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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흐에게 말 걸기 / 최화경

부흐고비 2019. 11. 29. 06:58

고흐에게 말 걸기 / 최화경


태안으로 가는 길은 온통 바람이었다.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 소식이 있었지만 태안으로 가는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검은 바다, 기름 바다의 오명을 씻은 태안의 순결한 바다가 아른거린 건 봄꽃이 다 떨어지고 나서였을 것이다. 꽃이 떨어지자마자 날씨가 성급히 여름을 부르고 있었다. 사람으로 가득한 뜨거운 바다에서 찬바람의 바다까지의 시간이 너무 아득했다. 칠월에 비 소식이 잦았다.

종일 바람을 맞으며 비에 젖는 바다를 보는 것도 겨울바다 못지않은 정취가 있을 것 같았고, 미친 듯 기어오르는 허연 파도를 밀어냈다 끌어안고, 끌어안았다 밀어내는 등대가 보고 싶어 떠난 길이었다.

랑글루아 다리를 발견한 건 뜻밖의 장소에서였다. 바다로 가는 길목에서 '청산 수목원 축제'란 현수막이 바람에 몸을 못 가누고 있었다. 그곳은 작은 수목원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가꾸어 만든 개인 소유의 수목원 같았다. 구석구석 독특함으로 시선을 끌었다. 정작 연꽃은 아직 이른 듯 연잎만 무성했고 꽃대는 그다지 많이 올라오지 않았다. 축제 초입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주변은 고요하고 한산했다. 여기저기 기웃대며 천천히 걷다가 문득 그 다리를 봤다. 멀리서 봤을 땐 일본의 신사神社처럼 보였다. 시골의 작은 수목원에서 이웃나라 신사라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건 고흐의 그림 속에서 봤던 랑글루아 다리였다. 그러니까, 그림 속의 다리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나무다리였다. 신기했다.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 나온 듯 비슷했다.

남프랑스 아를르에 있는 랑글루아 다리는 배가 지나갈 때마다 다리의 양쪽 끝이 들리면서 열리는 도개교였다고 한다. 고흐는 둥글게 휜 다리 모양이 마음에 끌려 랑글루아 다리를 여러 번 그렸다고 한다. 다리를 설명해 놓은 표지판에 랑글루아 다리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림 앞에 오래오래 서 있자니 그림 속 강물의 동심원처럼 다리 아래 하천의 물이 흔들리는 듯 착각이 인다. 난 다리 앞에서 가만히 그림에게 말을 걸었다.

“고흐, 당신 지금 행복하세요?”

고흐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소. 예전 노란 집에서 살 때처럼 행복하다오.”

순간, 재작년 겨울 서울 전시회 때 봤던 고흐의 <노란 집>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보고 싶었던 작품들이 거의 전시 되지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그래도 위안을 주던 그림이었다. 시리도록 푸른 청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던 초록색 문이 달린 <노란 집>, 고흐가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그 <노란 집>이다. <노란 집>이 행복에 겨운 듯 나른하게 내게 말을 건다.

“고흐는 지금도 감탄한답니다. ‘아, 노란 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말입니다.”

고흐가 말한 대로 화가는 죽어서 그림으로 말한다. 나도 그림에게 말을 건다.

“새로운 랑글루아 다리가 있는 이곳도 아를르 풍광만큼이나 아름답네요. 무엇보다 우울하지 않아 좋군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붓꽃이 피어 있던 아를르의 풍경이 이곳 수목원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 환희 같은 게 가슴 가득히 밀려왔다.

뜻밖에 만난 고흐를 작별하고 바다로 가는 길에 누군가 말을 건다.

“태안반도엔 지중해보다 더 아름다운 바다가 도처에 펼쳐져 있답니다.”

내 눈 속엔 벌써부터 지중해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출렁이는 듯 차창 밖이 온통 푸른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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