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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울컥한다는 것 / 최화경

부흐고비 2019. 11. 29. 06:57

울컥한다는 것 / 최화경1


내 핸드폰 벨소리는 ‘에이미와인하우스’의 ‘발레리’다. 나는 워낙 그녀를 좋아해서 이 노래를 벨소리로 정했다. 비록 짧은 소절이지만 하루에 수십 번은 듣는듯하다. 어느 날은 노래를 들으려 느릿느릿 전화를 받을 때도 있다. 발레리는 ‘강해지는 것’이라는 뜻의 슬라브어 권에서 쓰이는 이름이다. 영어권에서는 밸러리(Valerie)라고 표기한다. ‘에이미와인하우스’는 아깝게도 스물일곱 살에 요절했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약물 중독과 거식증으로 고통 받다 죽어간 에이미가 너무 아까워 울컥하며 경련이 인다. 이건 몇 년이고 변함없는 감정이다. 울컥한다는 것은 격한 감정이 갑자기 심하게 치미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울컥한다는 것은 워낙 북받치는 감정이라 꼭 눈물로 이어지는데 실컷 울고 나면 후련해져서 오히려 슬픔이 희석 되는듯하다. 이런 정화된 기분은 누구든 한쯤은 느꼈을 것이다. 요즘은 어디서든 울컥하는 느낌을 받기가 쉽지 않다. 항상 뭔가 억울하고 답답한 일들이 많아 치가 떨리는 듯 진저리는 자주 치지만 감정이 격해져서 울컥해지는 일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세상은 항상 찌르며 대드는 송곳 같은 곳이어서 손잡이가 있는 안전한 쪽으로만 가고자한다. 그러나 안전한 쪽은 밋밋한 곳이기도 해서 그곳은 늘 건조하고 차갑다. 그래서 따뜻한 얘기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팔월은 운 좋게도 그 울컥하는 격한 감정을 몇 번이나 느낄 기회가 있었다. 애국가와 함께 시상대에 올라 울컥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주며 우리도 함께 울컥하게 했던 리우의 태극전사들! 생각해 보니 장한 것과 울컥함은 동질의 것인 것 같기도 하다.

연일 화염에 가까운 날씨가 계속되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아들이기보다 방화 셔터를 내리듯 창문을 닫아 화염을 차단하고 실내에 갇혀 지냈다. 폭염은 폭설보다 위험했으며 모든 게 정지된 듯 나른했다. 이런 날씨에 뭐든 피하기엔 극장만한 곳도 없지 싶다. 더구나 조조는 몰입하기 좋은 시간이다. ‘덕혜옹주’와 ‘터널’, 두 편의 영화를 봤다. ‘덕혜옹주’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나라 잃은 치욕과 식민지적 삶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고 허무하게 무너지게 하는지 분해서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 고종처럼 독살될까봐 평생 보온병을 끼고 다녔다는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도 보온병을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 그 모진 세월이 안타까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감기가 들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 보는 내내 울컥울컥해서 울음 끝이 길어졌나보다.

영화 ‘터널’은 부실 공사로 무너진 터널에 갇힌 자동차 딜러인 젊은 가장의 이야기인데 여기서도 분통이 터지기는 마찬가지다. 나라를 잃지 않아도 나라가 없는 것보다 더 서러운 대접을 받는 게 이 시대의 지금 국민이 아닐까. 결국 스스로 탈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왔을 때, 그의 유쾌함을 가장한 담담함에 놀랐다. 상황의 어이없음이 억울하고 울컥해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가 구출됐을 때, 터널에 갇혔을 때보다 더 많은 인파에 갇혀 다시 압사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갑자기 친절해진 군중을 향해 모두 다 꺼지라고 소리친다. 가슴이 뻥 뚫린 듯 후련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울컥했다. 요즘은 점점 울컥해지는 감정과 만나지질 않는다. 분통이 터지지만 물러서야 이긴다고 천근의 무게로 나를 누르고 울분을 삼킨다. 세상은 자꾸만 울컥하는 감동이 없어지고 울컥의 또 다른 의미, 먹은 것을 갑자기 거세게 토하는 소리만 커지는 듯하다.

  1. 최화경: 2003년 ‘좋은문학’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음악 없이 춤추기’ ‘달을 마시다’ ‘낮술 환영’을 펴냈다. 대한민국 문학예술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 행촌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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