마땅찮은 세상일 다 잊고 행복해지고 싶은 건절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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